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서경식은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가르쳐준 사람이다.
서승, 서준식 형제의 동생으로도 유명했고, 프리모 레비의 인간에 대한 고뇌도 알려주었다. 

그의 비평들을 모은 책인데, 상당히 무겁고 답답한 느낌을 준다.
모어와 모국어에 대한 사고 전개는 그만이 펼칠 수 있는 세계가 있으므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3부의 일본 사정에 대한 글들은 일본의 속내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읽기가 쉽지 않았다. 
통일에 대한 이야기는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어차피 탁상공론이니 그렇다 치고. 
남북 정상이 마주앉아 이야기하는 외의 통일 논의는 모두 헛소리일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라면 '모어'와 '모국어'를 구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서경식에게 모어는 일본어고 모국어는 한국어다.
그는 '모어'로 사고할 수밖에 없고, 그에게 모국어는 외국어이다.
모국어로 기본적 의사소통이야 되겠지만, 깊은 사고는 모어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특히 2부의 평론에서 '재일 조선인, 자이니치'에 대한 역사적 무관심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일은,
그의 글을 읽을 때면 늘 겪는 일이지만, 아픈 일이다.
남과 북의 분단,
남한의 독재 정권에 의한 기민정책, 북조선의 동포 북송정책은 모든 자이니치들을 '있지만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청도 운문사 앞마당에 가면 규화목이란 나무가 있다.
나무 속에 규소 성분이 가득 들어차서 이젠 나무의 형태를 갖추곤 있지만,
내부는 광물이 되어버린 나무. 

규화목을 나무라고 하기에는 그 성분이 속속들이 모래알과 같은 규소고,
그걸 돌이라고 하기엔 그 생김새와 조상이 명확한 나무인 셈. 

자이니치의 처지가 규화목처럼 서글픈 거나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일본인이라고 하기엔 삶의 곳곳에서 한국인의 핏줄이 펄쩍이고,
한국인이라고 하기엔 그 삶의 양태가 더욱 일본인의 삶이 되어버린... 

서경식이 본문에서 간혹 사용하는 '스테레오 타입' 역시 자신의 그런 애매한 위치에서 날카롭게 찌르는 용어라 더욱 남다른 감정이 묻어나는 문구가 아닌가 싶다.
남들과 통념상 비슷한 거, 개성을 드러내기보단 비슷하게 가는 거, 운동에서도 반복 연습해서 반사적으로 나오는 거, 한국인이라면 보통 그렇고, 화장하는 여자라면 보통 그렇고, 경상도 문디라면 보통 그런... 고정관념이나 통념과 가까운 스테레오 타입. 

한나 아렌트도 자주 인용되는데,
개개의 행위의 '죄'는 개인으로 귀속되지만,
공동체의 성원에게는 언제나 정치적 의미에서의 집단의 책임이 부과된다
는 이야기가 여러 번 등장한다. 

한국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만행은,
미국의 앞잡이인 한국의 군사독재정부가 저지른 것이 아니다.
개별 한국인의 '따이한'들이 저지른 일이다. 그들이 퍼질러 낳은 아이들도 많다.
그렇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언제나 정치적 집단의 책임이 부과된다.
한국인의 베트남 사람들,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무죄가 아니란 말이다. 

일본인들은 '이제 일본인을 그만두고 싶어'라고 하지만, 그것은 간단하지 않은 일이다. 

이승연이 위안부 복장을 입고 화보를 찍든,
임재범이 히틀러 복장을 입고 노래를 하든,
그것은 그들의 자유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고려했다면,
자기의 여성스러움과 섹시미를 더 강조하려고,
자신의 남성다움과 터프함을 더 강조하려고,
돈을 벌기 위해 그런 컨셉트를 차용하는 일은 사전에 조율했으면 지혜로웠을 거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려,
공동체의 성원에게는 언제나 정치적 의미에서 집단의 책임이 따른다는 말 같은 걸 덧붙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다른 사람의 이나 눈에 상처를 주면서,
보복에 대해서는 관용을 주장하는 그런 인간과는 절대로 가까이 지내지 말라. (루쉰, 죽음, 322) 

일본이 지배했던 식민지 조선은 '남한, 북조선, 연변 조선족'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박정희 군사 독재 정부가 일본과 맺은 밀약과 한일협정으로 '화해'와 '관용'을 내세우는 자들이
일본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다.(여기서 한국이라는 말은, 한국의 민중보다는 한국의 친일파 족속 몇몇을 일컫는 말이어야 한다.)

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인가?
왼뺨을 맞았으니 오른뺨도 내밀라는 말인가?
일본의 우익은 <도의적 책임>이라는 레토릭(정치적 수사)으로 자신들의 조상이 저지른 <정치적, 물리적 책임>은 회피하려 한다.
또 식민지 조선을 괴롭힌 건 <우리가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었다는 말도 뻔뻔스레 한다.
거기 부화뇌동하여 <화해>와 <관용>을 내세우는 '대 학자'들이 한국에도 계시단다.  

견강부회라는 말이 있다.
끌 견, 강할 강, 붙일 부, 모일 회.
소를 강제로 끌고 가서, 암수를 모아 놓고 붙이려고 하듯이,
얼토당토않은 논리를 강제로 들이대는 통속을 비판하는 말이다.
속속들이 일본의 논리를 사랑해 마지않는 자들에게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싶다. 

'화해'라는 미명으로 '굴복, 굴종, 타협'을 강제한다.
이것을 작가는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썼다.
전두환이 그렇고 지금의 장로 대통령도 그렇다.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것들과는 화해를 거부할 수밖에 없음을 서경식은 잘 알고 있다. 화해 이전에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 노력이 우선되어야 함을, 그처럼 절실하게 느끼는 위치도 드물 것이다. 

자본주의는 <장벽>이 있어야 이득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Free Trade는 말이 자유 무역이지, 장벽을 쌓고, 그 장벽을 넘는 데 따른 이득을 얻고자 하는 자들이
자본주의 강국들이다. 

이 구조는 새로운 디아스포라들을 양산한다.
끝없이 재편성되는 <장벽>과 <디아스포라>의 흐름은 갈수록 난맥상인데,
그 복잡한 잎맥들도 잘 찾아보면, 줄기에서 물길을 끌고 오는 원맥이 있게 마련이다. 

이 복잡한 세상을, 힘이 지배하는 세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경식같이 세상을 읽는 힘을 가진 이들이 글을 써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나처럼 눈이 부족한 사람은 그런 책을 읽어야 하고, 그래야 극복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는 게 된다. 

언어의 감옥에서 창밖의 자유로운 새와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디아스포라만의 처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약자일수록, 난민일수록, 외국인노동자일수록,
자신의 언어는 <자유의 수단>, <소통의 수단>이 되지 못하고,
자신을 <감옥>에 가두는 속박의 수단, 남들보다 뒤처져보이게 하는 열등의 도구가 되기 쉬운 것이다. 

언어가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는 <장벽>을 낮추고, <난민>을 보호해야 한다.
난민도 살 수 있는 사회.
약자를 이해해 주는 사회.
이것이 앞서야지,
기업이 살기좋은 나라,
국가가 파워풀한 나라...
이것은 역시 약자를 짓밟는 구조를 재생한하는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언어의 감옥에서 보내는 편지는,
그래서 감옥을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생각하는 굳센 길을 걷는 일이 되기도 한다.
서경식의 글들이 더욱 탄탄한 힘으로 그 길을 다지길 바란다.

 

 ---------- 수정할 거 하나(편집자님이 보시면 댓글 달아 주세요. 지우겠습니다.)

191. 북위 16도선을 기준으로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할하고... 베트남의 38선은 북위 17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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