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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슬하 ㅣ 창비시선 330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평점 :
'옆'에 두고 오래 손때를 묻히고 싶은 시집.
이라고 쓴 뒤표지 손택수 시인의 말에 나도 동의한다.

이 시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는...
사람을 쬐다, 이다.
처음 이 시를 읽을 때, '사랑을 쬐다'로 읽었다.
읽다 보니, '사람'이었다.
사람이 서로 만나 '미음'이 닳고 닳으면 '사랑'이 된다더니,
사람을 쬐어야 살 수 있다는 말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 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
인기척 없는 독거
노인의 집
군데군데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었다
씨멘트 마당 갈라진 틈새에 핀 이끼를 노인은 지팡이 끝으로 아무렇게나 긁어보다가 만다
냄새가 난다, 삭아
허름한 대문간에
눈가가 짓물러진 할머니 한 사람 지팡이 내려놓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바라보고 있다 깊고 먼 눈빛으로 사람을 쬐고 있다(사람을 쬐다, 전문)

맨 뒤에 실린 '시인의 말'에서 '직접'이란 말이 11번이나 반복 언급되고 있다.
직접은 무모하고
위험해
직접은 힘들고 고달픈 거야
직접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시인이 되고 교사가 돼?
직접이 재밌고
직접이 즐거워
내 피부로 직접 저 햇살 받는 행복!
내 귀로 직접 저 물소리 듣는 기쁨!
그만큼 그는
직접 얻는 경험.
직방으로 한 소리.
이렇다저렇다 군소리 줄줄 붙이는 거 사절!
그래서 그는 '주석없이'란 시를 썼더랬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돌 때
너는 전반부 없이 이해됐다
너는 주석 없이 이해됐다
내 온몸에 글자 같은 가시가 뻗첬다
가시나무 울타리를 나는 맨몸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가시 속에 살아도 즐거운 새처럼
경계를 무시하며
1초만에 너를 모두 이해해버린 나를 이해해 다오
가시와 가시 사이
탱자꽃 필 때
나는 너를 이해하는데 1초가 걸렸다 (주석없이, [나는, 웃는다])
'나는, 웃는다'라는 이전 시집에 수록된 시라고 한다.
삶은 구구절절이 말을 들어봐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한다.
단 1초만에도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그런 직감, 주석없이 사는 태도에 대한 예찬은
역시 직방으로 던지는 '강속구'처럼 타석에 선 독자에게는 당황스럽기도 한 것인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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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인 불은, 차갑다(묶인 불)
개의 아가리에 텁석, 사람의 것이 물려 있다(사과를 반으로)
문득 어디 생리중인 여자가 있어 울며 그녀와 살 섞고 싶다(어머니의 자궁을 보다)
매화나무 아래에서/ 머리에 못이 꽂힌 고양이를 본다(네일 건)
봐, 손톱을 깎아/ 쓸어담아 놓고 보면/ 코스모스 씨앗처럼 생긴 이것들/ 들판에 휙 뿌려도 되겠어(손톱깎이 이야기)
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는/ 고양이에 가깝고/ 공에 가깝고/ 뭉쳐놓은 것에 가깝다네 그는 가장 작고 온순하다네(발톱 깎는 사람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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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의 구절들을 대해야 하는 타자에게
선구안이 필요한 것인데,
그 선구안이란 것도 결국은 투수의 손가락에서 공이 떨어지는 순간,
이번 공은 어떤 코스로 올 것이라는 '직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그리하여 빠른 공일수록
작용에 대한 반작용도 큰 법이어서,
직감이 맞아들어갈 때 큰 거 한 방이 나올 수 있는 것.
그리하여 최고의 쾌감을 맛볼 수도 있는 것.
그 선구안과 직감을
주석을 붙여서 '야구를 잘하기 위하여'라는 매뉴얼을 쓸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또,
인간이란,
이 물렁한 살의 아래에 구더기, 구더기, 구더기가 무더기 지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마디에
<저녁의 슬하>를 돌아보게 되는 시집.
저녁의 시간은 이제 삶이 슬슬 저물어 가는 시간이고,
황혼이 지고 나면 캄캄한 밤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 시간이고,
주변의 이런저런 인연들이 툭툭 끊어져 가는 시간이다.
오로지 캄캄절벽 한밤중을 위하여
독거,
혼자서 갈 준비를 한 시간이다.
고인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고인의 슬하에는
고인이 있나 저녁이 있나
저녁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저 외로운
지붕의 슬하에는
말더듬이가 있나 절름발이가 있나
저 어미새의 슬하에는
수컷이 있나 암컷이 있나
가만히
돌을 두드리며 묻는 밤이여
가만히 차가운 쇠붙이에 살을 대며 묻는 밤이여
이 차가운 쇠붙이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이 차가운 이슬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이 어긋난
뼈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이 물렁한 살의 슬하에는 구더기, 구더기, 구더기가 살고 있나(슬하, 전문)
나의 저녁에는
과연 무엇이 있나?
밤이 묻는다.
도대체 무엇이 있나? 무엇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