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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락 ㅣ 창비시선 295
정끝별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평점 :
세상은 차근차근 조근조근 오손도손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는다.
울컥 솟구치는 시간도 있고,
와락 달려드는 사건도 있고,
왈칵 눈물나게 만드는 일도 있고,
문득 초승달이 뜨면 가던 걸음 멈추게 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얼마전, 양철댁 님의 페이퍼에서 정끝별의 '설렁탕과 로맨스'를 만났는데
시가 시같지 않고 판타지 연애소설 같아서 좋았다.
시 속에서 만나는 판타지는 황홀하다.
뭐, 꼭 의미를 찾아서 세상을 사는 건 아니잖은가?
이런 메시지를 그저, 툭,
모래내란 동네 이름처럼 주머니 뒤지다 모래알 몇 개 툭, 떨구듯 시를 만나 시를 읽는다.
남자의 직업은 배우였어 한때 잘나갔던 연기파 배우였지 그러던 어느날 남자가 희박해지기 시작했어 처음에 카메라맨은 렌즈가 더러워졌다고 생각했어 렌즈를 닦고 닦았지만 남자는 점점 흐릿해져갔어 그제서야 카메라맨은 그 남자가 희미해져가고 있다는 걸 눈치챘어 "자네는 요즘, 초점을 잃어가고 있어" 감독도 자기 눈을 의심했어 하지만 금세 사태를 파악했어 "이보게, 자넨 휴식이 필요해, 자네가 선명해질 수 있는지 지켜보자구" 애인도 자꾸만 혼잣말을 시작했어. "어쩌나 당신, 텅텅 비었네" 더욱 희미해진 남자는 집으로 퇴각했어 집에서도 문제는 나아지지 않았어 아내는 짜증스럽게 투정했어 "인기척 좀 하세요, 깜짝 놀랐잖아요" 아이들도 놀라서 외쳤어 "아빠, 온통 바랬잖아!"
누구와도 대화해본 적 없던 남자
제 목소리를 내본 적 없던 남자
한번도 제 안을 들여다본 적 없던 남자
이 가엾은 영화 속 주인공이 혹시......(희미해지는 병에 걸린 남자)
남자의 양복 주머니를 뒤지다가 문득 만난 조약돌 하나는 서글프다.
그 조약돌은 처음엔 단단했지만 금세 희미해지고 흐릿해지면서 존재감이 없어져 모래알이 떨어지듯 무의미해진다.
모래내라는 그 동네 이름처럼...
반 평도 채 못되는 네 살갗
차라리 빨려들고만 싶던
막막한 나락
영혼에 푸른 불꽃을 불어 넣던
불후의 입술
천번을 내리치던 이 생의 벼락
헐거워지는 너의 팔 안에서
너로 가득 찬 나는 텅 빈,
허공을 키질하는
바야흐로 바람 한자락 (와락)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내린 시를 만나는 일은 황홀하다.
사랑은 그렇게 와락 달려드는 것인데도,
닿으려 할수록 닿을 수 없는 <막막한 나락>이고,
영혼이라도 닿을 듯 내리치던 <이 생의 벼락>이고,
안으려 할수록 텅 비어버리는 <바람 한 자락>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갈수록 허전한 <와락> 달려들었던 한 순간만을 남기고 희미해져 가는...
부사들의 존재론이란 권혁웅의 글맛도 글맛이지만,
세상 참, 떼꾼한 크리스마스 또 돌아왔네 (크리스마스 또 돌아왔네, 부분)
역시 해설은 해설일 뿐,
이 철없는 세상 살이를
<떼꾼한> 한 마디로 정리해버린 정끝별의 언어 사용 역시 '끝'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