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성 문학과지성 시인선 365
신해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혜린이란 만화가가 있다.
북해의 별, 테르미도르, 비천무 등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의 만화 속 주인공들은 섬세하고 길쭘한 손가락을 가지고 있고,
우수에 젖어 있으면서도 무지 고귀한 눈빛과,
노천명이 노래한 고귀한 족속이었던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이 가득 등장한다.
뭐, 터프한 대목에서도 우아한 선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그의 만화의 특징이다.  

신해욱의 이름만 보고 남자인 줄 알았다.
표지에 캐리커쳐가 그려져 있지만,
스쳐지나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첫 시부터 섬세한 여성의 선이 오롯이 떠올라서 인물을 확인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아니, 시집을 여는 작가의 말부터 천상 여성스런 선이다.  

내가 그의 '말'을 들으면서, '글'을 읽으면서,
머릿속에서 김혜린의 선을 떠올린 것은,
그의 언어들의 가벼움과 우아함, 가득 차있지 않으면서도 가득찬 것처럼 느껴지는 질감과 양감에 기인한 것이다. 

날짜와 요일을 배당받지 못한 날에
생일을 조금 빌려
일기를 쓰게 된 기분입니다.
산소가 많이 부족한데
저는 공들여 숨을 쉬기나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시인의 말 중에서) 

공들여 숨을 쉬면서
일기를 쓰듯 시를 쓰는 사람.

1. 한 번에 한 사람이 된다는 건 충분히 좋은 일 

매일 다른 눈을 뜬다. 

아침은 어김없이 오고 

뜨고 싶은 눈을 뜬 날엔
은총이 가득하다. 

그렇지만 뜨고 싶지 않은 눈을 뜬 날에도
키스를 받고 싶다. (눈 이야기 중 부분)

숨 쉬는 일에 이렇게 공들이기도 힘든 노릇 아닐까? 

그의 시 '방명록'에는 많은 자신이 등장한다. 

옆집의 주소로/ 하얀 가발과/ 제2의 얼굴이 왔다.// 
나와 똑같은 인간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온/ 초대였다...
그렇다면/ 세수를 해야한다.//
세수를 한 얼굴로서/ 나는 옆집을 찾는다.//
다으엔 문지방을 밟은 채로/ 제2의 얼굴에/ 하얀 가발을 쓰고/ 난색을 표한다.//
"사실 나는 다른 사람이야."
바로 뒤에서/ 얼굴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우리 집에 가자.// 우리 집에는// 이름이 아주 많아.(방명록, 전문) 

어려서부터 혼자 놀기의 달인이었을 법한 인물이다.
체육 시간을 싫어하고, 숨쉬는 일조차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 달인.
자신을 찾아온 또 다른 자아에게 방명록을 내미는 일이 없었다면,
시인은 숨막혀 이 세상에서 녹아버렸을지도 모른다. 

등을 맞고/ 고개를 돌렸다.//
그게 아니라/ 다른 일이 일어날 거야. 틀림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나는 인간과 같은 감정을 몇 개씩/ 달그락거려본다.//
이럴 때 인간이라면 보통/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이상하다.//
이렇게 시간이 많은데/ 죽지 않은 지/ 참 오래된 것 같은데.//
나는 더 이상/ 키가 크지 않는데.(과거의 느낌, 전문) 

화자는 자신의 시간 속에서 금세라도 증발해버릴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삶을 산다.
살아있음의 지속도 그에겐 '죽지 않은 지 오래된' 것처럼 느껴진다.
삶이 여려지고 여려져서 최소한의 '생물성'마저 휘발된 포르말린 냄새라도 날 것같은 모양새다. 

생물체인 자신이 여기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사회 속의 일원일 때, 비로소 시간은 의미가 있게 된다.
그러나, 생물성이 증발한 화자에게 시간이 가지는 무게는 탁구공보다 가벼울 것이다. 

월요일이 오고 있을 것이다.//
월요일과 화요일이 지나면/ 내 방에서는 사람 냄새가 나지 않고/ 나는 수요일이 아닌 채로/ 수요일을 대신하며/ 옷을 벗게 된다. //
키가 없는 몸으로서/ 문틈으로 내 방을 훔쳐보면/ 모서리, 면, 각/ 수요일과 내가 함께 없는 방은/ 사각의 본질로 충만하다.//
지금 이대로 내 방을 꼭 끌어안고/ 벽에다가 얼굴을 비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런 욕망에 사로잡혀/ 수요일이라 할 수 없는 나를 대신 끌어안고/ 수치를 견디는데/ 언제 끝날지 알 수없는 수를 세며/ 월요일 같은 것을 기다리는데//
그런데 누군가 나보다 먼저/ 내 방을 사랑하고 있다./ 키가 크고 있다./ 사소한 훼손도 없이/ 수요일과 중력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손님, 전문) 

방향성 없는 시간은 요일을 잃고 흐느적거리며 부유하는데,
화자는 존재를 느끼고 싶어한다. 

천사에게
몸을 꾸었다.

부족하지 않을 만큼 나에게도 있었는데
시간과의 비례가
나는 아주 좋지 않은 경우였다고 한다.

천사의 몸으로서
앞으로 나는 빚에 시달리게 된다.
 
날개로 간신히 숨을 쉬며
무거운 어깨가 영영
어쩔 수 없어져 가게 된다.
 
천사는 거의 뒷모습으로 웃으며
눈보다 하얀 생각에
파묻혀야 한다고 했다.
 
천사의 몸은 언제나
돈보다 비싸고
시간보다도 길어서
갚을 길이 없다고 했다.

쓸모가 없어진 나의 표정을
결국 나는
몇 번 밖에 본 적이 없게 된다.
 
깨질 것처럼
단단하게 굳은 얼굴이던 순간

그러나 천사의 눈물이
나의 앞을 가로막게 된다.(빚, 전문) 

급기야 그는
몸을 꿈꾸는 천사가 된다.
자신의 현실은 '빚'이 된다. 

빚이 됨으로써 빛이 되는 그의 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역설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껴지게 만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