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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가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위정훈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제1권력>을 읽으면서 자본에 대한 인간의 욕망에 치를 떤 적이 있다.
히로세 다카시가 여행을 하면서 아이들의 순수함에 매료되다가,
이스라엘에서 핍박받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동정을 느끼지만,
또한 서빙하는 이스라엘 여성의 팔뚝에 아직도 남은 홀로코스트의 넘버링을 볼 때,
도대체 왜 인간은 그 끔찍한 전쟁을 하는지... 깊은 생각에 잠긴다.
쇼펜하우어의 문장론에서 역설한 것처럼,
작가는 자신의 생각의 체계를 글로 써야한다.
히로세 다카시는 남들의 주장을 인용하기보다는 자신의 사고의 흐름을 흥미롭게 기술하는 재주를 가졌다.
그가 왜 전쟁론에 관심을 가졌는가로 시작한 이 책은,
어떡하다 그가 클라우제비츠란 전쟁이론가에게 생각이 미쳤는지,
(이 책의 일본어 원제목은 '클라우제 비츠의 암호문'이다.)
그러다 세계의 분쟁 지도를 1945년부터 1991년까지 작성하게 되었는지,
그 와중에 불거진 미국 CIA와 소련 KGB의 '학교'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문체로 쓰여 있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서 인상적인 몇 꼭지를 반복 인용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결국 그의 <풀이>는 <인간의 의지>다.
인간의 의지가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과 무기의 위기를 몰각시킬수 있는 유일한 기제 역시 존재하였는데,
그 암호문을 푼 그는 역시 <인간의 의지>만이 전쟁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서로를 얼싸안을 수 있게 만들어 줌을 찾아낸다.
원폭으로 인류의 멸종 위기에 봉착한 미래를 상상하는 그에게,
우연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몇몇 남자들만이 '자네들 가운데 누군가가 갈비뼈를 뽑아서 이브를 만들지 않는 이상, 우리 세대로 끝인 거야.' 이런 농담을 씁쓸하게 주고받는 장면이 떠오르는데,
'The Road' 같은 소설보다 훨씬 판타지 소설에 재능이 있는 작가처럼 보인다.
글 한 줄에서 소름이 오싹 끼친다.
미국이나 소련이나 정보 기관의 끔찍한 행위는 참으로 치가 떨리는데,
특히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사용한 온갖 생화학 무기(관동군 731 부대에서 배운 것)를 사용한 것이나 월남전에서 사용한 고엽제 같은 것들은 어찌 인간으로서 그런 범죄를 저지를 생각이나마 할 수 있는지,
회의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소련 역시 나을 것 하나 없다.
스파이 교육 학교에서 배신과 고문의 단계까지 학습시키는 장면은 역시 인간은 말종임을 확신시킬 뿐이다.
아프리카에 천만 이상의 굶주리는 인류가 있는데,
거기로 흘러들어가는 것은 오로지 무기뿐이라는 지점까지 읽노라면,
한숨과 눈물이 앞을 가린다.
오늘 아침 배꽃 나무에 물기 가득 머금은 꽃송이를 보고 눈물이 날 뻔 했다.
그렇게 한 세계는 힘겹게 피어나는 것인데,
폭탄 세례 한 번에 '적'은 수백 명씩 죽어나가는 판이다.
이것이 인류라는 말종의 역사의 기록이다.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의 민중들처럼 우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폴레옹, 클라우제비치, 닉슨, 레이건, 부시에 이르는 전쟁광들과 다르다.
바보 이반들에게는 <적>이 없는 것이다.
적이 있는 곳에 죄악이 있고, 죽음이 있다.
아, 인간의 원죄가 왜 <선악과>를 따먹고 부끄러운 줄 아는 것에서 시작되었는지 이제 조금 느낀다.
부처가 깨우친 것처럼, '나'가 있고, '남'이 있고, '오래 살고 싶은 욕심'이 있고, '나보다 못한 넘'이 있는 것처럼 <구별>하는 데서, 적이 생기고, 죄가 생겼던 것이었나보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원죄를 모두 대속하셨다는데,
왜 아직도 그 예수를 간절히 믿는다는 종자들은 그렇게도 전쟁중인지...
언제나, 진정 아멘, 소리가 울려퍼질 것인지...
이 책은 깊은 시름 속에서 바보 이반들의 신음 소리를 듣고 또 보고 있는
히로세 다카시의 <관세음>의 아픈 관찰의 기록이다.
----1949 지도에서
김구암살(1949. 6. 26) - 25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전쟁 지도에서 '한국 내란'으로 인한 기록들이 가득한 것을 보고 참 슬픈 지역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과,
그래도 수시로 폭발이 일어나는 곳이 아니란 정도만으로도 위안을 얻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