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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단어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93
유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6월
평점 :
시인마다 선호하는 단어가 있고,
끌리는 카테고리가 있다.
'오늘 아침 단어'라는 신선한 제목으로 만난 유희경이란 시인.
매일 아침 단어 하나씩 붙안고 브레인스토밍이라도 한다면...
창의력 기르는 공부로는 꽤나 괜찮아 보이기도 한다.
밥벌이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 뭘 만나도 제 하는 일에 대입하려 하게 마련이다.
이 시인의 시를 읽노라면 '그늘', '우산', '지도' 같은 단어들과 자주 만나게 된다.
맨 앞에 시인의 말에서 '수십 개의 단어와 한 사람을 동시에 떠올리는 일
나는 아직도 이런 일을 생각한다. '라고 적었다.
결국, 자신은 어떤 단어들과 맥락을 같이 하며 떠오르는 시인이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인 바,
'우산'이 들어가는 시, 우산의 고향, 우산의 과정, 우산의 반대말
'지도'가 들어가는 시, 지워지는 지도, 다시, 지워지는 지도,
'그늘'이 들어가는 시는 '부드러운 그늘' 한 편이지만,
나는 그의 시에서 짙은 그늘이 벗겨지지 않음을, 그의 시는 거기에서 연유하는 것임을 보고 있다.
그의 시는 그의 마음을 반영하지 않는다.
거울처럼 그의 마음이 이렇게 생겼다고 비춰주지도 않고,
은유처럼 그의 마음과 유사한 것들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다만, 그늘처럼... 어떤 지도를 찾아 더듬는 과정에서 그가 있음직한 지형을 그늘처럼... 만나게 될 뿐.
나는 당신의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사람이다 당신 발밑으로 가라앉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런 사람이다 당신이 눈감으면 사라지는 그런 이름이다 내리던 비가 사라지고 나는 점점 커다란 소실점 복도가 조금씩 차가워진다 거기 당신이 서있다 당신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그것은 모르는 얼굴이다 가시만 남은 숨소리가 있다 오직 한 색만 있다 나는 그 색을 사랑했다 당신은 내 오른쪽의 사람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도는 사람이다 내 머리 의에 흔들리는 이가 있다면 바로 당신이다 당신은 그토록 나를 지우는 사람이다 (당신의 자리)
이 시는 누구의 시점일까 골똘히 생각한다.
그림자일까? 시인의 그늘의 자리에 선...
발밑으로 가라앉는 그늘...
이 노래는 통째로 '그늘의 노래'가 아닐까...
당신이 선 그자리를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돌다가
발밑에서 한 색으로 존재하는 그의 그림자, 그의 그늘...
그늘의 마음의 색을 언어로 드러내려는 힘든 숨소리,
가시만 남은 숨소리...
오늘은, 날이 참 좋구나. 라는 말씀이 있었다. 나는 어쩔 줄 몰랐다. 그런 날도 있어야 하지 않겠니.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은 하늘이 참 파랗구나. 거실은 어두웠다.
아플 때마다 그늘이 생각나 바람이 불면 휘우듬 기울어지는 그녀. 어릴 땐 울지 못하고 다 커서 우는 게 뭘까. 개구리? 아니 사람. 사람이? 그래 사람이, 그렇게 살아. 거짓말. 너는 몰라. 내가 뭘 모르는데. 좀 더 어른이 되면 알 수 있어. 꼭 침대에 누워 있는 엄마처럼, 말하는 구나. 그늘을 내내 앓는 창문
컵에 물을 따르는데, 내가 울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좀더 어두워진 거실에서. 잠깐만, 너는 내가 아니니? 하고 물었다. 컵에선 물이 넘쳐흐르고, 나는 울고, 대답하지 않는다. 어둑어둑해진 거실에, 너무 많은 햇빛처럼, 그치지 못해? 컵을 집어던졌다. 깨진 것은 컵이 아니라 다 담지 못한 물. 나는 너무 슬퍼서 더, 좀더
그러니 가말 수밖에. 너무 많은 답장처럼 추워, 몸을 떨었다. 누가 있는 걸까. 복도를 텅텅 울리며 지나간다. 모든 것이 비뚤어진다. 말씀은 더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날은 이미 너무 좋았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휘어졌던 그늘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그랬다고, 나는 속으로
그래도 될까, 그제야 울음을 그친 내가 묻는다. 어깨에 손을 올리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울다가 웃으면 큰일난다.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노력하는 내가 말했다. 조각조각난 물방울이 어두운 거실을 채워간다. 나는 흔하고, 어디든 있고, 그러니 내가 혼자서 울고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더듬대며 말하는 소리.
그냥, 거실이, 사람이, 그러니까 내가, 오늘이, 참 좋은 오늘의 날씨가, 말씀이, 그녀의 병과 내가, 누군가의 복도가 마냥 어둡고 축축한 아니 서럽고 또 흘리고 (오늘은)
오늘은 화창한 하루였을 것이다.
그러나, 화자의 마음 한켠엔 계속 짙은 '그늘'이 드리운다.
<그늘을 내내 앓는 창문>으로는 결코 화창한 햇살 따위 드나들 수 없음을,
이미 햇살조차 '반투막'처럼 걸러내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그의 <창문>은 늘 '어둡'고 '컴컴'하고 '가말' 수밖에...
그의 삶 속 지도는 뚜렷한 방향성과 길을 제시하지 않는 형상이다.
방금 불어온 바람을 등지고 어리고 슬픈 내가 공을 주우러 뛰어간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 글러브는 누구의 가죽이고 날아가는 것을 보면 왜 소리를 지르고 싶어지는가
계집애가, 오빠를 쫓다 터뜨리는 울음을 빙그르르 돌리는 저녁이다 더는 돌릴 수 없을 때까지 숨을 참는, 어쩌면 생활의 무늬란 그런 것이지 꼭 다문 입술의 주름 같은 것 (지워지는 지도, 부분)
버스는 오지 않는다, 대기는 멈춰있다 물컹한 촉감으로 구름이 자라고 습도는 일 초의 힘으로 공중을 당긴다
곧 음악이 시작될 것이다, 악보 위로 교복 치마가 흔들린다 예보에 따르면 우리는 장마 속에서 살고 있다 정류장은 굳어 버렸다 가로등이 딱딱한 빛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백지장의 사내들이 어깨를 다문다, 공중에 몸을 감추고 있더니 비가 모습을 드러낸다 먼 거리는 없어도 좋다 왼쪽 가슴 오 센티 위에서도 비는 태어난다
갓난비를 맞으며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의 걸음에는 지도가 새겨져 있다, 나는 지도를 훔쳐보는 사람
음악 속으로 뛰어가는 모든 것은 사랑스럽다 비를 피한 울음이 커다란 눈으로 나를 지켜본다 어미가 아비를 사랑하고 아비가 어미를 찾아 헤매는 밤이 오면
예견된,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들이 등고선의 허리를 구부리고, 쏟아진다 지도의 모든 것 나에게로 쏟아지는 모든 것들 (다시, 지워지는 지도)
그의 삶은 지도에 비유되지만,
그 지도에는 방위 표시도 도로 표시도 명확하지 않다.
다만 알 수 없는 사태들이 <장맛비처럼> 쏟아지고
왼쪽 가슴 오 센티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비처럼 당혹스러움 투성이다.
그래서, 그의 '우산' 사랑은 당연한 걸까?
왼쪽 가슴 오 센티 위의 쏟아지는 비를...
우산 따위 받친다고 어찌해볼 수도 없는 사태인 것이지만,
그의 우산은 어찌할 수 없는 사태에 대한 한 마디 변명일지도 모른다.
바람이 죽는다 이렇게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감아 담아온 풍속이 쏟아진 다음, 투명한 손이 더듬어 내가 있다 그게 아니라면 잠든 사람을 설명할 길이 없다
사진을 떨어뜨린 여자가 있다 여자가 죽는다 죽어 찰랑이는 몸을 남긴다 그것참, 가는 살을 가진 빗 같다 이렇게 아플 줄이야
저기, 나눠 가질 수 없도록 물이 죽는다 죽은 다음에야 찰랑이는 빛을 남긴다 촘촘히 빗어 넘긴 검은 머리칼이거나 머리칼로 비유되는 것들
창문 너무 고요가 펄럭이고, 죽고 없다 저리 먼, 눈 먼 곳까지 가볼 리가 없다 뒤가 죽어 사라진다 서늘하다 달래기 힘든 아이가 울기 때문에
죽은 것이 죽었다 계절이 남긴 계절은 그래도 된다 손에 들었던 것들이 죽는다 죽었던 것들이 죽으려 한다 조용히, 그렇게 (검은 고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
아픈 비가 내리면,
그의 왼쪽 가슴 오 센티 위에서 '검은 머리칼'로 비유되는
서늘한 비가 내리면,
그는 검은 고요 속에서 우산을 받아야 한다.
우산은 그렇게 태어난다 우리는
젖은 채 태어나고 젖으려고 사는 것들
답 없는 질문처럼 꼭 그렇게
지금은 우산의 색을 떠올릴 시간
얌전히 들어서는 어둡고 익숙한,
곁에 머물고 이따금 스치던 손의 차가움.
아무도 올지 않는 이런 날엔 또 모두가 울고
날아간 것은 새들의 아득한 꿈이었을지도
젖어가는 것은 속속들이 빗물이었을지도 (우산의 고향)
우산에 대해서라면 오래오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검은빛이고 나는 펼쳐진 시간을 사랑한다.
예를 들어 점점 어두워져가는 거리, 어깨를 감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가로등 켜지고, 그림자 사라지고, 나는 머뭇거릴 때,
검은 물로 태어나는 것 혹은 젖은 몸으로 살아가는 것 쉽게,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 방법 혹은 혼자서 걸어가는 일
그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나뿐, 비가 온다는 얘기는 없었지만, 나는 긴 우산을 들고 있었고 하늘은 우울한 색으로 빛났다. 인부들은 동시에 신음을 쏟았다. 휘청이는 구덩이. 그러나 죽은 사람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그날의 색은 기억나지 않는다.
또 한 번 불붙은 것은 우산이었다 토요일이었고 나는 침착하게 걸었다 빠른 속도로 차들이 미쳐가고 웅덩이마다 가득한 멍이 넘쳐나, 토할 수밖에는
그러니 어떻게 우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길거나 짧고 접거나 펼쳐진 채, 기억과 함께 동시에 불어나는 존재를...
... 우연히 알게된, 나를 붙들고 한참을 울었던 사람 왜 울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나는 아직도 그녀가 왜 그렇게 울었는지 알지 못한다. 여자의 머리 위에서 조금씩 조금씩 흘러 내리던 검고 가느다란 실핀 그러나 아무도 우산을 펴지 않는다.
... 이것은 나의 오랜 철학이다 그것에 대해 나는 오래오래 이야기해왔고, 또 오래오래 이야기할 것이지만, 우산에 이름을 붙이는 미친 남자에 대해서라면
나는 그것을 고백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예뻐하지 않는다 그것이 없더라도 나는 그것을 그리고 그것과 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산을 함께 쓰고 가는 행위에 대해 우리는 깊이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쓰디쓴 추억일지라도 (우산의 과정)
고이면 좋겠어...
이렇게 끝내주는 소리는
천년 전의 것...
비가 내리는 만큼
입을 다문 사람
그게 아니더라도
이런 날씨 앞에서는
누구나 넓고 너무 투명하다
떠오른다 침묵하지 않는,
하고 싶은 말 지우고
젖어간다 모서리부터 (우산의 반대말)
이렇게 그의 우산은
젖은 채 태어나고,
젖어가며 살아가고,
젖으려고 사는 것들에게, (우산의 고향)
유일한 위안이 된다.
검은 물로 태어나 젖은 몸으로 살아가는 것들에게
우산을 함께 받고 가는 행위에 대하여,
삶의 과정에 대하여 생각할 때, (우산의 과정)
우산은 또 하나의 <단어>가 된다.
우산의 반댓말은 '비'일까?
내리는 비를 막는 것이 우산이니깐, '고인 물'일까?
우산에 토독 두두둑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가 우산의 반댓말일까?
그늘에 주목하는 그에게,
날씨는 흔히 젖어 있다.
빗줄기는 하얗고 가는 뼈이거나,
검은 머리칼, 또는 실핀처럼 온갖 형상을 하고 그의 곁에서 늘 서성댄다.
가야할 길이 제시된 지도조차 펼치지 못하는 그에게 필요한 건,
오늘 아침 그에게 필요한 건,
우산, 이란 단어가 아니라,
우산을 함께 쓸 사람인 거나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