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님,
장엄스레 내리셨다. 

빗방울이
창틀에,
유리창에
톡,
톡,
부딪는 소리는 참 아름답다. 

솨~아~~~
샤워처럼 들리는
천지를 뒤덮는 빗줄기는
답답한 마음을 조금은 시원하게 만들어 주곤 한다. 

오늘은 '가을의 시'를 주로 쓰는,
김현승의 시로 시작해 보자.
우선 <가을>을 한번 읽어 보렴.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寶石)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김현승, 가을>

가을의 기도에서는 '가을이 되면 호올로 사색적인 기도'를 드리겠다고 했는데,
이 시 <가을>에선 어떤 이야기가 기억에 남니?
아빠는 마지막 연의 <고요한 밤에 고르는 언어의 뼈마디>가 인상적이었어. 

그리고 1연에서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었고,
2연에서 <가을>은 '머나면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고 했지. 

이렇게 봄과 가을을 대조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이 시의 특징이야.
봄은 인생에서 청춘이라면, 가을은 좀 시들해가는 결실의 중년이겠지. 

청춘이란 건,
봄이란 건, 말이야.
숨가쁜 호흡처럼,
조금은 달뜬 호흡으로,
뭔가에 대한 기대로 가득하고,
아직 이뤄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슴 뛰는,
이런 거라면 말이지. 

가을, 곧 중년이란 건,
왠지 조금은 쓸쓸하고 서럽게,
외롭고 시들하게,
저 푸른 하늘 멀리서,
찬물결처럼 한 순간에 밀려오는,
왠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그런 느낌이 드는구나. 

3연에선 <봄>은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계절이었는데,
<가을>은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드'는 계절이래. 

청춘은,
심장의 박동 소리가 빨리지는 기대감으로 가득차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
꽃과같이 건강하고 싱그러운 모습으로 가득찬 시기란다.
그래서 버스를 타더라도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쏠려
자기 이야기를 하곤 한대.
건강한 청춘은 꽃잎처럼 아름다운 살결이
그 특징이겠지?
싱그럽고 매끈한 살결이 보드레한 느낌으로 가득한 것이 청춘의 특권이란다. 

반면, 가을은
싱그러운 살결의 희망보다는,
저 멀리 비추이는 별을 바라보면서,
골똘한 생각으로 가득차는 시기를 맞게 된단다. 
그래서 마음 속에 하나의 보석을 깎아 만들듯,
그렇게 정신적인 성숙을 기하는
원숙의 계절이겠지. 

4연에서 봄의 특징은 '눈동자 먼' 것이고, 가을의 특징은 '다문 입술'이래. 
청춘은,
사랑에 빠지면 눈멀어 버리고,
불의를 보게 되면 물불 가리지 않고 싸우곤 하지.
가을은,
자신의 삶의 중심을 잡는 중년의 나이엔,
입을 다물고 마음 속에 하나의 보석을 가꾸는 시기란다.
사랑에 눈멀기엔 많이 원숙해 졌고,
삶 속의 불의도 한순간에 바꿀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되는 나이겠지.  

마지막 연은 조금 까다로워 보인다.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던 시기라면,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르'는 때라는구나.
화자가 '고르던' 시기라고,
과거 회상 선어말 어미 '-더-'를 넣은 걸로 봐서, 지금은 <가을>임을 드러내고 있어.  

이 부분은 시인 자신의 시작(詩作) 태도를 돌아본 것 같아.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른다'는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국어로 시를 쓰기 시작하는 사람의 자세지.
어떤 시어를 쓰는 게 더 좋을까?
이런 단어가 좋을까, 저런 구성이 좋을까,
이런 단계의 시인이 <봄>의 시인이었다면,
이제 원숙한 경지에 다다른 <가을>의 시인은,
이적지 써온 노래들을 뒤적거리면서,
<내 언어의 뼈마디>를 추려내는 사람이란다.
'언어 가운데서'의 '언어'는 누구나 다 쓰는 말이지만,
<내 언어의 뼈마디>는 자신만의 사고 과정을 드러내는
철학적인 의미가 담긴 언어가 되겠지. 

이렇게 이 시는 <봄>과 <가을>의 시인을 상정하고,
두 시기에 자신은 어떤 시를 적어 왔던가를 돌아보고 있어.
이렇게 쓰자니,
아빠가 이 글을 쓰는 것도,
어쩌면 <가을>의 작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어떻게 가르쳐 왔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니 말이야. 

시인은 <봄>에 공간적으로 가까운 곳에 관심을 가지고,
땅에 속하는 숨결, 꽃잎, 살 등의 심상을 써 왔대.
그런데 <가을>에는 공간적으로 먼 하늘, 별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먼 곳에 속하는 철학적 <토대>를 형상화하려고 한다는 이야길 하고 있단다. 

이 시를 단순하게 <가을이 주는 그윽한 느낌>으로 읽어도 좋겠지만,
아빠처럼 <인생의 본질>에 대한 의미를 담아서 대조적으로 읽어도 괜찮겠다. 

다음엔 인생이란 어떤 것일지
화려한 것만 인생인지,
하루하루 뚜벅뚜벅 걷는 것도 괜찮은 인생인지,
생각해보는 시를 한 편 읽어 보자. 

드문 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 둘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놓고
가이 없이 한없이 펄렁 펄렁.
하나님, 보시기 마땅합니까? <김혜순, 납작납작 ―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이 시의 화자는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고 시를 시작한다.
뭘 걸어 놓고 바라볼까?  
제목으로 봐서, 화가 박수근의 그림이라도 걸어놓고 보는 모양인데,
<드문 드문 세상을 끊어 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고 본단다. 

자신의 삶을,
세상 살이를 드문 드문 - 아주 꼼꼼하고 세밀하지는 않게 - 대충대충... 
시일이 촉박하게 깝치는 것이 아니라,
며칠 내버려 뒀다가... 바라본대. 

그러면 그림속에서 사람들이 살아나지.
그 그림속 인물들은
어쩌면 화자의 생활 속 인물들인지도 몰라. 

흰 하늘,
쭈그린 아낙네 둘.
박수근 화백이 납작납작 물감을 눌러 붙이듯 그렸듯이,
거기 존재하는 인물들은
푸른 하늘을 향한 꿈과도 거리가 있어 보이고,
쭈그리고 앉아 높이 도약하는 삶과도 거리가 있어 보인다. 

벽위에 납작하게 뻗어있는 물감들 속의 아낙네들.
그들의 삶 역시 푸르르고 솟구치는 삶은 아니었을 거야.
오히려 납작납작 엎드린 볼품없는 삶이었을 거다. 

화자는 가끔,
심심할 때
아내와 아이들도
한 며칠 벽에 붙여 놓는대.
상상이겠지.
자기 아내와 아이들 역시
꿈과 희망보다는
찌든 나날 속에서,
흰 하늘 아래서,
팍팍한 생활을
납작납작 엎드려 살아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다, 조심스럽게 물어.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아~
하나님은, 대답하실 수 있을까?
대답하시기 민망하지 않을까?
하나님,
도대체 이 인생들은 무슨 재미로 삽니까?
얼마나 초라합니까?
왜 세상을 멋지게 꾸며 주시지 않으십니까?
그래,
이렇게 초라하게 사는 사람들 보니, 어떻습니까? 

건방져 보이는 질문이지만,
화자는 조금 소심하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2연에서는 그림에 대한 묘사가 더 자세해.
발바닥도 없는 인물들이 서성서성 거리는 그림.
서성이는 것은 안정되지 못한 불안감을 드러내지.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삶에 자신감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니 무표정할 수밖에... 

슬그머니 웃다가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서민들의 고단한 삶. 

그리고 다시 물어.
하나님, 보시기 마땅합니까? 

이 납작해진 사람들이
이 볼품없는 사람들과 현실이
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는
끝 간데 모르도록 한없이 펄렁펄렁 날리게 창조하시곤, 

보시기에 마땅합니까?
역시 화자에게 돌아올 하나님의 대답은 긍정적이지 않겠지.   

이 시는 박수근의 <세 여인>을 보고 쓴 시라고 알려져 있어.
여인들은 소외된 서민들이지.
삶의 무게에 짓눌린 서민의 이미지.
과연 이들이 이런 부당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니 더 행복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의문을 강하게 제기하는 시라고 볼 수 있단다. 

이 시는
'힘겨운 세상살이에 대한 서글픔과 연민'을 박수근의 그림을 통해 드러내는 멋진 시란다.

설의법을 사용한 질문은,
시를 읽는 사람에게,
납작납작 사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는 골고루 돌아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다는 느낌이
<서성서성>, <납작납작>, <펄럭펄럭>을 통해
마구 달려와 닿는 느낌이 들지 않니?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가이 없이 한없이 펄렁펄렁'하는 구절이 입에서 맴돈단다. 

힘없이 세파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을
어쩌면 펄렁펄렁 하는 의태어를 사용해서
고단하지만 나부낄 수밖에 없는 모양으로 형상화한 것이 기막히지 않니?

 

박수근이란 화가는
생활에 충실한 시골 사람들의 꾸밈없는 모습,
빨래를 하거나 농악놀이를 하는 사람 등을 주로 그렸어. 
그는 사실주의적 화풍을 외면하고,
극도로 평면화시킨 화폭에서 단순한 형태를 절제미 가득하게 형상화하지.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서민의 건강함이 잘 드러나는 그림,
또는 서민의 고달픔이 잘 묻어나는 그림 등으로 평가되곤 한단다.


피곤한 삶의 반복이 우리의 하루하루임은 변함없단다.
그렇지만,
그 하루를 행복한 하루로 만드는지,
불행한 하루로 만드는지는,
그림을 그리는 우리의 몫도 조금 있지 않을까 싶다. 

비가 내리면,
우산을 쓰기 귀찮지만,
어린아이들은 빗방울 듣는 소릴 듣기 좋아하고,
장화 신고 물웅덩이에서 첨벙거리기 좋아하고,
우산을 돌리면,
우산살 타고 날리는 물방울 가는 곳을 바라보길 좋아하기도 하잖아.  

김현승의 <가을>에서 삶을 관조하는 냉철한 시인의 눈길을 느낄 수 있었다면,
김혜순의 <납작납작>에선 구체적인 삶의 모습 속에 따스한 시선을 던지는 시인의 온기도 느낄 수 있었어.
시란 건,
이렇게 때론 날카롭게 세상을 보게 하고,
때론 둥글둥글 세상을 감싸안아 보게 하는 요상한 안경이란다.
그러니 어찌 아니 읽을 수 있으랴~ 하고 읽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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