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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발자국 ㅣ 창비시선 222
손택수 지음 / 창비 / 2003년 1월
평점 :
손택수의 시를 가르치다 보면,
설명하기 어려운 통증이 남는다.
통증엔 격렬한 통증도 있겠지만,
그건 치료가 끝나면 잊혀질 수도 있는 통증이다.
통증 중엔
잊힐 만하면 찾아오는 만성 통증도 있게 마련인데,
손택수는 이 만성 통증 전문 시인인 거 같아 마음이 자꾸 쓰인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소는 죽어서도 매를 맞는다
살아서 맞던 채찍 대신 북채를 맞는다
살가죽만 남아 북이 된 소의
울음소리, 맞으면 맞을수록 신명을 더한다
노름꾼 아버지의 발길질 아래
피할 생각도 없이 주저앉아 울던
어머니가 그랬다
병든 사내를 버리지 못하고
버드나무처럼 쥐여뜯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흐느끼던 울음에도
저런 청승맞은 가락이 실려 있었다
채식주의자의 질기디질긴 습성대로
죽어서도 여물여물
살가죽에 와닿는 아픔을 되새기며
둥 둥 둥 둥 지친 북채를 끌어당긴다
끌어당겨 연신 제 몸을 친다 (소가죽북)
소와 북과 어머니.
죽어서 북이 된 소가죽과,
북도 아니지만 얻어맞던 어머니의,
청승맞은 흐느낌의 통증.
어쩜 한국의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아련한 애절함의 판소리 가락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질기디 질긴 통증은 죽어서도 살가죽에 와 닿는 아픔으로 살아나는 그런 것이다.
가지 하나가 휘어져서 땅거죽을 찌르고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예사로만 보아오던 조무래기 새떼며
눈비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꽃을 탐하느라 고집스레 가지를 끌어내리던
어스럭송아지하며
원을 그리며 흐르는 차디찬 물소리, 환한 달이 떴다
소를 잡고 난 뒤에 집안에 코뚜레를 걸어두면
복이 들어온다 했던가 한평생
소를 몰던 할아버진 땅속으로 돌아가고
이랴, 이랴 땅의 콧김을 받아 반들반들 윤이 나는 나뭇가지
휘묻이한 몸을 코뚜레 삼고, 한쪽 끝을
놓칠까봐 팽팽하게 조바심하고 있다 (물푸레나무 코뚜레)
코뚜레...
요즘엔 거의 잊혀진 이 단어는
예전에 동화로 읽은 적이 있다.
코뚜레는 그 작은 도구 하나로 소처럼 큰 동물을 제압하는 힘을 가진 기구다.
이 시에서는 통증보단 삶의 순환에 대한 생각이 주로 드러났지만,
나에게 코뚜레란 단어는 통증으로 앞서 다가선다.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살 대신
일곱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아버지의 등을 밀며)
자식의 소원 하나 들어주신 아버지,
이렇게 말은 하지만
그의 마음엔 비가 내리고 있음에 틀림없다.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보여주시고 만 삶의 낙인.
그 지게자국은 아픔이고 통증이다.
탁구공 튀는 소리다
스님들도 목탁대신
탁구를 칠 때가 다 있네
절집 처마 아래 앉아 비를 긋는 동안
함께 온 귀머거리 여자는
영문을 모른 채 그저 숫저운
미소만, 미소만 보이는데
통도라면 인도까지 갈까
저 빗소리, 내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그 머나먼 서역까지 이를까
흙이 아프지 말라고,
흙의 연한 살이 다치지 말라고
여자는 처마 아래 조약돌을 가지런히
깔아주고 있는데, 그
위에서 마구
튀어오르는 빗방울,
저 빗방울
하늘과 땅이 주고 받아 치는 탁구공 소리다 (통도사 빗소리)
비가 내리면
흙이 아플까?
흙의 연한 살이 아플까?
처마 아래 조약돌을 가지런히 깔아주는 여자의 마음이 오히려 저리게 다가선다.
그 여자의 삶이 아파서...
언뜻 내민 촉들은 바깥을 향해
기세 좋게 뻗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제 살을 관통하여, 자신을 명중시키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모여들고 있는 가지들
자신의 몸 속에 과녁을 갖고 산다
살아갈수록 중심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동심원, 나이테를 품고 산다
가장 먼 목표물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으니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하는, 시윗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산길 위에서 (화살나무)
나도 살면서 배웠다.
남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이 가장 아픈 사람임을.
그는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기에 가장 아플 수밖에 없음을...
가장 먼 목표물은 언제나 내 안에 있음을 가르쳐주는
화살나무의 아픈 진실.
기세 좋게 팽팽하게 살아가는 날에도,
살아갈수록 동심원이 멀어지는 것처럼 살아가는 날에도,
사실은 나이테는 바깥에서 하나씩 생기는 게 아니라,
가장 안에서 하나씩 생기는 것임을 생각하게 해 주는 시집.
아픈
통증의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