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싹 - 오늘의 한국 인문학을 있게 한 인문고전 12선
김기승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서울 중앙고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인문학 박물관을 만들었단다.
인문학 박물관... 한편 씁쓸하다.
박물관이라면, 사라져가는 것들을 모아놓는 곳이 아니던가 말이다. 

그렇지만, 거기서 싹을 피워 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그곳이 박물관이든 시궁창이든 이름은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알맹이요 싹에서 피어나는 결실일 터이니 말이다. 

이 책에서는 주로 해방 공간에서 피어나지도 못하고 져버려야 했던 슬픈 인문학의 싹에 대한 회고담을 주로 다룬다. 

왜 이토록 한국의 인문학적 토양은 척박한가를 따져가노라면,
또 한국에서 진정 인문학적 연구를 치열하게 논의했던 시대와 사람들을 살펴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해방공간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해방 공간의 논의는 상당히 정치적인 관점과 맞물릴 수밖에 없기때문에 충분한 논의가 못될 수도 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깜놀하게 되는 것은,
그 치열한 정치공방의 와중에서도 민중을 위한, 미래를 위한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학문적 논의의 틀을 모색한 사람들이 참 많았다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한국 인문학의 싹들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게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토양은 결국 분단의 역사에서 이북으로 쏠리는 지식인들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많은 학자들은 남한에서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서야 해금의 기회를 맞는다.
그러는 동안 남한의 인문학은 어쩔 수 없이 동화 속에 등장하는 '반쪽이' 같은 형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빨갱이로 몰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시오.
빨갱이로 찍히지 않은 범위 내에서 인문학적 서적을 읽으시오.
빨갱이들이 다루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문학적 대화를 전개하시오.
빨갱이들의 침방울이 한 점도 튀지 않은 방향으로만 인문학적 연구를 계속하시오... 

이런 반쪽이가 두 팔, 두 다리, 두 눈을 제대로 가지게 될 일은 요원하기만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한국적 인문학의 토양의 밑거름이 되었어야 할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감격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를 비롯한 지리학의 자주성.
안확의 조선문명사, 이만규의 조선교육사 등이 단절된 연구였던 아쉬움.
박열, 신남철, 김동석, 백남운 등의 시대적 풍운.
배성룡의 농민 독본, 김태오의 미학개론, 홍기문의 조선신화 연구, 이여성 등의 숫자조선연구 등에서 보여주는 다채로움.
이종하의 우리 민중의 노동사까지...
전문적으로 그런 책들을 읽기 어려운 독자(청중)을 위하여 맛뵈기라 보여준 그 강의들은 한국에서 열릴 뻔했던 인문학 연구의 르네상스가 분단, 전쟁, 반목의 과정에서 쑥대밭이 되었던 역사의 쓰라림을 되살려주는 아픔을 넘어,
미래의 인문학에서 반드시 계승하여야 할 전통이 있다면 이 싹이 자라고 결실을 맺을 때 쯤에야 이 연구의 가치가,
그리고 인문학 박물관의 존재 이유가 확인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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