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부터는 토요일이 모두 쉬는 날이 된다던데,
올해까진 아무래도 토요일이 좀 어정쩡한 날이구나.
제대로 공부하기에도 좀 어색한 날.
날씨까지도 하늘이 찌푸렸다.
오늘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만난 사람들의 시를 몇 편 보자꾸나.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 소냐.
머언 미개적 유풍(遺風)을 그대로
비, 바람
성신(星辰)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熱愛)하되,
삼가 애련(愛憐)에 빠지지 않음은
― 그는 치욕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憎惡)를 예비하였나니.
마지막 우러른 태양이
두 동공(瞳孔)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
내 어느 불의(不意)에 즘생처럼 무찔리기로
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일월(日月)에
또한 무슨 회한(悔恨)인들 남길쏘냐. <유치환, 일월>

이 시의 제목은 <일월>이다.
해와 달, 이것은 인류 역사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자로는 날 일(日)과 달 월(月)을 합친 ‘바뀔 역(易)’을 제법 오래 생각해왔어.

인간에게는 늘 바뀌는 환경이 문제였지.
더워졌다가 추워지고, 다시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고,
그 환경에 적응하는 모양이 곧 인류의 역사였단다.
그래서 주(周)나라때 생긴 역(易)을 주역(周易)이라고 부른단다.
주역이란 책에는 ‘막힐 때 변해야 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오래 간다’는 말이 나와.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든 살아남으려면 스스로를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고,
그래야 오래 견딜 수 있다는 인류의 지혜가 담긴 상징적 책이 주역이란다.  

화자는 어딘가를 찾아가는구나.
그 어디에나 태양이 뜬대.
어느 곳에서든 광명의 세계를 기대하는 화자.

‘미개적 유풍’이 남아있는 곳은 낙후된 곳이라기보다는
화자가 어떠한 곳에 살아도 좋다는 열린 마음을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비, 바람, 별들과 잠자고, 근심하고, 열애하는 삶을 살고자하는 화자.
고난, 고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마음이 드러난다.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생명이 사는 땅)을 사랑하되
애련(불쌍하게 생각함)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사는 일은 치욕이기 때문이래.
일제 강점기에 만주 벌판으로 쫓겨가 사는 사람의 마음치곤
독한 구석이 있어 보이지.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
곧, 일제 강점기와 친일파가 존재하던 시대임을 보여주지.
화자는 증오를 예비하고 있어.
그리고 마지막 날,
일본놈들에게 짐승처럼 죽음을 당한대도,
두 눈동자에 해바라기처럼 태양을 우러르며 죽어가기에
살아온 세상에 아무 후회가 없을 거라는구나.
소신을 굽히지 않겠다는 비장한 결의와 대결 정신이 느껴진다.

일제 강점기 말기(1939년)의 작품이니 그럴만도 해.
아빠도 대학생 시절, 군사독재 하에거 이런 비장한 일기 제법 썼거든.  



치열한 내면의식이 돋보이는 시, 일월.
이 시의 후편으로 불리는 ‘광야에 와서’를 한번 읽어 보렴.

흥안령 가까운 북변의
이 광막한 벌판 끝에 와서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 위에
오늘은 이레째 암수의 비 내리고
내 망나니의 본받아
화툿장을 뒤치고
담배를 눌러 꺼도
마음은 속으로 끝없이 울리노니
아아 이는 다시 나를 과실함이러뇨
이미 온갖을 저버리고
사람도 나도 접어 주지 않으려는 이 자학의 길에
내 열번 패망의 인생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회오의 앓음을 어디메 호읍할 곳 없어
말없이 자리를 일어나와 문을 열고 서면
나의 탈주할 사념의 하늘도 보이지 않고
정차장도 이백 리 밖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 같은 절망의 광야! <유치환, 광야에 와서> 

이 작품은 유치환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가족과 만주로 탈출해서 생활할 때의 경험을 노래한 시래.
'흥안령 가까운 북변의 광막한 벌판 끝'은 '만주'로 볼 수 있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조국을 등지고 만주로 탈출할 때의 심정을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어.
이 시에선 조국을 등지고 새로운 각오로 찾아온 만주 땅이 암울한 곳임을 깨닫고 절망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단다.

'자학·패망·회오'와 같은 관념어가 많이 쓰여서 구체성을 잃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다시 조국에 돌아가고자 하나 돌아갈 수 없는 처지와
조국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기도 해.
'망나니'는 조국을 등진 행위가 아니라
'광야'에서의 순탄치 못한 자신의 삶을 표현한 말로,
무기력한 화자 자신을 자책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시어야.
'자학의 길'로 연결되어 새로운 삶에서 느끼는 좌절감과 절망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시어지.
조국에 대한 작가의 사랑은 '회오의 삶', '탈주할 사념'에서 보이지.

'미개적 유풍'을 따르며 '성신'과 '비바람'과 더불어 사는
자연적 삶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노래한
그의 '일월'이라는 작품의 후편에 해당하는데,
새로운 삶의 근거지에서 느끼는 생의 절망감을 잘 표현했어.

만주에 가서 미개적 유풍을 따르며 자연적 삶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는 작가의 믿음과 달리
이 시에서는 '패망의 인생', '절망의 광야' 등에서 보이듯 현재의 삶에 대한 좌절감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어.

이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단다.
1~9 행에서는 ‘만주에서 겪는 고달픈 생활’을,
10~17 행에서는 자신의 생활에 대한 좌절감과 회한을 쓰고 있지.

유치환의 이 시들은 그의 만주에서의 삶이 잘 반영된 시들이라고 보면 돼.
힘들지만 의지를 가지고 살려는 화자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지.
다음엔 화암사란 절에 가서 깨달음을 얻는 연탄재의 시인 안도현의 시를 만나 보자. 

 

 

인간세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가는 불명산 능선 한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안도현, 화암사, 내 사랑>


화자는 세상살이의 힘겨움을 3연에서 <마음의 흙먼지>란 말로 표현했어.
마음에 흙먼지를 피해서 화자는 ‘화암사’로 떠난단다.
그런데, 그 절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화자는 한 순간에 깨달음을 얻었어.

그건 바로,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 때문이었다는구나.
세상 살이가 참 힘들고 짜증나는 일 투성이지만,
또 거기엔 화안한 햇빛이 내리쬐이는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지. 



우리가 찾는 행복은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 같지만,
그래서 현실에서 도피하여 어디론가 멀리 가버리려고도 하지만,
우리 삶의 행복은 늘 우리 곁에 있다는 그런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시다. 

이 시는 1연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회의’를 느낀 화자가,
2,3연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한 탐색을 시작하고,
4,5연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발견과 깨달음을 얻게 되는 구조로 되어 있단다.

화암사는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해준 소중한 곳이기에
‘내 사랑, 화암사’란 말로 표현했겠지.
화자가 창작 노트를 남겼다면 이렇게 남길 수도 있었을 거야. 

 

인생에 있어서 행복이란 자는 먼 데 있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 인생은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인생이라고 여겨 왔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인생에 있어서 행복이 무엇일까 궁금해져 행복이란 자를 찾아 나서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행복이란 자는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더군요.
그 자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으나 그래도 묵묵히 가다 보니 조금씩 실체가 보이더군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정체를 보았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운 우리 현실 속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 대답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다음엔 죽도란 섬에 가서 자신을 만나는 화자를 한번 만나 보렴.

오징어는 낙지와 다르게
뼈가 있는 연체 동물인 것을
죽도에 가서 알았다
온갖 비린 것들이 살아 펄떡이는
어스름의 해변가
한결한결 오징어 회를 치는 할머니
저토록 빠르게, 자로 잰듯 썰 수 있을까
옛날 떡장수 어머니와
천하 명필의 부끄러움
그렇듯 어둠 속 저 할머니의 손놀림이
어찌 한갓 기술일 수 있겠는가
안락한 의자 환한 조명 아래
나의 시는 어떤가?
오징어 회를 먹으며
오랜만에 내가, 내게 던지는
뼈 있는 물음 한마디 <유하, 죽도 할머니의 오징어> 

이 작품의 화자는 죽도에 갔어.
가서 회를 먹으며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성찰해 보는 거지.
화자는 척박한 현실에서도 삶의 완숙성을 보여 주는 횟집 할머니의 모습과
안락한 삶 속에서 기술자처럼 시를 써 내고 있는 자신을 대조하여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자신의 시가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시란다.  



앞부분에선 오징어 회치는 할머니를 보면서,
오징어에 뼈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뒷부분에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거지.

연체동물은 뼈가 없는데, 오징어엔 뭔가 딱딱한 뼈같은 것이 있는 걸 보고
호기심으로 시를 시작하고 있어.
그러면서 ‘오징어의 뼈’와 ‘뼈 있는 물음’이 맞물리면서,
무언가 오징어보다 못한 자신을 반성하게 되는 내용이 드러나 있지.

'어스름의 해변가'와 '환한 조명'은 대조가 되어
화자가 부끄러워하는 이유를 시각적으로 불러내고 있어.
환한 조명 아래,
마치 홀딱 벗은 것처럼 화자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지.

'오징어 회를 치는 할머니'는 '옛날 떡장수 어머니'로 연결되어
화자에게 깨달음을 주는 계기가 되어준다.
한석봉 어머니의 떡 써는 이야기와 연관지어서,
'천하 명필의 부끄러움'이 '나의 시'에 대한
화자의 반성적 인식으로 이어지고 있고 말이야.

이렇게 사람은 자신을 바라보는 일을 할 줄 아는 존재라서
다른 동물에 비하면 조금은 고귀한 존재일 거야.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른다면 동물과 다를 게 없는 거지.
자, 다시 주말이다.
지난 주를 돌아보고, 새로운 한 주를 계획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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