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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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고 쓰는 일이 전문가의 그것에서 누구나의 그것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환경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 쓰던 것에서 지하철이나 커피숍에서 휴대기기로 입력하는 것으로 변화해 실시간으로 전달이 가능한 시대로 급속이 바뀌고 있다. 

그러나, 조지 오웰이 펜으로 또는 타자기로 글을 쓰던 70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글의 품질을 좌우하고, 읽는 맛을 판가름하며, 좋은 글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그게 글의 내용이고 콘텐츠이며 글 쓰는 방법이고 이유일 것이다.

지난 주, 안철수가 서울 시장에 출마한다는 '설'이 나돌았을 때, 사람들이 환호했다고 한다.
뭐, 철수가 나오니 공주님보다 인기도가 높았다고 하니, 공주님의 인기도가 얼마나 허상인지 알 만하단 점에서 의미가 있었지만, 비정치인이 정치가보다 훨씬 인기가 높다는 것은 이 나라의 정치적 혐오감이 극에 달한 것임을 강변한다.
이제 한명숙이 박원순을 밀어주는 형국이 되는 모양인데, 글쎄, 사람들은 또 박원순을 좋아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사람들의 생각은 몇 가지의 잣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철수의 인기의 비결은 '2002 월드컵 열풍'이나 '황우석 신드롬'과 유사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왠지 근거를 대기는 어렵지만,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기대 내지 희망>을 그에게서 본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명숙이나 박원순에게 그런 아우라가 있는 것인지, 잘 살펴 봐야 할 것이다. 

인터넷의 속성상 기사로 도배를 해야할 콘텐츠가 있는데 이상하게 조용한 소재가 있다.
바로 '강호동 현상'이다.
일개 개그맨이자 사회자인 '강'을 '유재석'과 빗대어 2대 엠씨 어쩌고 하는데, 나는 그 말에 어폐가 있다고 느낀다.
강호동은 모든 방송국을 휘어잡는 '실세'였던 반면, 유재석은 '부드러운 카리스마' 어쩌고에 기대는 사람이다.
카리스마는 부드러울 수 없다. 모든 카리스마는 모종의 폭력적 일방성을 전제로 한다. 

강호동은 씨름 선수여서 몸의 카리스마가 넘치고, 나이가 들면서 양기가 '조디'로 올라왔는지 현란한 말빨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어쩌면 한국인이 필요로하는 태음인적 든든함을 그에게서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의 방정맞은 조디는 소양인적 인기도 담고 있었고. 
무식한 운동 선수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하여 '야심만만' 시절부터 그는 김제동 유의 진지함을 상업화했다.
누가 적어준 것일 수도 있고, 자기가 찾아온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아는 체'는 다른 진행자에겐 없는 신선함이었다.
본격적 토크쇼를 그만큼 웃기는 차림새로(무당처럼) 진행하기도 힘들 것이고,
스타킹이나 강심장처럼 시시한 연예인들 줄등장시키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기도 힘들 것이고,
예닐곱 명의 사내들이 좌충우돌 장난치는 1박2일같이 시시한 프로그램을 그토록 시끄럽게 만들기도 힘들 것이다. (유사한 패밀리가 망한 걸 보면 대조가 된다.)

그런 한 사람을 '한 방'에 보내버리는 것이 어찌 보면 무서운 사회의 단면처럼 보인다.
거대 권력인 방송국에 '개인 기업'처럼 보이는 인기인이 대들기 시작하면, 앞으로 방송국은 비실비실 웃기게 될 게 뻔하다.
그렇다고 개인을 그렇게 무참히 짓밟는 처사는 이 사회가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보여주는 잣대가 될 것이다.  
왜 '무죄 추정의 원칙'은 '고대 성추행범'같은 것들에겐 철저하게 적용되면서, '노무현, 한명숙, 곽노현, 강호동' 들에겐 철저히 무시되는 것인가?

써야 할 것에 대하여는 진지하게 쓰지 못하고, 왜 사소한 일들에는 목숨을 걸고 덤벼드는 세상이 되었는지, 답답하다.

각설하고, 이 책은 1940년대에 적은 조지 오웰의 평설들을 모아둔 책이다.
주제가 '인간은 왜 쓰는가'와 상통하지 않는 글들도 많다. 

그의 '나는 왜 쓰는가'란 에세이에서 <사실 모든 책은 실패작>이란 구절이 있다.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100% 드러내기 힘들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하여 '어느 서평자의 고백'이란 꼭지에서 <그냥 두면 아무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을 책에 대한 반응을 계속해서 날조해내는 작업>이라고 혹평한다. 요즘 기자들도 이 구절을 읽으면 쿡, 감흥이 올 것이다.  

이 책에서 오웰은 1945년 8월 일본에서 자행된 원폭 살상에 대하여 분노하면서, 현대 과학이 가진 힘과 능력은 무엇인지 되짚어 보기도 한다. 세상은 비행기로 경계를 허물 만큼 좁아지기도 했지만,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계를 핵무기를 통해 만들고 있기도 하다. 그것이 <세계화> 시대에 읽는 조지 오웰의 힘이다. 세계는 글로벌로 이웃이 되지만, 빈익빈부익부는 심화 정도가 아니라 절대화 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오웰의 시대를 휩쓸었던 <민족주의>에 대하여 많은 논고를 쓰고있는데,
'인류를 곤충 분류하듯 나눌 수 있으며 수백만이나 수천만의 사람들을 싸잡아 좋으니 나쁘니 하는 딱지를 붙일 수 있다고 여기는 모든 습성'이며,
'자신을 단일한 나라 또는 다른 집단과 동일시하되, 그것을 선악을 초월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만이 전부라고 여기는 습성'이라고 정의함으로써 '민족주의'의 해악을 간단히 드러내며 혐오감을 표시하고 있다.
물론 오웰의 사고는 다양한 정치적 반영이 드러난 걸리버 여행기 같은 작품들의 분석에 이어질 만큼 여러 상황과 관계지은 것이다. 한국처럼 그로기 상태에 몰린 권투 선수가 마지막 카운트 블로 한 방을 노리는 상황에서 기대는 <민족주의>만큼 위험한 상황을 그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4,500만의 영국 사람은 '부자와 빈자'라는 두 민족으로 나뉘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시대에 산 사람이다.

오웰의 글을 읽다보면 사람이 얼마나 종합적 사고에 무지한 존재인지 느낄 수 있다. 그가 식민지에서 경험했던 '사형수가 물웅덩이를 살짝 피해가는 모습'의 응시와 '코끼리보다 무가치한 노동자'의 존재에 대한 관찰을 읽노라면, 사람의 생각은 자신의 경험 총합을 넘기 힘든 것 같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서정시란 '가족들끼리의 농담'일 수 있다거나,
기록된 역사 대부분은 거짓인데, 오웰의 시대엔 <역사가 진실하게 기록될 수도 있다는 개념 자체를 포기>한다는 거란다. 

다시 강호동을 생각한다.
강호동은 연간 수백억의 수익을 올리는 개인 사업체나 마찬가지여서 또 연간 수십억의 세금을 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수입과 지출에 관하여는 매니저나 소속사가 관리하여야 할 부분이지 전적으로 그가 포탈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세금 잘못냈다고 죄인이라면, ㅎㅎ 대기업은 모두 참살시켰어야 하나? 

강호동 사태의 본질은 '권력'의 시녀로서의 방송에 저해가 되는 존재는 이렇게 만들 수 있다는 '본보기'로서
언론 권력의 힘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나의 상상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결국 오웰이 관심을 가지고 쏟아낸 글들의 많은 수가 그의 관찰과 상상을 통한 글쓰기의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이 책은 글쓰는 이에게 한 권의 교본과도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상상력이란 야생동물과 비슷한 것이어서 가둬두면 번식하지 못한다.(240)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다.(248) 

이런 단편적인 구절을 쓰면서,
오웰은 자신이 '갇혀버리기 쉬운 감옥'으로서의 언어에 얼마나 한계를 느꼈을 것이며,
'단순함의 빈터'를 잃어버린 스스로에 한숨쉬지 않았을는지... 약간의 공감을 보내는 바이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파워북로거 지원 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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