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초가 지나가는데도 아빠는 몹시 정신이 없이 산다.
지난 주에 수련회를 다녀오고 나니 더 바쁜 것 같아.
리듬을 잃어서 그런지, 아니면 진짜 바쁜 건지...
바쁘다는 핑계 속에서 하루하루가 가고,
집에 오면 픽 쓰러져 자고 그랬구나. 

아들도 피곤하긴 마찬가지겠지만,
아빠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힘을 덜어주는 활력소가 되면 좋겠다. 

요즘엔 수업 시간에 '정체성' 이야기를 하게 돼.
윤동주의 시 비평문을 가르치는데, 정체성이란 말이 나오거든.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알려고 노력하면서 평생을 보내는 존재인 거 같아.
그렇지만, 그 정체, 자신의 본모습을 알긴 참 어렵지. 

오죽하면 소크라테스가 '네 자신의 본모습을 알라. 너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존재 아니냐?" 이러고 물었을까.
자기 점수를 보면 20점 같고, 옆사람 점수를 보면 100점 같아 보여.
내 재산을 보면 100원 같은데 옆사람 재산은 수십 억원 같아 보여.
그렇지만, 아빠는 이런 비유를 쓴단다.
20점과 100원을 가진 사람의 가치는,        1,000,000,000,000,000,000,000,000,000,120이고,
100점과 수십 억원을 가진 사람의 가치는, 1,000,000,000,000,000,000,000,100,000,100인 거라고. 
아랫 사람이 과연 훨씬 더 가치있는 사람일까?
과연 인간의 정체성을 <분별>할 수 있을까?
그 낫고 모자람을? 

성경에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부끄럼을 알고 스스로의 몸을 가렸다고 그래.
과연 '선악과'를 먹은 것이 왜 잘못됐을까?
하느님의 명령을 어겨서?
'선악'을 구별하게 된 것이 무슨 잘못이지?
그것은 바로 '인간의 분별이나 구별은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일 거야. 

인간의 불완전하고 미흡한 구별. 차별. 그런 시를 한 편 읽어 볼게.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발 아래 구부리고 엎드린 작고 큰 산들이며
떨어져 나갈까 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언덕과 골짜기에 바짝 달라붙은 마을이며
다만 무릎께까지라도 다가오고 싶어
안달이 나서 몸살을 하는 바다를 내려다보니
온통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고
또 세상살이 속속들이 다 알 것도 같다.
그러다 속초에 내려와 하룻밤을 묵으며
중앙 시장 바닥에서 다 늙은 함경도 아주머니들과
노령노래 안주해서 소주도 마시고
피난민 신세타령도 듣고
다음 날엔 원통으로 와서 뒷골목엘 들어가
지린내 땀내도 맡고 악다구니도 듣고
싸구려 하숙에서 마늘장수와 실랑이도 하고
젊은 군인부부 사랑싸움질 소리에 잠도 설치고 보니
세상은 아무래도 산 위에서 보는 것과 같지만은 않다.
지금 우리는 혹시 세상을
너무 멀리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너무 가까이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경림, 장자를 빌려 - 원통에서> 
**노령노래 : 러시아 노래, 생활을 위해 러시아 영토로 떠나가는 참담한 실정을 노래한 함경도 민요. 조선 말기 함경도 남자들은 생활이 어려워 흔히 러시아 지방으로 품팔이를 나갔는데, 이 민요에는 그러한 절박한 상황, 즉 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가족과 헤어져 떠나야만 하는 애달픔, 남편을 보낼 수밖에 없는 여인들의 슬픔, 조국에서 살 수 없어 국외로 가야 하는 현실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는 세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어.
첫 부분은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바라본 세상.
다음은 <속초에 내려와> 본 세상.
그리고 <잘못보는 인간>에 대한 비판 내지 반성. 이렇게... 

높은 관점에서 잘난 체하면서 보면
인간의 모든 삶의 원리를 다 알 것 같기도 하지.
그렇지만 또 낮은 곳에서 인간의 땀냄새 고름냄새를 맡노라면,
인간에 대해 다 알 것 같던 그 생각이 조금 달라지기도 한단다. 

그래서 마지막에서 <우리는 너무 멀리서만, 혹은 너무 가까이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비판을 하고 있어. 

인생을 멀리서만 보고,
"인생, 까짓거 뭐 있어~ 즐기다 가는 거지."하고 까부는 것도 우습고,
인생을 너무 좁게 보고,
"아이고, 공부 끝나니 취직 걱정이고, 취직 끝나면 결혼 걱정이고,
다시 진급 시험봐야 하고, 아이고, 세상은 걱정 투성일세."
이렇게 비관하는 일도 어리석은 일이지.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서도 보고,
그 중간의 관점을 유지하는 일.
이런 일을 '중용'을 지킨다고 하겠지. 

제목이 '장자를 빌려'인 이유는,
[장자] '추수편'에 '큰 앎은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살핀다.'는 글귀가 있대.
진정한 앎은 먼 곳에서도 보고, 가까운 곳에서도 보는 지혜가 있다는 거지. 

아들아.
네 삶을 너는 어디서 보고 있니?
하루하루의 삶의 반복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쉽게 지치고 있나,
아니면, 긴 삶 속의 좁은 지점이라 쉽게 생각하고 있나,
하루를 백년처럼 지겹게나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지,
이런저런 걱정이 된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안심도 한단다.
아들을 철석같이 믿는 것은,
네가 어떤 삶을 살든 엄마와 아빠는 너를 응원할 것이기 때문이야.
최선을 다해서 사는 아들을 응원하는 일은 당연한 거지.

세상은 이렇게 단순해 보이면서도 복잡하고, 거꾸로이기도 한 거야.
암튼, 아빠는 영원히 아들의 편이고 팬이기때문에
네가 잘 되기를 바란단다.
잘 되는 건,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살고,
재미있는 일 찾아서 즐겁게 살고,
이쁜 아내 귀여운 아기들과 즐겁게 사는 그런 일이겠지. 

물론 멀리서 보면,
세상이 험악한데 혼자서 즐겁게 살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또 가까이서 보면,
하루하루 즐겁게 사는 일의 소중함도 결코 가볍지 않단다. 

오늘은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보는 관점들이 보여주는 모순,
그리고 그 모순 사이의 진실을 느껴보는 시를 한 수 읊었어.
바빠도 한 수씩 읊으려 노력할게.

설악산 대청봉을 읽노라니 오세영의 <강물>이 떠오르는구나.  

 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 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의 격류도
 소(沼)에선 쉴 줄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 <오세영, 강물>
 

너무 전진만을 위한 삶을 살지도 말고,
너무 서두르는 삶을 살지도 말라는 이야기야.
무심하고 텅 빈 마음이 목표에 도달하게 할 때도 있다는 거지. 

신경림의 시나 오세영의 시나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죽자사자 뛰는 삶'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지.
<통념 속의 정답>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오답>이거나 <답과 거리가 먼 답>일 수도 있는 거야.
이런 시를 통해 마음도 좀 너그럽게 가지고 그러자.
그럴 수 있다면,
매일이라도 시를 읊어야지. ^^
동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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