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 - 생태주의 작가 최성각의 독서잡설
최성각 지음 / 동녘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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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에 대해 성성하게 깨닫게 해주는 최성각의 독서잡설집...

옆자리 선생님이 표지가 인상적이라고 했다.
그렇다.
굵은 느티나무 허리참에 셔츠 풀어헤치고 슬리퍼 차림으로 기대 앉았고,
책을 펼쳐 머리말쯤 읽고 있고,
반백의 긴머리는 자연스레 늘어져있다.
배경으로는 푸르른 신록이 펼쳐진 계곡과 삽살개 한 마리 혀를 빼물고 그를 돌아본다. 

생태주의 작가 최성각의 독서잡설...이라고 그가 부제를 붙인 것처럼,
그의 이 책은 생태주의 독서의 이력을 총집대성한 것이다. 

그렇게 치면 생태주의 아닌 것이 없으렷다.
인간이 사는 데서부터 역사, 철학, 문학이 배출된 것이니 이것 역시 생태주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고,
인간을 못살게 구는 역사적 속박 역시도 환경을 해치는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1980년을 울던 시절부터 시작한다.
친구가 하나 그를 찾아온다.
그리고 그 친구와 잘 아는 신부님에게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돌아온다.
얼마 후, 친구의 부음을 듣는다.
아......
그 시대는 그랬다.
아니, 그랬나보다. 
그렇게 빗소리 하나에서도 슬픔의 한숨 소리 느끼지 않곤 살 수 없이 쓰라린 시대였나보다. 

그의 글을 읽노라면 문고판 이야기가 참 간절하다.
내가 대학 다니던 1980년대 중후반은 말하자면 인문사회학의 르네상스였는데,
학문은 아니고 번역이 마구 되기 시작했던 시기고,
해금이 되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죽었던 중세에세 재생의 이미지를 가진 르네상스처럼,
해방 공간의 자유로운 토론이 죽었던 독재시대를 가로질러 재생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던 것이다.
그러다 신자유주의 물결을 타면서,
책은 내용이 아니라 상품과 디자인으로 승부하는 사물이 되어버린 느낌이 강해 그의 푸념도 수긍이 간다.  

스테판 츠바이크의 <폭력에 대항하는 양심 - 카스텔리오와 칼빈>을 읽고 싶었다. 

   
 

자유를 가장 신성한 인간의 자산으로 여기지 않고,
당연한 관습으로 여길 때 그 자유를 유린하는 비밀스러운 의지가 고개를 쳐든다.(120)

 
   

불관용의 장소 제네바에서 벌어졌던 칼빈(칼뱅이 어울리는데)의 우스운 모습이 그 당시엔 공포였겠다. 

인도의 헌법에서 불가촉 천민이 없도록 카스트 차별을 없앤 암베드카르 박사도 공부할 만 하겠다.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는
부유한 빈곤 국가 한국을 바라보면 가져야 할 화두가 아닐 수 없다. 

1970년대 말, 베이징 대 캠퍼스에서의 일...
시골에서 입학한 한 새내기가 고향에서 지고 온 허름한 가방을 메고 다니다
마침 길을 가던 허름한 노인에게 가방을 맡기고 돌아다니다 한나절을 보냈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그 가방이 생각난 학생은 그자리에 갔는데,
땡볕에 그 노인네는 아직도 가방을 지키고 서 있었단다.
이튿날 입학식때 그 노인이 주석단 자리에 앉아있더라는데, 그가 베이칭 대학의 부총장 지셴린이었단다. 
그의 <인생>도 읽을 만 하겠다.

그 뒤에서  '고대 나왔으면 벤츠 정도는 타 줘야' 하는 미친 교수나,
김용철이 '하버드 나온 훌륭한 분들' 지껄이는 내용은 참 한국의 쌍스러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무명 철학자 전시륜의 <유쾌한 행복론>도 읽을 기회를 만나고 싶다.
남이 책읽은 이야기를 늘어 놓는 이야길 읽노라면,
한없이 시간을 가지고 책을 읽고 싶지만,
그걸 만나는 걸로도 만족하자. 

최성각의 <달려라 냇물아>를 읽었던 참이라,
남들이 읽은 책 이야기를 읽을 염을 내지 않고 한 1년을 미뤘는데,
하루 밤을 설쳐가며 읽은 책은 감명 깊다. 

대통령이란 자가 돈독이 올라 강을 파헤치자고 난리를 떤 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임기를 생각하는지, 엄청 몰아친다는데,
매일 공사장에서 인부들이 죽어 나간다.
새로운 것도 없으니 <뉴스>에도 안 나오는 모양이다.
하긴, 이 나라에서 학생이 죽고, 노동자가 죽고, 공사 현장에서 건설 노동자가 죽는 일이야,
새로운 것도 하나 없는, 일상이지 않은가. 

그건, 노무현 때도 김대중 때도 여전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경향신문도 두려워한다던 삼성.
그런 것이 세상의 흐름이란 듯, 도저하게 서있는 높직한 성채를 바라보노라면...
새삼 한국에 사는 일은 두렵다. 

그러나, 또 죽음이 일상이 되어버린 나라에서
사는 일에 또 두려움이 무에 있으랴 싶기도 하다.
다만 태어나고 자라는 아이들이 고통스러워함이 같이 아플 따름이다. 

우리에겐 바로잡을 시간만 있다. 

시간이 없다는 말보다 더 처절하다.
남은 시간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데 쓰라는 강한 명령이겠다.
내가 선 자리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데 남은 힘을 쓰는 일.  

큰 과제를 하나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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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대로는 大怒를 써야는데... 실수했다. 

52. 단재 신채효...? 호로 고쳐야 한다.

58. 피텔의 회고? 피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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