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의 일이다.
여름방학 과제로 독후감을 걷었다.
독후감을 읽는 것은 상당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래도 예전엔 아이들 글에서 사람의 냄새가 나고, "그래, 이 아이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하는 이해의 가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가 하도 급속도로 변하고, 아이들도 우리와는 다른 환경에서 자라나다 보니, 이제 독후감을 읽는다는 것이 괴로움을 넘어 무의미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아이들의 독후감을 읽으면서, 계속 "이 아이는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게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해의 가교]가 아닌 [오해의 출발]이 되는 셈이다.
더군다나 아이들의 솜씨를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는 상을 줄 아이인지, 아니면, <진실>을 밝혀 내어 상을 주어서는 안 되는 아이인지를 가리는 것도 참으로 난처하고 어려운 일이다.
우리 학교 학생들 중에서 "나는 우리 집 장녀로써…"한 남학생도 있었고, "나는 경기과학고등학교를 다니면서…"하는 학생도 있었다. 인터넷에서 주운 글을 읽지도 않고 인쇄해서 냈다는 말이다.

독후감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간추려 본다.
첫째로, 독후감은 줄거리 요약이 아니다. 줄거리 90%, 감상 10%인 글은 독서 '감상'문이 아닌 독서 '줄거리'문이 되는 셈이다.
예를 들면, 하근찬의 '수난 이대'를 읽었다면, 줄거리는 '이 소설은 일제 강점기와 6·25라는 민족의 수난사를 부자 2대에 걸쳐 그린(형상화한) 소설' 정도면 충분하다.
둘째, 소설의 3요소(주제, 구성, 문체)와 소설 구성의 3요소(인물, 사건, 배경)을 찾는 과정을 적으면 훌륭한 독후감이 된다.
작가의 중심 생각(주제)을 따라 여행하고, 작가의 말투(문체)에서 풍기는 맛을 즐기며, 소설의 여러 요소들이 얽어져 이뤄내는 갈등의 수풀(구성)을 헤치다보면, 어떤 시대의 특정한 사회상 속에서(배경) 주인공과 대립되는 인물들(인물)이 겪는 다양한 인생 경험(사건)도 간접 체험하게 되는 상상 속의 여행이 곧 독서요, 그 상상 여행의 기록이 독서감상문이 된다.
셋째, 독후감은 책의 행간(行間)을 읽어내는 활동이다.
작가의 드러나지 않은 서술 의도를 찾으며 읽는 것은 즐거운 지혜를 만나러 가는 길이기도 하다. 보통 우리보다 인생의 선배인 작가가 얼핏얼핏 보여주는 메시지는 우리를 '생각하는 갈대'로 만들어 준다. 주마등(走馬燈)같이 스쳐 지나는 삶에서 인생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독서의 즐거움은 적극적인 읽어내기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감상문(感想文)이란 이 선배들의 화제를 사고하는 과정을 기록한 글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 특히 문학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지나간 시간의 역사를 살아온 선배들과 나누는 한담(閑談)이고 대화(對話)이며 토론(討論)이다.

그런데 우리 학생들의 독후감을 읽다보면, 두드러진 특징이 보인다.
남학생과 여학생의 독후감의 차이는 남성과 여성의 성향 차이에서 오는 듯한데, 남학생들이 문제 해결형인데 비해 여학생들은 정서 공감형인 경향이 짙다.
남학생들의 독후감이 시대 속에서 옳거나 그른 인물들의 판단에 중점이 있다면, 여학생들의 글에서는 작중 인물에 대한 공감적 정서나 반감을 드러내는 일이 흔하다. 그래서 남학생들의 글이 딱딱하고 무미건조하기 쉬운 반면, 여학생들의 글은 말랑말랑하고 섬세한 감정이 잘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남학생과 여학생의 독후감을 섞어 읽다보면 공통점도 있는데, 바로 '자기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독후감은 자기 감상이 주가 되어야 하는 글이므로, 작중 인물과 사건 전개에 대한 정서의 공감과 문제의 해결이 [내 생각]이란 내용에 녹아 전개되어야 한다.

또 독후감은 좋은 논술문을 쓰기 위한 기초가 되기도 한다.
논술이란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과정을 적어가는 것이다.
그러자면 어디에선가 생각의 꼬투리(실마리)를 찾아내야 하는데, 독후감은 생각의 시작점을 찾아 풀어낼 수 있는 좋은 논술의 기초자료임을 잊지 말고,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유명 대학의 논술 문제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의 글을 읽고, 거기 대한 자기 생각을 논술하라는 식으로 - 이를테면, 짧은 글을 읽은 독후감을 쓰라는 형식인 경우가 많음을 상기해 봄직하지 않은가.
앞으로 입시에서 중요한 관건이 될 구술·심층면접에서도 전공 분야와 관련된 학생의 독서 경험에 대한 평가는 반드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긴 방학을 이용하여 나의 진로와 관련된 책 한 권쯤 읽을 계획을 세우고, 미리 머리 속에서 스스로 면접을 보도록 준비시키는 방법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친구와 얘기를 나누거나 나보다 좀 독서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과 독서 토론을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고.

아이들의 독후감 쓰기에 더욱 적극적인 개입과 지도가 필요할 때임을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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