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잘 흘러 간다.
간절히 기다리면 시간은 더디 가지만,
좀더 잡고 싶어할 때면 시간이 여지없이 물흐르듯 흐르곤 하지.
민우랑 우리가 만난 것도 벌써 20년이 가까워 오는구나.
오래오래 함께 살 수는 없는 일이니,
같이 사는 동안 즐겁게 살자.
오늘은 좀 인생에 대한 자세를 한번 생각해 볼까 한다.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나의 영혼 안의 고운 불,
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 이,
바다에서 솟아올라 나래 떠는 금성(金星),
쪽빛 하늘에 흰 꽃을 달은 고산식물(高山植物),
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홀로 어여삐 스스로 한가로워 ― 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 뿐.
때없이 가슴에 두 손이 여미어지며
굽이굽이 돌아 나간 시름의 황혼(黃昏) 길 위 ―
나 ― 바다 이편에 남긴
그의 반임을 고이 지니고 걷노라. <정지용, 그의 반>
처음부터 의문문을 씀으로써 호기심을 부른다.
그를 뭐라고 부를까?
영혼 안에 불을 피워 환하게 비춰주는 존재는 도대체 뭐라고 부를까.
내 눈보다 세상을 더 밝혀 볼 줄 아는 존재를 뭐라고 부를까?
달, 금성, 고산식물... 이런 것들은 순수함, 멀리 있음의 의미를 담았다.
아마도 그런 존재는 하느님이나 절대적인 힘을 가진 이일 것이다.
'항상 머언 이'는 화자가 얼마나 하느님을 공경하는지 보여준다.
이렇게 멀리 대하면서 공경하는 것을 <경원>한다고 하지.
외경의 자세로 바라보는 것 같다.
나는 하느님을 사랑할 존재가 못 된다.
오로지 수그릴 수 있을 뿐.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신을 경건하면서도 겸손하게 감춘다.
무조건적인 복종의 자세. 그것이 화자에겐 즐거움이겠다.

절대적이고 완전한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상대적이며 불완전한 인간의 존재를 <그의 반>이라고 함으로써,
그가 있어야 상대적으로 나는 존재할 수 있음을 표현한 시로 보인다.
다음엔 황지우의 <출가하는 새>를 읽어 보자.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 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나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풍속으로 거슬러 갈 줄 안다.
生後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본다. <황지우, 출가하는 새>
이 시에서 '새'는 '자취를 남기지 않는 존재'인 반면,
인간인 화자는 '자취를 남기는 존재'임을 자각하며 시작하는 시란다.
새는 앉았다 간 자리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날아간 자리에도 기척이 남지 않았다.
그걸, <과거가 없는 탓>이라고도 생각해 본다.
반대로, 화자 자신은 살아온 과거를 보면
자랑스런 일보다 부끄러운 일, 감추고 싶은 과거가 많이 보였나 보다.
그래서 이런저런 부끄러운 과거가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 자취를 부끄러워하며, 새의 과거 없음을 부러워한다.
체취도 남기지 않고, 눈물도 없이, 빈 몸뚱아리로 살아온 새.
그러나 그 새는 막강한 풍속으로 거슬러갈 줄 안다.
세상 삶의 바람에 휘둘리는 화자는
새가 자신의 의지대로 바람을 거슬러 가는 기상을 부러워한다.

태어난 이후의 꿈으로 미래를 읽을 줄 아는 새.
그러나 거센 바람 속에서 미래를 잃어버린 화자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시.
사람이 어떻게 내일의 핵심을 꿰뚫어 볼 수 있으랴마는,
새처럼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화자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세속적인 가치에 붙들려 살다보면 온갖 추잡한 흔적만 가득 남기게 되고,
진정한 미래지향적 삶을 살 수 없게 된다.
나는 <그의 반>인 존재이지만,
또 이렇게 현실에서 미약한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화자는 이런 현실을 직시하면서,
<미래를 꿰뚫어보는 눈>을 간직하며 살고자 한다.
그 눈만이 미래지향적 삶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민우야, 너의 삶을 네 스스로 설계하는 데 게으르지 않기 바란다.
우리 속에는 모두 <부처>를, <그의 반>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느냐.
미래를 보는 혜안을 가진 삶의 집을 짓는 데 힘을 아끼지 말기 바란다.
그런 것이 아빠의 희망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