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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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철주가 옛그림을 한 점 보면서,
A4 한 페이지도 안 될 짧은 글을 썼다.
그런데 그 글이 대단한 응집력과 매력을 발산한다. 

마치 물방울이 표면장력을 갖고 있어서 서로 끌어당기고 밀어내듯,
찰랑찰랑 가득한 찻잔에서 넘치지 않는 멋이 그만이다.
가끔 몇 방울 찻잔 밖으로 넘친들 어떠냐. 

옛그림 안에는 옛사람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이 그대로 담겼다.
풍속화로 불리는 삶의 단면도 프레파라트처럼 고정되어있고,
그 시절의 윤리의식도 함께 남아서 보존되어 있다. 

무엇보다 향기를 진하게 풍기는 것은,
그림 속에 담긴 인격인데,
문인화의 전통이 그리는 이의 '뜻'을 담고 있는 걸 중시하다보니,
풍기는 인격의 매운맛, 단맛, 쓴맛이 여간 아니다. 

매운맛은 캡사이신 수용체가 통증과 열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감각이라는 둥의 과학적 서술보다는,
그림 속에 비쳐진 사람들의 멋스런 삶이 현대인의 가슴에 그대로 전해지는 것은,
손철주 글의 장점이자 개성적인 맛이다. 

 

임희지의 난초를 두고 적은 글을 한번 옮긴다. 

   
 

하여도 이 난초, 심하다.
어쩌자고 이리 간드러지고 누구 마음 녹이려고 저리 교태인가.
샐그러진 잎이 바람결에 춤춘다.
여인의 소맷부리처럼 보드랍다.
꽃들은 맞받이에서 끌어안는다.
그리움 타서 옹그린 표정이 애잔한데,
꽃잎에 이슬 맺히면 글썽이는 눈망울을 볼 뻔 했다.
그려놓은 난초라도 마음에 심은 난초다.  

 
   

 

누군가 옛사람이 한국인의 심사를 '은근과 끈기'라고 했던가. 

최북의 <차가운 강 낚시질>을 두고, 유종원의 '강설'을 끌어왔다.

   
 

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
萬徑人蹤滅(만경인종멸)
孤舟蓑笠翁(고주사립옹)
獨釣寒江雪(독조한강설)

산이란 산,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길이란 길, 사람 자취마저 끊겼는데
외로운 배, 삿갓과 도롱이 쓴 늙은이
홀로 낚시질, 차디찬 강에 눈만 내리고 

원시의 운은 절묘하다.
절, 멸, 설이 압운이다.
입밖으로 소리내 보라.
잇소리 '리을'의 뒤끝이 적막강산으로 번진다.
산, 길, 강은 인정머리가 없고,
버림받은 시인의 하소는 메아리가 없다.
회한에 차 낚싯대를 드리운들 세월 말고 무엇이 낚이랴.

 
   

아, 이러하거든,
한시를 버리고 수능에서는 그저 순간적 판단력만 평가한다.
한시를 버리고...
잇소리 '리을'의 뒤끝이 적막강산으로 번지는 저 느낌과
산, 길, 강의 인정머리 없음에 버림받은 시인의 하소가 메아리 없음을
낚대 하나에 던진 고주사립옹...
이걸 가르치지 않고 문화를 어찌 전수하랴. 싶어 아쉽다. 

술이 한 잔 하고 싶어졌던 차에,
술 대신 술에 취한 사람들 이야기와,
꼭 취해야 맛이 아닌 그림에 빠진 사람들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또 늦게 잠이 들었다. 

돈을 주고 사야하는 책은,
바로 이런 책이다.
나무를 깎아 만들어도 아깝잖은 책이,
바로 이런 책이다. 

인간의 문화와 정신의 정수,
인문학적 사고가 가득차, 그야말로 텅빈 충만을 즐길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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