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햇살이 따갑다.
금세 여름이 될 듯 한 날씨더니,
밤이 되자 어디서 스멀스멀 안개가 가득 밀려와 시야를 가득 메운다. 

화단에 예쁜 봄꽃을 가득 사다 심었더니 세상이 다 환해 보이더구나.
그렇게 조그만 변화로도 칙칙하던 화단이 완전히 다른 세상처럼 바뀌는 걸 보면 신기해.
그리고 깨끗하게 단장된 화단에선 매일 떨어진 낙엽도 줍게 되고 그렇다. 

관심을 가지고 쓰다듬는 것과
아무런 관심도 없이 처박아 두는 것은 결과적으로 큰 차이를 보여줄 수도 있겠다. 
오늘은 딱딱한 시,
딱딱한 것들에 대한 시를 두 편 보자.
딱딱한 것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부드러운 시선을...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海溢)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졌던 것이다
모래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김기택, 멸치>

이 시는 좀 길어 보이지만,
멸치가 어떤 존재였는지, 지금 어떤 존재이며, 그 속에 어떤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는지를
화자의 생각이 옮겨감에 따라 보여주는 '서술어' 중심으로 읽어 보면 쉽게 뜻이 보이는 시야. 

'물결 - 무수한 갈래의 길' - 이었던 멸치.
그러나 인간은 그 멸치의 자연스런 삶을 바꿔버렸어. 

'떼어내 - 긿을 잃고 - 굳어졌던 - 접시에 담긴' - 멸치를 만들어 버렸지. 

그러나, 그 멸치는 지금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지만'
멸치를 상상하면 '바다 - 물결 -  파도 - 해일'을 부를 수도 있는 생명력을 느끼게 된다는 시야. 

딱딱한 것은 죽은 멸치, 반찬으로서의 멸치, 곧 <죽음의 이미지>를 불러온다.
그러나 '물결'은 부드럽지. <생명력>을 말하려는 것이겠지. 

멸치떼가 다녔던 바닷속의 길,
그 길은 멸치떼가 만들어가는 것이었지.
그렇게 멸치떼는 길을 만드는 창조적 생명력이었대.
그물에 걸리기 전까지는...

그물은 생명에 반하는, 자연에 반하는 인간의 문명이겠지.
부드러운 물결과 멸치의 길의 물결치는 곡선에 반대된,
꼿꼿한 직선들의 햇빛은 멸치에게서 생명성을, 수분의 부드러움을 탈취해 간단다.
물기의 생명력을 모두 빼앗긴 멸치는
마치 <모래더미>처럼 무기력하게 쌓여있게 되지.

현실 속의 멸치는 이렇게 무기력한 존재지만,
화자는 멸치의 본래적 생명력을 상상하는 힘을 발휘한단다.
굳어져버린 멸치의 뒤틀림 속에 생명력이 약동하는 바닷물의 선율을 추가하는 것이지. 

문명으로 뒤틀려가는 자연의 부드러움을
회복하려는 화자의 상상력이 멸치를 바다로 되돌려 보내는구나. 

교실에서 늦은 시각까지 문제들과 싸우는 전사같은 학생들을 매일 보는 아빠도
그런 생각을 한단다.
원래 들판에서 자라던 이 아이들은
말타기도 하고 뜀뛰기도 잘 하던 아이들이었을 터인데,
교실에서 늘 형광등 불빛에 얼굴이 파리해져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문명은 그렇게 자연 속의 인간도
비정하게 만드는 건지 몰라.
또한 인간의 탐욕은 그런 구조 속으로 자연스럽게 말라비틀어져 가기를 바라게 될지도 모르고 말이지.  

아빠는 민우가 공부로 꼭 선두에 서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단다.
열심히 살기는 바라지만,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어울리고 장난도 치고 그렇게 사는 평범한 사람이 되길 바란단다.

바퀴벌레에 대한 시도 배웠을 거야. 한번 읽어 보렴.
같은 시인의 시니깐 말이야.  


 믿을 수 없다. 저것들도 먼지와 수분으로 된 사람 같은 생물이란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시멘트과 살충제 속에서만 살면서도 저렇게 비대해질 수 있단 말인가. 살덩이를 녹이는 살충제를 어떻게 가는 혈관으로 흘러보내며 딱딱하고 거친 시멘트를 똥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입을 벌릴 수밖에 없다. 쇳덩이의 근육에서나 보이는 저 고감도의 민첩성과 기동력 앞에서는.

 사람들이 최초로 시멘트를 만들어 집을 짓고 살기 전, 많은 벌레들을 씨까지 일시에 죽이는 독약을 만들어 뿌리기 전, 저것들은 어디에 살고 있었을까. 흙과 나무, 내와 강, 그 어디에 숨어서 흙이 시멘트가 되고 다시 집이 되기를, 물이 살충제가 되고 다시 먹이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빙하기, 그 세월의 두꺼운 얼음 속 어디 수만 년 썩지 않을 금속의 씨를 감추어 가지고 있었을까.

 로봇처럼, 정말로 철판을 온몸에 두른 벌레들이 나올지 몰라, 금속과 금속 사이를 뚫고 들어가 살면서 철판을 왕성하게 소화시키고 수억 톤의 중금속 폐기물을 배설하면서 불쑥불쑥 자라는 잘 진화된 신형 바퀴벌레가 나올지 몰라. 보이지 않는 빙하기, 그 두껍고 차가운 강철의 살결 속에 씨를 감추어 둔 채 때가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아직은 암회색 스모그가 그래도 맑고 희고, 폐수가 너무 깨끗한 까닭에 숨을 쉴 수가 없어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뜬 채 잠들어 있는지 몰라.  <김기택, 바퀴벌레는 진화 중> 

이 시의 바퀴벌레는 '변화하는 환경에 재빨리 적응하여 생존하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존재'다.
인류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살아왔던 바퀴벌레.
아직도 온갖 살충제를 뿌린다고 해도 멸종되지 않는 바퀴벌레.
어쩌면 인류보다 훨씬 더 오래오래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훨씬 농후한 바퀴벌레에 대한 놀라움으로 시작한다. 

 

살충제와 거친 시멘트 같은 <자연 파괴>에 인간은 휘청거리지만,
바퀴벌레는 까딱도 않아 보이지. 

바퀴벌레의 표면은 금속성의 철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퀴벌레는 아무리 오염된 미래 사회에도 잘 적응할 것 같다는 비판적 시선이 이 시의 기본 기조지.  

인간에겐 치명적인 암회색 스모그, 폐수들이 아직도 바퀴벌레를 멸종시키기엔
너무 깨끗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반어를 쓰면서,
인류가 만들어낸 문화에 대한 비판적 어조를 드러내는 것이란다.

현대 문명이 초래한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기 위해,
화자는 어디에나 보이는 바퀴벌레를 소재로 삼았단다. 

인간은 지구에서 가장 오염된 종류의 벌레인지도 몰라.
인류가 문화란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는 온갖 사물들은,
지구에게서 빼앗은 것들인데,
그 수량은 한정적이고,
인간의 문화는 한 순간에 뻥~~하고 터질 수 있는 무기도 만들고 있으니 말이지. 

환경에 대한 관심은 아무리 지나쳐도 넘치지 않을 정도라고 볼 수 있단다.
어쩌면 미래 산업의 대부분은 환경에 관련된 것일지도 몰라.
병주고 약주고... 이런게 어리석은 인간의 삶이니 말이지. 

이제 미끈하면 지나가 버릴 5월이 앞에 섰구나.
모레는 휴일이고, 여러 가지 행사로 바쁘겠지만,
나름대로 시간계획 잘 세워서 보람찬 날들을 챙기기 바란다. 

교실은 멸치처럼 너희를 옥죄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너희들은 나름대로 멸치가 되지 않는 방법을 터득해가는 사람들이기도 하니 재미있는 고3을 만들어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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