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그렇게 춥더니 이제 완연한 봄날씨다.
누군가가 세상 이치를 '지나가리라'란 한 마디로 요약했다더니,
추운 겨울도 금세 지나가고,
따스한 봄도 또 지나갈 거야.
민우의 고3도 금방 지나갈 것이고, 젊음도 머지않아 다 지나간단다.
재미있게 사는 삶을 스스로 만들기 바란다. 

오늘은 아빠가 좋아하는 시부터 한 편 읽고 시작하자.
오인태의 <냉이꽃>이란 시인데,
냉이꽃이 땅바닥에 납죽 엎드린 모습을 보고 거기서 의미를 찾고 있어. 

원래 인간의 언어는 부족해서 말로 뜻을 모두 표현하기 어렵대.
그래서 <모습> <상 象>을 내세워 뜻을 전달하려고 하지.
낮은 곳에 관심을... 이런말보다 <냉이꽃>이 보여주는 뜻이 더 강력함을 한번 느껴 보렴. 


그리움에 낮게
흐느껴 본 사람만이
볼 수 있으리라 냉이꽃
엎드려 고개 숙이면
낮은 자리 거기
그리움이 또 하나의
그리움을 불러 마침내
수천 수만의 그리움이
함께 손잡아
질긴 사랑으로 어우러진
냉이꽃 볼 수 있으리라
수렁처럼 절망해 본
사람만이 볼 수 있으리라
엎어지고 밟혀
마침내 절망의 끝에서
절망의 뿌리까지 손톱으로
파헤치다 보면 거기
하나의 절망이 수많은
절망의 잔뿌리를 뻗쳐
서로 일으켜 세우는 봄
억센 희망으로 피어있는
냉이꽃 볼 수 있으리라 <오인태, 냉이꽃 3>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냉이는 땅바닥에 납죽 붙은 식물이야.
그 꽃은 아주 작고 보잘것 없단다.
그렇지만, 그 꽃의 존재가 없다면 냉이는 계속 번식할 수 없겠지. 

그 냉이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세상을 힘겹게 견뎌온 사람이래.
그리움에 낮게 흐느껴본 사람. 

낮게 흐느끼다
엎드려 고개 숙여 보면,
낮은 자리 거기
그리움이 또 하나의 그리움을 부르고
마침내 수천 수만의 그리움이 함께 손잡아 사랑으로 어우러지게 하는 냉이꽃.

이렇게 낮은 시선이 서로 사랑으로 손잡게 하는 깨우침을 준단다.
냉이꽃 그 보잘것 없는 식물이 말이야. 

그 뒤엔 비슷한 말이 등장하지. 

수렁은 물구덩이지.
수렁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처럼 절망해본 사람은,
엎어지고 밟히고 절망의 끝에서 절망의 뿌리까지 좌절해본 사람은,
절망은 절망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절망들이 잔뿌리를 뻗쳐 서로 일으켜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 

그래서 봄이 되면,
절망한 존재들, 납죽 엎드린 존재들도,
서로 부축하면서 <억센 희망>을 가지게 된다는,
냉이꽃 보잘것없는 꽃과 뿌리를 통해서,
보잘것 없는 존재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깨우침을 보게 되는 거야. 

관조라고 했지?
지난 시간에 주역이란 책에서 <혁명>이란 말이 나온다고 했는데,
아까 한 이야기,
인간이 말로 모두 표현할 수 없어 <상>을 쓴다고 했던 것도 주역에 나오는 이야기란다. 

   
  글은 말의 내용을 남김없이 표현할 수가 없고,
말은 뜻을 남김없이 표현할 수 없다...
성인은 상을 세워 뜻을 남김없이 표현하였다. (계사전)
 
   

관조적 시를 쓰는 시인도 상(象)을 세워 뜻을 표현하는 사람이라 보면 되겠지? 



냉이꽃이란 시는 낮은 곳에서 바라본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드러내려는 시였단다.

다음엔 곽재구의 <20년 후의 가을>이란 시를 한번 감상해 보자.
민우가 20년 후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직장도 잡았을 거고, 결혼해서 아빠도 되어 있을까?
기술자가 되었을 수도 있고, 회사원이나 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지.
한번 읽어 보면서 20년 후,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의 심정으로 삶을 느껴 보렴.

내 어릴 적 산골 학교 미술 시간에
나는 푸른 크레용으로 옥토끼 모양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 놓고 그 안에 울긋불긋 우거진
단풍잎과 맑은 시내를 그렸었다.
산머루향이 교실까지 날아들던 오후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처녀 선생님은
가을 산꽃이 지고 해으름이 일고
그 가을내 나는 선생님의 눈물방울과 같은
단풍잎과 맑은 시냇물 속에 뛰놀았지만
돌아서서 눈물 훔치던 선생의 뒷모습과
나를 쳐다보던 충혈된 눈동자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 단풍잎은 지고 세월은 가고
이제는 선생이 된 내 앞에서
아이들이 땀을 흘리며 그림을 그린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슬픔의 푸른 크레용으로
둘러친 동강 난 내 땅 내 그리운 하늘
아이들은 평상의 얼굴로
반쪽의 땅 위에 단풍잎을 채우고
나는 충혈된 눈으로 아이들을 보았다.
눈을 뜨고 모른다며 살아온 날들이 가슴 후비는 날
가만히 손가락으로 그려보는 내 땅 내 그리운
하늘 아래 나는 이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내 손으로 그린 내 땅 안에 허름하게 시든
단풍잎 하나 떨구는 것을 거부하면서
끝내는 잊혀진 옛 선생님의 눈물마저 되살아나
동강 난 눈물방울들이 산과 바다와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뒤덮었다.<곽재구, 20년 후의 가을>

처음에 화자는 어린 시절의 미술 시간을 이야기해.
우리나라 지도를 그린 화자.
산골학교라 산머루 향이 날아들던 소박한 교실에
처녀 선생이 있었는데, 웬 일인지 눈물을 훔치던 뒷모습이 기억에 남는대.
충혈된 눈동자와 함께 말이야. 

세월이 흘러 화자는 이제 선생이 되었고,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미술 시간이야. 

아이들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분단된 조국에 단풍잎도 그리고 시냇물도 그리겠지.
아~
화자는 충혈된 눈으로 아이들을 보는구나.
그러면서 예전에 그 처녀 선생이 왜 화자의 그림을 보며 눈물지었던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눈을 번히 뜨고도 굳이 모른체 하려 애쓰며 살아온 날들이 가슴을 후비는 날.
분단된 조국의 현실에 대하여 관심갖지 않고 무심히 살아오려던 날들.  

그러나 아이들이 그 반토막난 땅에만 이쁘게 단풍잎 고운 색을 칠하는 걸 보고
화자는 눈물이 어린다.
눈물방울조차 동강나버려 마음이 아프다. 

분단된 조국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
단풍잎 하나 제대로 그리는 것을 거부하면서,
어찌 통일을 꿈에나 그릴 수 있겠는가. 

잊혀진 옛 선생님의 눈물마저 되살아난 그날,
20년 전의 가을이 되살아난 그날.
아이들에게 20년 후의 가을에는 어쩌면 동강난 국토가 이어져 있으려나?
아이들의 천진난만 웃는 얼굴에
조선 천지 온 산과 온 바다에
화자의 아픈 눈물방울만 동강나 가득찬다. 

<받들어 꽃>이란 시집에 수록된 이 시는
<받들어 총>이란 군인식 경례를 비꼰 것처럼,
통일에 대하여 무심한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시야.

"언젠가 꼭 돌아올 아름다운 그날들을 부끄럽게 맞이하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진실로 아름다운 그날의 시 한 편을 꼭 쓰기 위하여"
시를 쓴다는 곽재구 시인은 우리가 흔히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삶들을 아름답게 형상화해 내어 새롭게 일깨워 준다는
평을 받고 있단다.

시인이 바라는 <꼭 돌아올 아름다운 그날>이 통일의 날이기도 하겠지?
20년 후의 가을이면, 정말 통일이 되고, 한국이 평화로운 나라가 될 수 있을까?
대한민국도, 북조선 인민민주주의공화국도 사라지고,
<유나이티드 코리아>나 <코리아>로 새로 날 수 있을까?
이 시를 읽으면 그런 기대가 살살 피어오른단다.

다음엔 오세영의 시, <겨울 노래>를 읽어 보자.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그늘 지고 산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도 이제는
간 데 없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지금은
온 데 없다.
길 끝나 산에 들어섰기로
그들은 또 어디 갔단 말이냐.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폭설.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인데
어제는 온종일 난을 치고
오늘은 하루 종일 물소릴 들었다.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오세영, 겨울 노래>

이 시를 읽으면 성철 스님의 '화두'가 생각나.
첨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하셨어. 
산을 산으로 물을 물로 사물을 세상을 <바로 보마> 하는 김수영의 <공자의 생활난>과 같은 거지. 

그 담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고 하셨대.
인간이 세상을 <바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일 거야. 

그런데 돌아가실 때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하셨어.
어찌 보면 말장난인 것 같지만,
산은 산으로 거기 있고, 물은 물로 거기 있으며,
인간은 그것을 어찌할 수 없는 무상한 존재라고 가르치신 건지도 모르지. 

산이 저기 있어.
눈에 산이 뻔히 보이지.
화자는 '산자락을 덮고 자'는 사람이야.
그렇지만 산이 되진 않지.
산과 동화되지 않는 것이 불만인 것일까? 

또 화자는 '산그늘을 지고 사'는 사람이기도 해.
그렇지만 산과 동화될 수 없어.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저기 산이 있는데, 화자는 그 산과 하나가 될 수 없는 인간 존재임을 절절히 깨닫는다.
여기까지만 다시 읽어 보렴.
동화되길 원하지만 동화되지 못하는 화자가 느껴지는지.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그늘 지고 산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는 분명 시끄럽게 재재거렸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분명 소란스레 달가닥거렸는데,
이제 오간데 없어. 

화자가 가던 길이 끝나고 산길로 접어들었는데,
과연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산까치나 다람쥐는 과연 있었던 것일까?
인간 세계의 길이 끝나, 산문의 길로 접어들었는데도 왜 진리는 보이지 않는 걸까? 

세상 이치를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경지가 있다.
<언어 도단>이라고 한다.
언어가 끊겨 말로 할 수 없는 경지.
그럴 때, 성인은 <상>을 그려 보여준다고 한다. 
그 상을 한번 만나 보렴.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폭설.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

어제 오늘 진눈깨비와 폭설이 가득 내려 세상은 흰색으로 꽉 찼다.
아니 꽉 차서 텅 비어 보인다.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다.
그렇지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다람쥐와 까치는 그쳐있지만, 또한 다람쥐와 까치가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  

불교에서 언어로 전달되기 힘든 것을 
언어를 세우지 않고 <불립문자>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기도 한다. <이심전심> 

빈 하늘 빈 가지에 홍시 하나 떨고 있는 풍경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거기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그림이다. 

어제는 종일 난초를 그리고(난을 치고)
오늘은 종일 물소리를 듣는 화자. 

그런다고 세상 사는 이치를 깨우칠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조용하게 마음을 가라앉힐 줄 아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듯 하다.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는
이렇다 저렇다 하는 판단이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일 뿐임을 생각하는 것 같다. 

화자는 난을 치고 물소리를 들으면서 자연과 동화되고 있는 모습이다. 

뭔가 세상으로 난 길을 뛰어넘어서 <높으면서도 좀 외로운 정신 세계>
즉, 고상한 마음 상태를 얻은 것 같지?
이렇게 세상 일에 얽매이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놓여난 상태를 <달관>이라고 한단다.
세상 일을 뛰어넘어 보게 되는 경지를 일컬음이지.

동양화에는 가득 차는 맛보다는, 여백의 미가 있다고 하잖아.
이 시도 의미를 모두 이해하려는 '채움의 미덕'보다는
마음을 비우고 세상 만사 너무 지적으로 알려는 태도를 경계하는 것은 어떠냐?는 식의
'비움의 미덕'을 가지고 감상하는 맛도 특별할 거다.   

더 나이가 들면, 종교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기회가 있을 거야.
종교적인 시는 많이 다루지 않지만,
인간의 나약함을 뛰어넘으려는 시도가 종교인 만큼,
종교의 기본 의미 정도는 자꾸 이야기할 기회를 가지도록 할게. 

오늘은 낮은 곳에서 보는 일과 깨달음을 나타낸 오인태의 냉이꽃과,
통일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을 미래의 눈으로 읽는 곽재구의 20년 후의 가을,
그리고 종교적 관조의 세계를 달관의 눈으로 쓰는 오세영의 겨울 노래를 이야기했다.

한 주일 시작이야.
힘 내서 또 재밌게 살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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