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김수영의 <공자의 생활난>을 읽었는데,
글쎄 요즘 생활난을 겪어보지 않은 너희로서는 생활난에 대한 시를 쓰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은 전쟁 이후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로 꼽히고 있었단다. 

'홀트 아동 복지 재단'은 전쟁에서 고아가 된 아이들을 입양시키기 위해
한국에서 탄생한 기관이었고,
1960년대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워낙 돈이 없어서 사업을 벌일 수 없자,
독일에 돈을 빌리려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기도 했어. 

거지같은 식민지는 오히려 부담이 되기에
한국전쟁때 일본을 부흥시켜준 것처럼
베트남전쟁을 기회로 한국을 부흥시켜준 미국의 힘도 작용했을 것이다.

거기에 조선시대부터 지식인이 되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던 전통을
아니 배우지 못하면 설움을 받던 전통을 이어,
아이들을 가르치려는 열기가 대단했던 덕택에
한국은 <근대 공업 사회>로 들어서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 와중에서 농촌은 파괴되고,
대도시의 삶은 빈민층을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며,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부동산 투기'와 '도시 개발'로 인한 땅부자가 생기게 되었지.
지금도 한국 땅의 55%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인구의 1%라고 하더구나.
한국 땅의 82%를 가진 사람은 5%밖에 안 되고... 

세계 어디에도 없는 <아파트 열풍>이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이유는 이런 데 있을 거야.
뭐, 땅이 있어야 집을 짓지.
그러니 위로 위로 오를 수밖에. 

겉으로는 먹고 살 만하게 변해가는 것 같았던 한국 사회는,
속으로는 군사 독재가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었단다.
극장에서 상영하는 '대한 늬우스'에서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박정희가
모내기를 하고 농부들과 막걸리를 마시는 사진이 홍보되었으나,
사실은 으리으리한 집에서 양주를 마시는 파티가 맨날 연출되었다더구나. 

이런 시절, 군사 독재를 그만두고 민간에게 정치를 이양하라고 싸우던 이들은
법률 위반으로 감옥행이었고,
툭하면 사형 선고를 해버리곤 하였단다. 심한 경우엔 정말 죽이기까지 했어.
이런 시절, 저항이란 것은 곧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었을 거야.
김수영이 바라던 <푸른 하늘을> 한번 읽어 보자.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김수영, 푸른 하늘을>

이 시는 1960년 4.19 직후에 씌어진 시야.
1961년 5.16에 박정희가 탱크를 몰고 국회를 해산하고 독재를 시작하기 전이겠지. 

4.19 혁명은 <미완의 혁명>이라고 부른단다.
혁명이란 것은 말이야.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부르는 걸 뜻한단다. 

혁명(革命)이라는 한자어의 출전은 주역이래.

天地而四時成 湯武 革命 順乎天而應乎人
: 하늘과 땅이 바뀌어 사철을 이루듯 탕, 무의 혁명은 하늘의 뜻을 따라 사람들의 요청에 응한 것이다. 

바꾼다는 뜻으로 쓰였지. 

혁명에 해당하는 영어 revolution은
라틴어 revolutio가 어원으로 "회전하다" 또는 "반전하다"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란다.
암튼 뭐가 크게 바뀐다, 뒤집힌다는 뜻이지.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시구에
반박을 가하는 것으로 시는 시작된단다. 

푸른 하늘을 휘젓고 다니는 종달새.
그 새는 자유로울 거라는 의미는 뭐, 크게 어렵지 않지?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은 이것저것에 구속되지 않잖아.
국민할매가 머리를 길게 기른다든지,
노홍철이 노랑머리를 한다든지 말이야. 

그 시인의 말은 <겉으로 드러난 자유>에만 주목해서 맘에 안 든대.
하늘을 나는 노고지리를 부러워할 거 없단 말이겠지.
그럼, 화자는 뭐가 문제란 걸까?

나는 발산(發散)한 형상(形象)을 구(求)하였으나
그것은 작전(作戰)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공자의 생활난 중 일부> 

화자는 '발산한 형상'을 구한다고 했던 기억 나니?
자유롭게 살고 싶다던 화자의 희망 사항.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은
바로 '발산한 형상을 구하>는 사람일 거야. 

세상은 '자유로운 인간'을 구속하는 경향이 있단다.
전에 한번 이야기했지. 엔트로피란 말이 있다고.
사물은 질서정연한 쪽에서 흐트러지는 쪽으로 바뀌게 마련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권력자는 <치안>을 통해서 <질서>를 잡으려고 하게 마련이고 말이야. 

이 사이에서 뭔가가 부딪히지 않겠어?
권력자는 <치안>을 유지하고 질서를 잡으려 하고,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는 사람은 <자유를 누리려> 하고 말이야.
이 사이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단다.
프랑스의 유명한 '랑시에르'란 정치학자였어. 

<자유를 찾는 사람>은 안대. 뭘 아냐면 말이지. 

노고지리가 / 무엇을 보고 /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은 알아.
노고지리가 그저 푸른 하늘을 보고 아름답다고 노래하지는 않음을 말이야. 
노고지리가 자유롭게 날기 위해서는
그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피의 냄새'가 섞인 투쟁을 하여야 함을 말이지. 

그래서 랑시에르는
권력자의 <치안>과 자유인의 <권리 주장> 사이에서
<정치적인 것>이 발생한다고 했고, 그 정치적인 것에는 '피의 냄새'가 배어있는 것이겠지.
권력자는 <여기엔 볼 것이 없어. 그냥 지나가시오.> 이렇게 말하지만,
자유인은 <여긴 우리가 보고 말할 것이 있어. 좀 모입시다.>이렇게 외치지.
결국 그 사이의 갈등이 <정치적인 것>이 될 거고 말이다. 

그 피의 냄새 때문에 혁명은 늘 <고독>한 것이어야 한대.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가 민주주의라고 한 시인의 구절도 있듯이,
혁명은 고독한 것임도 마찬가지 성찰에서 나온 시구란다. 

<알지> <~를> <~를> <~를>
이렇게 ~를 알지의 의미를 도치시킴으로서 시에 여운을 남기기도 한단다.
자유에는 <투쟁>이 있어야 하고, <자기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4.19 직후란 시대에 넣어 보면,
희생 없이는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거야. 

율리우스 푸치크란 사람이 쓴 <교수대로부터의 리포트>란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단다.

내가 마지막 투사가 될 지언정, 싸움의 깃발을 내릴 수 없다. 나를 쏴라. 

이런 정신이라야 혁명 투사가 될 것이란 생각을 김수영도 했던 것 같아. 

이 시에서 '어느 시인'과 화자의 노고지리를 보는 관점의 차이를 정리해 보면 이래.

'어느 시인' - 노고지리의 비상에만 주목하여 자유의 이미지 발견(노고지리는 자유롭게 하늘을 난다.)

'화자' - 그 자유를 획득하기까지의 고난의 과정에서 자유의 의미를 포착(투쟁하지 않으면 자유는 없다.)

다음엔 수능에도 났던 시, 김수영의 <사령>을 읽어 보자.
사령은 '죽은 혼령'이란 의미야.
독재 시대의 '살았으나 죽은 거나 다름없이 무기력한 영혼'이란 의미겠지.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도 저 들벽 아래 잡초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도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김수영, 사령(死靈)>

1연에서 벌써 화자는 주제를 이야기해버렸어.
'활자'는 자유를 말한다.
그러나, '나의 영혼'은 죽어 있다.
이렇게 <자유를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영혼에 대한 성찰, 자기 반성> 이것이 주제지.
마지막 연에서 똑같이 <우스워라> 하면서, 자조적으로 자기 반성을 하는 시.  

<활자>는 글자로 찍혀있기만 한 <자유, 정의> 이런 것이겠지.
이승만이란 조선왕조의 후예이자 왕이라 착각했던 초대 대통령이 속했던 당이 <자유당>이었어. 헐~
독재하기로 유명했지.
그러다 군사 독재로 유명한 박정희의 당은 <민주 공화당>이었어.
'민주'는 쉬운데,
'공화'란 republic의 번역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하는' 이런 뜻이야.
독재자 이름치곤 죽이지?
광주에서 수백 내지 수천의 동포를 학살하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의 당은 <민주 정의당>이었지.
무슨 독수리 오형제도 아니고, '정의'를 내세우다니, 참 헐~ 일수 밖에... 

글자로는 온갖 자유를 논하지만, 자유가 없는 세상.
화자는 간혹 <글>을 발표하면서,
<시>를 쓰면서, 활자화된 자유를 이야기했나봐.
화석처럼 굳어져버린 <글자>만의 자유. 

뭐, 살인사건의 범인을 잡았더니 <나 그이를 사랑했어요>할 때의 <사랑>같은 의미랄까? 

<~ 않어라!>와 같은 발음은 서울 사투리야.
서울 방언 중에서는 <않아>를 <않어>로 쓰기도 하고,
<~~하고>를 <~~허구>라고 하기도 한대. '너허구 나허구 이러구 저러구' 이렇게 말이지.
좀 간지럽지? ㅋ 

벗에게 화자는 말하고 있어.
그대는 무슨 말을 하는데 나는 고개 숙이고 듣기만 하고 있는 상황이야.
그게 맘에 들지 않겠지?
그래 맘에 들지 않아 해! 이런 의미기도 하고, 자신의 맘에 안 든다, 이런 의미기도 하고. 

암튼 자신의 모든 게 맘에 안 든대.
황혼, 잡초, 페인트 빛, 고요함... 이 모든 것이 다.
<푸른 하늘을> 날으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종달새>처럼 투쟁하지 못하고,
<현실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맘에 안 들고 부끄럽대. 

벗이 외치는 말뿐인 <정의>, 활자 속에만 있는 <정의>도
섬세하게 세상 이치를 따지는 우리의 <논리>도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는 행동을 하지 못하고,
<죽음>에 잠겨버린 젊은이들의 모든 토론도, 하소연도, 넋두리도...
모두 모두 맘에 들지 않는다. 

아마, 교외로 몇몇 친구가 야유회라도 갔는지 모른다.
서로 벗들끼리 문서를 읽고 토의를 하고 술이라도 마셨는지 모른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힘찬 투쟁의 희망은 없는 토론.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토론은 <죽음에서 나오는 행동>처럼 보이나보다. 

벗이거나, 문서이거나,
간간이 자유를 말하지만,
우습게도,
화자의 영혼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란다. 부끄럽게도...
부끄럽게 스스로 비웃는 것을 '자조적'이라고 하지. 

<말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고요함>으로 표현되고 있다.
고요함은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거지. 
<불의의 현실, 부정적 현실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자기 반성>
지식인에게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도록 일깨우는 작품으로 김수영의 시가 많이 읽혔던 것도,
이런 자기 반성을 담고 있기 때문일거야. 

이렇게 시대 속에서 자기 반성을 하는 지식인의 시는 참 많았단다.
일제 강점기,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같이'란 시를 썼던 시인.
영랑 김윤식의 시에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시어들이 갈고 닦은 옥처럼 등장했었지?
그 영랑조차도 일제 강점기에 '독한 시'를 쓴 일이 있어.
그 독한 시 한번 볼까?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마저 가 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아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김영랑, 독을 차고>

1연에서 <가슴에 독을 찬> 영랑이 등장해.
아직 아무도 해한 일이 없긴 하지만, 새로 뽑은 독은 엄청 독성이 셀 거야.
'벗'이 등장하는데, 벗은
'야, 너하고 독은 안 어울려, 그만 흩어 버려.'
이렇게 충고했대.
근데 영랑은 독한 한 마디 날려 줬어.
"야, 이 독이 너도 해칠지 몰라. 까불지 마. 장난 아냐." 이러고. 

보드레한 에메랄드 곱게 흐르는 /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내 마음의 어딘듯 한편에 /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 은결을 돋우네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모란이 피기까지는 /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런 게 김영랑 시지.
매끄럽고 조금 여성스럽고 부드럽고 순수한 그런 시 말이야.
이런 시인이 독을 품는다니,
어쩌면 더 무서워 보이기도 하는구나. 

영랑의 <독(毒)>은 부정한 현실에 대한 대결 의지, 저항의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벗>은 현실에 순응하는 인간이고 말이야. 

2연에서 다시 <벗>이 회유하고 있어. 

"야, 영랑. 임마.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죽고  나마저 죽어 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 버릴 거고
나중에 땅덩이도 닳고 닳아서 모래알이 될 거잖아. 
얌마. 세상은 이렇게 허무한 거야!
근데 니까짓 쪼끄만 게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그냥 나랑 술이나 한 잔 하고 독한 맘 풀어라이~" 

이 친구는 진심으로 영랑을 위해주는 친구였는지도 몰라.
이 친구와 헤어진 영랑은 혼자 돌아와 일기에 3, 4연처럼 썼어.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하다!'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삶은 어차피 허무한 거야.
그런데 <이리 승냥이>가 나의 마음을 해치는 부정적인 존재가 있으니,
곧 일제 강점기의 지식인의 고통을 겪고 있으니,
산 채로 일제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고
먹히게 될 존재임을 생각하면, 

나는 독을 품고 살아 가겠다.
내가 죽는 날,
나의 외로운 혼이
"그래, 나는 허무한 인생을 허무하게만은 살지 않았다."
이렇게 위로할 수 있도록...

이런 저항 정신이 드러난 시가 되겠지.
영랑의 시로는 드물게 직설적으로 저항정신이 드러난 시란다.
다른 시들의 화자가 비교적 여성스럽다면, 이 시의 화자는 남성스런 역할이지.
죽음을 각오하고 혁명의 대오에 들어서겠다던 김수영의 <피의 냄새>와도 통하지 않니? 

그렇게 부정적 현실에 저항하던 이들의 글에는 <비장한 아름다움>이 담겨 있었단다. 

시를 읽는 일은 다른 삶을 통하여 나의 삶을 비춰보는 맛이 있는 것 같아.
아빠는 아빠 나름의 삶을 비춰 보고,
아빠와 읽는 시들이 나중에 민우의 삶에서도 비춰보는 기회가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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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이 2011-05-22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이 너무 좋아요! 어떻게 이렇게 짜임새 있게 시를 설명하시는지..ㅠㅠ 감동이에요!

글샘 2011-05-23 08:43   좋아요 0 | URL
짜임새 있게 읽었다니 고맙네요. ^^

명수명수 2013-05-23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제가 대학생인데 수업 과제로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 이란 시를 조사해서 발표하는 과제를 하고 있었는데
시의 내용도 어렵고 잘 이해가 안되서 길을 해매고 있었는데 글샘님의 자세한 설명덕에 지금 너무 잘되가고 있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