쉿, 나의 세컨드는 - 김경미 시집
김경미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에의 지독한 어색함이라는 부적격의 고통을 달래주는 거의 유일한 도구, 시

이것이 김경미의 '시론'이자 '시에 대한 변명'이다. 

김경미의 시를 읽다 보면,
아, 이 아이디어 좋다, 또는
야, 이런 사고 방식이 맘에 드네.
그래서 베껴두고 싶어지고 한다. 

그의 시들이 가진 제목은
방명록, 비망록 이런 말들이 덧붙어 있다.

아, 따뜻한 식빵에게 안겨봤으면...
식빵을 안고 길을 걷는 것도 황홀한데,
식빵에 안겨봤다면...

넓고 따뜻한 식빵에게 안겨봤으면 좋겠어
분꽃 그 작은 대롱 속에 들어가
종일 꽃의 내부를 살아봤으면 좋겠어

진실을 눈썹처럼 곰곰히 만져 봤으면
좋겠어
한장의 풍경과 침묵과 나.
셋이서 나직이 약혼 했으면 좋겠어
추억이 돌아서서 타조처럼 다시 뛰어와
용서의 밤을 얘기하고
오늘도 생각하고
내일도 생각하면 좋겠어
당신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어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방명록 )

풍경,
침묵,
그렇게 셋이서 약혼했으면... 

방명록이란 건,
누군가가 방문했음을 남기면서
꽃다운 이름을 적어두는 첩인데,
자신이 살았었음을,
침묵하면서도 웅변으로 남겨둘 수 있는 방명록을 가지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왜 극장처럼 어두워서야
삶이 상영되는 느낌일까
 
극장 매점의
팝콘처럼 하얗고 가벼운
나비 같은 생은 어떤 감촉일지
 
가끔씩 나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병아리 깃털이나 잎일 수 있는지
후, 불어보고 싶어진다 (방명록 2)

통상 속편은 원본만 못한 편인데,
방명록 2는 1보다 좀더 감각적이어서 좋다.
어두워서야 상영되는 사람.
팝콘처럼 하얗고 가벼운 나비같은 생을 꿈꾸는,
그래서 자신을 병아리 깃털이라 상상하고 후, 하고 불어보는 사람.
그런 이름이 남아 있다.

쓸쓸함에 대하여

-비망록

그대 쓸쓸함은 그대 강변에 가서 꽃잎 띄우라
내 쓸쓸함은 내 강변에 가서 꽃잎 띄우마
그 꽃잎 얹은 물살들 어디쯤에선가 만나
주황빛 저녁 강변을 날마다 손잡고 걷겠으나
생은 또 다른 강변과 서걱이는 갈대를
키워
끝내 사람으로는 다 하지 못하는 것 있으리라

그리하여 쓸쓸함은 사람보다 더 깊고 오랜 무엇
햇빛이나 바위며 물안개의
세월, 인간을 넘는 풍경
그러자 그 변치않음에 기대어 무슨 일이든 닥쳐도 좋았다

자꾸 이렇게 적어 댄다.
방명록에는 <자신이 존재했음을>
비망록에는 <스스로도 믿지 못할 기억의 존재를> 남기기 위하여 적는다. 

인간은,
인간은 그에게, 어색하고 부적격스러운 것.
그래서,
깊고 오랜 쓸쓸함,
세월,
풍경,
이런 변치 않는 존재들에 비하면, 스스로는 어색함과 부적격의 고통으로 울고 싶어지는 것.
그런 순간을 잊지 말자고, 이를 악물고 연필에 힘주어 비망록에 적었나보다.  

나, 돌아오지 않는 나,
일회의 나, 그 삶, 되돌아온들
아무것도 모를 현생의,
한 번의 나, 그 시간들, 나의
지나감들일뿐(저기 옛 애인들 지나간다, 부분)

이 시에서도 역시 스스로는 지나감에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한숨짓는다.

그렇지만, 김경미의 시가 늘 이렇게 세상을 낯설어하는 것만은 아니다.
간혹 <돌파>처럼 치열한 시도 돋보인다.

송곳 끝을 밀어내는 습자지 뭉치
덤프트럭을 통과해내는 채송화
포크레인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개미
톱니바퀴를 물어뜯는 카네이션
총알의 중심부를 가르는 촛불

여기 이곳을 끝끝내 돌파하자고 내 영혼이여 (돌파 )

지독한 어색함과
부적격의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
거기를 어색하지만 끝끝내 돌파하자고
자신의 영혼과 다짐을 한다. 아자!

서로 편지나 보내자 삶이여
실물은 전부 헛된 것
만나지 않는 동안만 우리는 비단감촉처럼
사랑한다 사랑한다 죽도록
만날수록 동백꽃처럼 쉽게 져버리는 길들
실물은 없다 아무 곳에도
가끔 편지나 보내어라 

선천적으로 수줍고 서늘한 가을인 듯
오직 그것만이 생의 한결같은 그리움이고
서역이리니 (나의 서역)

이 시 역시 <방명록>류의 시다.
스스로를 선천적으로 수줍고 서늘한 가을, 이라고 명명하고,
생의 한결같은 그리움으로 살아가는 자가 남긴 꽃다운 이름. 시. 

만날수록 쉽게 져버리는 길.
만나지 않는 동안은 그래도 비단처럼 아름다운 존재들.
그 존재들에 대한 반신반의.
그 답은, 편지. 가끔 편지'나' 보내는 행위. 

누구를 만나든 나는 그들의 세컨드다
,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부모든 남편이든 친구든
봄날 드라이브 나가자던 자든 여자든
그러니까 나는 저들의 세컨드야, 다짐한다
아니, 강변의 모텔의 주차장 같은
숨겨놓은 우윳빛 살결의
세컨드,가 아니라 그냥 영어로 두 번째,
첫 번째가 아닌, 순수하게 수학적인
세컨드, 그러니까 이번,이 아니라 늘 다음,인
언제나 나중,인 홍길동 같은 서자,인 변방,인
부적합,인 그러니까 결국 꼴찌,

그러니까 세컨드의 법칙을 아시는지
삶이 본처인양 목 졸라도 결코 목숨 놓지 말 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 것
적자생존을 믿지 말 것 세컨드, 속에서라야
정직함 비로소 처절하니
진실의 아름다움, 그리움의 흡반, 생의 뇌관은,
가 있게 마련이다 더욱 그곳에
그러므로 자주 새끼손가락을 슬쩍슬쩍 올리며
조용히 웃곤 할 것 밀교인 듯 

나는야 세상의 이거야 이거 (나는야 세컨드 1, 전문)

그래서 세상과 화해하지 못하는 자신을 '세컨드'로 자리매김하려 한다.
세상의 세컨드.
목숨 놓고 싸울 필요 없는 세컨드.
슬슬 웃음이 난다.
밀교다. ㅎㅎ  

 

끝내 넘볼 수 없는 조강지처, 그 천생연분 버티는,
넘보는 순간 끝장인,...

그리하여 언제나 나날을 두 집 살림으로 남몰래
서럽고 파릇파릇 격렬케 하는, 빈 집처럼 외롭고

헛헛케 하는, 들키면 머리채 뽑히게 하는, 그리하여
그날까지, 이곳에서의 생,
세컨드, 그
첩질이게 하는, 생의 본처,
그 유일무이한, 단 하나의 영원한 언약, 배신 없는
사랑, 그 영광의
오직 본댁, 은
죽음, 인 것을...... (나는야 세컨드 2, 부분)

세컨드임을 커밍아웃하고 나면,
본질이 보이는 모양이다.
본질을 보고 나면,
그 본댁은, 죽음, 인 것. 

세상은 단지 두 집안으로 나뉜다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
박찬호- 마이너리그 때는 외로웠어요 혼자라는 생각에(마이너리그에는 사람 수도 훨씬
많은데…)
마이너리그 사람들은 사소한 모욕엘수록 목숨껏 화를 낸다
요즘 시 안 쓰나봐요, 안부를 물으면, 속으로
경멸한다. 천한 것들. 밥 먹는 것 못 봤다고 요즘 통 식사
안 하시나봐요 하다니 청탁이 없다고 시인이…
… 열등감만한 무기가 어디 있으랴
일 다녀보면 메이저리그의 수위 아저씨는
마이너리그의 사장님보다 더 무섭고 당당하다
미국인 선생을 위해 영어학원에서는 이름을 간다
아이 엠 톰 유 아 린다
꽃일수록 서양풍으로 처신해야 한다 그래도
마이너리그의 의자 수는 소파
메이저리그의 의자 수는 못임을 위안하지만
나라가 토끼 형상이라
우리는 유난히 눈들이 빨갈까 지구는
어디나 그럴까 우리가 아무래도 유난할까

덤으로 마음도 늘 메이저와 마이너로 나뉜다
거기서는 항상 먼지가 붕새를 쪼아 죽이곤 하지만(나는야 세컨드 5, 전문)


먼지가 붕새를 쪼아 죽이곤 하는 세상.
지독한 패러독스가 가득하다.
유난히 눈들이 빨간
토끼 형상의 나라 사람들.
세컨드로 삶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
그것이 운명임을 감지한 것일까?

가을에 알맞은 시를 찾았다.
오늘 아침에 읽기에 마춤한 시였다.
새파란 하늘에 나풀거리며 걸려든 솜사탕처럼
풀어진 솜사탕 갈래처럼 하늘에 얹힌 구름 몇 점. 

아침에 일어나면

어떻게 하면
어제보다 좀 덜 슬플 수 있을까
생각해요...."

오래 전 은동전 같던 어느 가을날의 전화.
너무 좋아서 전화기채 아삭아삭 가을 사과처럼 베어먹고
싶던. 그 설운 한마디. 어깨 위로 황금빛 은행잎들
돋아오르고. 그 저무는 잎들에 어깨 집혀 생이라는
밀교. 밤의 어디든 보이지 않게 날아다니던. 돌아와
찬 이슬 털며 가을밤. 나도 자주 잠이 오지
않았었다. (가을 통화, 전문)

가을을 타면,
자전거처럼 가을을 타면,
자전거 페달에 발을 얹고 내리막길을 시원하게 즐기듯,
가을을 타는 일은 조금 게으르게 사는 일이다. 

가을은 낙엽처럼
얼굴 빨갛게 물들 줄 아는 일.
그리고 낙엽처럼
가볍게, 덜 먹고,
뭐, 맥주에 소주 조금 타더라도 얼굴 그래서 빨갛게 되더라도,
가볍게 내려앉을 줄 아는 마음 갖는 일. 

맥주에 소주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가을을 타고,
그렇다고 속은 태우지 말고... 

남들 다 듣는 샤콘느보다 헤비메탈도 듣고,
그렇게 자신만의 가을을 타는 법을 배우는 것도
가을을 농익게 즐기는 법인 게다. 

시인처럼,
식물처럼 깊어갈 줄 아는 존재. 

그런 존재라야, 제대로 가을을 탈 수 있을 게다.

―선배도 이젠 고상한 음악 좀 들으세요.
나이도 있는데…… 온 국민이 다 재즈 팬인데……

돌아와 또 메탈 볼륨을 올린다 드럼 채가 튀어 식탁을
두드리고 신발장 안의 구두들 일제히 날아오른다
미안하다 이웃들이여 나 진심으로 그대들 사랑한
적 없다 서로 사랑하지 말고 묵묵히 멀리 있자고
그것만이 진실이리라고
나도 이렇게 시끄러운 볼륨을 높이니

고백건대 국산도 말고 외제 메탈만 듣는다
멀리 있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
상처가 되지 않는 거리
라벤더와 제라늄 식의 먼 명칭들
고백건데 저녁 무렵이 되면 신데렐라처럼
소리치고 싶어진다 돌아가야 해요 난 실은
사람이 아니에요, 난 식물이란 말예요!

매일 몇 마디씩이라도 하는 내가 때로 시끄러워 견딜 수 없다 침묵과
슬픔과 내향만이 내가 아는 메시아이므로
그러므로 누가 뭐래도 나는 무겁고 묵묵하게
그 고요하고 슬픈 음악을 들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식물처럼 깊어질 때까지 (헤비메탈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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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2 17: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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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2 20: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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