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 시인선 291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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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창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사라진 손바닥, 전문) 

연꽃이 피고 한들거리다가 연밥 익으면서 꺾여가는 모습을 보고는
존재의 삶과 시듦의 방식을 끌어온다.
'격물치지'
사물(대상, object)을 바라보고 궁리함으로써 앎에 이르는 경지. 

존재가 시드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썩는 것과 마르는 것.
아름다움이 절정을 다한 뒤에도 물기가 남아 있으면 썩기 시작한다.
그것이 꽃이든, 음식이든, 영혼이든.
그러나 썩기 전에 스스로 물기를 줄여 나가면
적어도 아름다움의 기억은 보존할 수 있다.
이처럼 건조의 방식은 죽음이 미구에 닥치기 전에
스스로 죽음을 선취함으로써 영속성을 얻으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시인의 자평) 

오스트리아 마을에서
그곳 시인들과 저녁을 먹고
보리수 곁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어떤 손이 내 어깨를 감싸쥐었다
나는 그 말을 알아 들었다
그가 몸을 돌려준 방향으로 하늘을 보니
산맥 위에 초승달이 떠 있었다
달 저편에 내가 두고 온 세계가 환히 보였다 

그후로 초승달을 볼 때마다
어깨에 가만히 와 얹히는 손 있다 

저 맑고 여윈 빛을 보라고
달 저편에서 말을 건네는 손
다시 잡을 수 없음으로 아직 따뜻한 손 

굽은 손등 말고는 제 몸을 보여주지 않는 초승달처럼 (초승달, 전문)

이심전심, 심심상인, 염화시중, 염화미소
굳이 말이 필요없을 때도 있는 법이다.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도 귀가 없는 사람은 가르치지 못하셨다. 

누군가 맵찬 손으로
귀싸대기를 후려쳐주었으면 싶은 

잘 마른 싸릿대를 꺾어
어깨를 내리쳐 주었으면 싶은 

가을날 오후 

언덕의 상수리나무 아래
하염없이 서 있었다 

저물녘 바람이 한바탕 지나며
잘 여문 상수리들을
머리에, 얼굴에, 어깨에, 발등에 퍼부어 주었다.  

무슨 회초리처럼, 무슨 위로처럼 (상수리나무 아래) 

나와 시인은 동갑이다.
우리 나이가 되면,
회초리가 그립기도 한 나이다.
위로는 더 그리운 나이다. 

그렇지만, 하염없이 상수리나무 아래 서 있는 외에,
회초리와 위로를 만나기는 쉽지 않은 나이기도 하다. 

땅속에서만 꽃을 피우는 난초가 있다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기 때문에
본 사람이 드물다 한다
가을비에 흙이 갈라진 틈으로 향기를 맡고 찾아온
흰개미들만이 그 꽃에 들 수 있다.
빛에 드러나는 순간 말라버리는 난초와
빛을 피해 흙을 파고드는 흰개미,
어두운 결사에도 불구하고 두 몸은 희디 희다 

현상되지 않은 필름처럼 끝내 지상으로 떠오르지 않는
온몸이 뿌리로만 이루어진
꽃조차 숨은 뿌리인 (땅 속의 꽃, 전문) 

상처와 고통과 울음이 뒤섞인 저 어둠과 그늘과 그림자 속에서 눈뜨는 시인, 나희덕.
그는 빛과 꽃을 바라보지만,
숨은 뿌리까지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까닭은,
그의 시선은 밝은 곳만 더듬지 않는 까닭이다. 

빛이면서 어둠인 그늘이
오히려 어울리는 시인, 나희덕. 

어느 하나보다는 빛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그림자와 그늘이 사라지는 어둠이,
더 어울리는 시인, 나희덕. 

그의 시를 읽는 일은,
마른 손바닥을
마른 눈길로 쓸어보는 일처럼 쓸쓸하기도 하고,
쓸쓸하고 건조한 눈길이기에 찾아낼 수 있는
꺾인 연꽃 줄기,
꽃조차 숨은 뿌리인 땅속의 꽃, 

잎을 위해서
꽃 피우기도 전에 잘려진 꽃대들,
잎그늘 아래 시들어 가던
비명소리 이제껏 듣지 못하고 살았다 

툭, 툭, 목을 칠 때마다 흰 피가 흘러
담뱃잎은 그리도 쓰고 매운가(담배꽃을 본 것은, 부분) 

담뱃잎 줄기의 흰 즙까지를 생명으로 쓰다듬는 그의 사랑은 바삭하고 쓸쓸하다. 

<마른 물고기처럼>의 사랑처럼...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비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 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인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 얼음 속에서 잡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꺾이고 그 빛나던 눈도 비늘도 다 시들어버렸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은 말이 없다. (마른 물고기처럼, 전문) 

* 장자의 '대종사'에서 빌려옴. 
샘의 물이 다 마르면 고기들은 땅 위에 함께 남게 된다.
그들은 서로 습기를 공급하기 위해 침을 뱉어주고 거품을 내어 서로를 적셔 준다.
하지만 이것은 강이나 호수에 있을 때 서로를 잊어버리는 것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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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3 0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1-06-03 08:4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어디 가면 있는지는 시집에 없던 걸요. ^^
혹시 찾으면 알려 주세요.

양철나무꾼 2011-06-03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 나희덕은 읽을때는 쓸쓸하고 건조하지만,
읽은 후엔 따뜻한 온기가 스물스물 차올라요.

초승달을 볼때면, 누군가도 저 초승달을 같이 올려다 보겠구나
마른 물고기를 읽을때면, 함께여서 취허할 수 있겠구나...뭐, 그런 생각으로다가.

사라진 손바닥, 밑에서 둘째 줄 '흰 꽃'이죠.
샘이 그리 쓰시면 새로운 시어인줄 알고 그리 외워요~^^

글샘 2011-06-03 15:49   좋아요 0 | URL
그렇죠.
자기도 쓸쓸하고 건조한 마음을 쓰는 거지만,
그 건조함이 썩음은 아니라고 하고 있으니 말이죠.

힌꽃으로 외우세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