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문학 박물관에서 -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하는 인문학자 12인의 육성
진중권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5월
평점 :
바야흐로 '서바이벌'이 대세다.
슈스케에서 불붙은 서바이벌은 방송을 온통 서바이벌로 물들였다.
미국식 서바이벌 '팻 다운'을 재미있게 보던 중,
잘 생긴 요리사 한 명이 오더니 '예스 셰프'를 유행시켰고,
작금엔 '가요 서바이벌', 슈스케와 위대한 탄생이 세상을 흔들고,
이제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도 꽤나 자리를 잡았다.
이런 아마츄어의 세상 외에도, 프로 가수들조차 서바이벌에서 자유롭지 않다.
가수들의 자존심을 건 '나는 가수다'가 파행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예사롭지 않고,
가수들이 '오페라 스타'에 도전까지 한다.
이제 '예스 셰프 2'도 곧 나온다니, 과연 서바이벌의 종결자는 누가 될지 궁금하다.
요즘 '종결자'가 남발되고 있다.
종결자라면 '최고, 전문가' 정도의 용어인 모양인데,
아무 낱말에든 붙여 쓰는 데는 좀 짜증이 날 정도다.
이 단어가 사용하고 있는 뉘앙스는 아무래도 서바이벌의 최종 승리자의 그것과 유사하다.
무한도전이나 1박2일, 남자의 자격 등에서 추구하는 웃음을 위한 서바이벌이나,
우리말 겨루기, 골든벨, 퀴즈 대한민국 등 상식 프로그램에서 일반인의 서바이벌은
그 결말이 큰 파장을 부르지 않는 잔잔한 재미를 주기때문에 시대와 상관관계는 적어 보인다.
작금의 '서바이벌' '종결자' 전성시대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오로지 '경쟁'과 '승리'에만 가치를 두고,
'나눔'과 '인간'에는 관심을 접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표상으로서의 모습이 아닐까 내심 걱정이 되는 바 큰데,
사회 일각에서는 인문학의 위상을 연구하는 책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어 반갑게 읽는다.
그렇지만, 역시 연구는 사회의 흐름을 뒤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니,
서바이벌 인문학은 언제나 등장할는지...
인터넷 세대의 <다중> <다중 지성>이 얼마나 미약한지는 이 정권의 폭력앞에 금세 흩어져버린 것으로 증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 <다중>이 또한 얼마나 큰 힘을 가진 것인지는 내년에 있을 선거 결과를 보면 증명될 것으로 보인다.
심심찮게 <트위터> 덕에 자살을 막았다는 훈훈한 뉴스도 뜨지만,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이 이 다중 지성의 시대에,
인터넷을 통해 모인 알지도 못하는 청춘 남녀가 함께 펜션에서 연탄불을 피우고 죽어간다.
오로지 서바이벌의 종결자가 되지 못하는 자의 말로는 그렇다는 듯이 말이다.
임진왜란 이후 이 땅에 새로운 기운이 퍼졌을 것은 당연하다.
도망가는 임금을 욕하며 도성에 불을 지르고 왕자를 잡아 왜군에게 넘겼다는 이야기는 쇼킹하지만,
그런 전쟁이 끝나고 다시 이씨 조선은 300년을 더 유지된다.
물론 새로운 기운이 가득하게 번졌지만, 북벌론 등 탁상공론에 머무른 윤리도덕은 조선의 한계였다.
참으로 가혹한 역사가 이 땅에 펼쳐져 있다.
오래도록 지속된 <신분제>와 <군주제>의 상처가,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거치면서 심화되고 비비 꼬이고 뒤틀린 칡덩쿨과 등나무 줄기가 되어, 말 그대로 '갈,등'의 연속이었다.
이웃이 이웃을 죽이고, 동족이 동족을 죽인 역사.
역사는 뒤안길에 파묻힌 채로, 진실과 화해 위원회 역시 삽질 뒤로 파묻혀 버린 역사에,
오로지 <국가주의>로 일관한 개발독재의 구호에 세뇌되어 짓눌리기만 했던 사회에서 살아온 사람들.
비판은 곧 '간첩이고 이적행위고 빨갱이'라고 낙인찍던 가까운 과거의 기억에 치를 떨면서도,
제 자식은 돈 벌어서 양반처럼 행세하며 살게 하기만을 오로지 바라던 사람들.
그들이 쌓아올린 담장들은 이 나라를 <아파트>라는 양식의 종결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농촌 사회의 가부장은 폐기되어 버리고,
아파트 단절된 공간 내의 경제적 주권은 여성이 틀어쥐게 되면서, 시댁과의 관계도 함께 단절되어 간다.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와는 거리감이 생기고,
삼촌 고모와도 명절때나 만나는 가족이 되어버리고,
외가와 이모 외삼촌과는 가까운 친척이 되어 새로운 가족제도가 터를 잡는다.
폐기된 가부장은 소외되어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 없는데,
직장의 회식이란 명목으로 이어지는 술자리는 2차, 3차를 달리는 문화로 이어지고,
성매매와 외도의 오묘한 접점은 곧 가정 파괴와 불륜을 숱하게 뿌려 놓는다.
이 책은 파괴되어 가는 한국 사회의 모습에 초점을 맞춰 그 원인을 진단하기도 하고,
한국의 학문이 도대체 어쩌다 이지경이 되었는지에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열두 명의 전문가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깊지 않지만 넓고, 다양한 관심사는 해결책은 없지만 충분히 문제를 제기한다.
한국에 찾아온 <손님>으로서의 기독교와 공산주의,
손님이 그뿐인가. 제국주의와 일본, 러시아, 중국과 미국, 세계최초의 다국적군, 그리고 이주 노동자까지...
이 땅을 단일 민족이라고 떠벌이던 교과서는 이미 예전에 폐기되었지만,
아직도 손님에게 넉넉한 밥상을 차려 내기는 커녕,
손님들의 신상 파악도 제대로 안 된 채로, 엉망 진창인 밥상을 내가고 뒤엎는 판국인 셈이다.
2차대전 이후 신생국가가 한 200개 생겼는데, 제국주의 협력자가 권력을 잡은 나라가 딱 둘이란다.
남베트남과 남한. 한심한 출신이다. 휴=3=3
남베트남에선 미국이 패전했다.
남한의 분단이 제국주의 협력자를 살린 셈이다.
치욕스런 역사는 거기서 시작된다.
늘,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불후의 고전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원래 음계는 여럿 존재하는데, 지금은 서양의 조성음계가 지배하는 사회로 바뀌었다.(182)
그래서 여기 적응하지 못하면 음치, 마녀, 정신병자, 미친놈으로 놀림받고 감옥에 가거나 사형에 처해진다.
하나의 제도를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 사고방식을 거부하는 데서 새로운 문화가 시작된다.
그러나, 한국의 '토론'은 역시 텔레비전이 가로막고 있다.
한국의 문제를 외국인 유명 학자에게 물었더니,
"한국의 문제는 한국인 여러분이 스스로 고민해야지 왜 저에게 물어봅니까?"
했다는 상황이 한국의 인문학의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253)
늘 남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 초점이 잘 맞지 않는 안경을 끼고 바라보려 애쓰는,
찡그릴수록 일그러지는 세상의 모습을 바라보려는 한국식 대학의 모습.
그 대학에 가려고, 보내려고 또 사다리를 놓으려 하고,
올라간 것들은 사다리를 걷어차려고 하는 이전투구의 세상의 반영이 바로 <서바이벌>과 <종결자>란 양식이 아닌가 싶어,
인문학을 읽으면서도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역시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어서 그런 것이다.
아니, 아이들이 힘들게 공부하는 걸 도와준단 명목으로 아이들을 억업한다는 생각에 부끄러워 더 그런 생각의 굴레에서 뒹구는 모양이다.
----------
229. 유래없는 참극... 유례가 맞다.
273. 인문학적 성찰을 배재하고... 배제하고...
312. 청중-지금은 경제적인 가치에 너무 치우쳐 있어 인문적 가치가 중시되고 있는 추세인데요... 경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