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은 참 빨리 간다. ^^
시간은 얼마나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인지,
즐거운 시간은 늘 금세 지나가고,
지겨운 시간은 죽으라고 안 가지. 

밥먹을 때 줄 서있는 시간은 지겹도록 안 가고,
맛있는 점심 먹는 시간은 금세 가듯 말이야.
좋아하는 선생님 시간은 왜 그리도 짧은지...
그리고 웬수같은 선생님 시간은 왜 빠지지도 않는지... ㅋ
삶이 즐거운 사람에겐 인생이 참 빨리 지나갔단 생각이 들 거고,
삶이 힘겨운 사람에겐 그 시간이 참 길 것 같다. 

사람이 사는 거.
이렇게 순간순간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오늘은 그 삶의 상대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선 김광규의 <나뭇잎 하나> 읽어 보렴. 

크낙산 골짜기가 온통
연록색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러니까 신록이 우거졌을 때
그곳을 지나가면서 나는
미처 몰랐었다 

뒷절로 가는 길이 온통
주황색 단풍으로 물들고 나뭇잎들
무더기로 바람에 떨어지던 때
그러니까 낙엽이 지던 때도
그곳을 거닐면서 나는
느끼지 못했었다 

이렇게 한 해가 다 가고
눈발이 드문드문 흩날리던 날
앙상한 대추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 하나
문득 혼자서 떨어졌다 
 
저마다 한 개씩 돋아나
여럿이 모여서 한여름 살고
마침내 저마다 한 개씩 떨어져
그 많은 나뭇잎들
사라지는 것을 보여 주면서 <김광규, 나뭇잎 하나>

네 연이 비슷한 길이로 구성되어있다. 이쁘지.
산 이름이 '크낙산'이다. 큰 산.
그 산이 온통 연록색으로 부푼 봄이겠지.
그 봄에 나는 미처 몰랐대.
봄은 인생의 젊은 시절이기도 하겠구나.  

그러다 그 길이 온통 단풍들고 낙엽지던 계절,
그 때도 나는 느끼지 못했단다.
가을은 인생의 중년이 되겠고 말이야.
그럼 언제나 알게 될까? 궁금하지?
시를 절반을 읽도록 아직도 모른다니 말이다. 

한 해 다 가고 눈발이 흩날리던 어느 날
이제 인생이 다 지나 낙이라곤 거의 없는 노년의 어느 순간.
대추나무 가지 끝의 나뭇잎 하나
문득 떨어지는 걸 보았어.
그걸 보면서,
그 <나뭇잎 하나>를 보면서 이 사람은 인생의 <관조>를 얻게 된다. 

인생은
저마다 한 사람씩 태어나
여럿이 모여서 한 평생 살고
마침내 저마다 한 사람식 죽고
그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는 

<나뭇잎 하나>의 관조의 힘.  

 

그 작은 자연 현상을 보면서 사색하고 성찰하는 화자의 눈이 날카롭다.
이 시의 주제는 <존재의 소멸을 통하여 바라본 인생의 의미> 같은 것이 될 거야.
사라짐은 왠지 사람을 조금 겸손하게 만드니 말이야.

봄에는, 여름에는 <몰랐었다>라는 회고가 조금 가슴 쓰라리게 하는구나.
다음엔 재미있는 시를 한 편 보자 

저녁엔 해가 뜨고
아침엔 해가 집니다.
해가 지는 아침에
유리산을 오르며
나는 바라봅니다.
깊고 깊은 산 아래 계곡에
햇살이 퍼지는 광경을.

해가 뜨는 저녁엔
유리산을 내려오며
나는 또 바라봅니다.
깊고 깊은 저 아래 계곡에
해가 지고 석양이 물든
소녀가 붉은 얼굴을
쳐드는 것을.

이윽고 두 개의 밤이 오면
나는 한 마리의 풍뎅이가 됩니다.
그리곤 당신들의 유리창문에 달라붙었다가
그 창문을 열고
들어가려 합니다.
창문을 열면 창문, 다시 열면
창문, 창문, 창문……
창문
밤새도록 창문을 여닫지만
창문만 있고 방 한 칸 없는 사람들이
산 아래 계곡엔 가득 잠들어 있습니다.

밤새도록 닦아도 닦이지 않는 창문,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창문,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두꺼워지는
큰골의 잠, 나는 늘 창문을 닦으며 삽니다.
저녁엔 해가 뜨고
아침엔 해가 지는 곳
그 높은 곳에서 나는 당신들의 창문을 닦으며 삽니다. -<고층빌딩 유리창닦이의 편지, 김혜순>

화자는 길거리를 가다가 고층빌딩 유리창닦이를 봤겠지.
고층빌딩의 유리창닦이는 거기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란다.
창문 안에서는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이 움직이지만,
창밖에 매달려 유리를 닦는 사람들을 거기 있다는 인식도 하지 않으니 말이야.  

첫부분부터 재미있는 표현이 나온다.
저녁에 해가 뜨고 아침에 진대. 말도 안 되지?
이렇게 모순되는, 말도 안 되는 걸 <역설법>이라고 한단 건 이제 알겠지?
반대되는 게 <반어>.
에이 뭐, 그건 말도 안돼. 이게 <역설>  

아침에 출근하려고 <유리산>을 올라가노라면,
사람이 올라가는 만큼 해가 아래로 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지겠지.
상대적인 거니깐.
반대로 퇴근무렵 <유리산>을 내려오다보면,
사람이 내려오는 만큼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느껴질거야.
역시 상대적이지. 

유리창닦이가 오르내리면
마을에 햇살도 퍼지고, 소녀가 석양을 받으며 올려다 보기도 하겠지만,
<이윽고 두 개의 밤이 오면>부터가 조금 문제란다. 

이 '두 개의 밤'은 뭘 뜻하는 걸까?
뒤의 이야기를 따져 보면,
빌딩 안과 빌딩 밖의 두 세상의 밤인 것 같다. 

유리창닦이인 화자는 <풍뎅이>가 된대.
풍뎅이가 유리창 밖에서 아무리 잉잉거리고 울어도,
유리창 안에서는 들리지도 않는 소리지.
그렇게 소외당한 화자는 자신을 유리창닦이에 비유한 거란다. 

풍뎅이는 유리창문에 달라붙었다가 창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지만
반복적으로 창문만을 만날 뿐이야.
끊임없이 소통을 원하는 화자에게 세상은
늘 유리창이란 방해물이자 장애물로만 맞선단다. 

유리창닦이가 밤새 창문을 여닫아도
창문만 있고 방 한 칸 없는 사람들 뿐.
<방 한 칸>이란 자신의 공간.
자신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를 서로 쓰다듬는 소통의 공간은 없고,
그저 서로는 <창 밖의 존재>일 뿐인 냉혹한 세상. 

세상은 그런 이들로 가득하다는구나. 

밤새 닦아도 닦이지 않고,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창문은
소통이 불가능하고 단절이 심화되는 상황을 표현한 것 같지? 

두드릴수록 두꺼워지는 <큰골의 잠>
큰골은 '대뇌'야.
대뇌는 인간은 온갖 감각기관이 받아들인(수용한) 것들을
합쳐서(연합) 판단하는 기관이지.
인간이 비로소 인간답게 되려면
인간의 대뇌 피질에서 활발하게 전기 신호가 지직거려야 하는 거겠지.
근데, 큰골은 잠을 자고 있단다.
갈수록 두꺼워지는 대뇌의 잠. 

인간과 인간이 서로 수용할 수 있는 기관인 대뇌가 두껍게 되고 잠들게 되는
무감각한 세상. 

화자는 늘 창문을 닦으며 살아.
그것은 곧 소통을 끝없이 추구하고 있단 소리겠지. 

사람들과 유리된 공간,
그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진 공간에서
타인과의 소통을 간절히 소망하는 화자의 심정이 잘 드러난 시란다.

오늘은 시간의 상대성과 공간의 상대성을 다룬 시 두편을 읽었다.
시간은 20대때는 시속 20킬로미터의 속도처럼,
50대때는 50킬로미터의 속도처럼 느껴진대.
초등학교보다 중학교가 빨리 가고, 고등학교는 더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공간도 우리가 같이 살아가는 공간이지만,
서로 나뉘어져 사는 것처럼 느껴지는 소외감을 느낀다면,
함께 있어도 함께 있는 것이 아니겠지. 

다시 1주일이 시작된다.
새 아침을 맞는 기분이,
유리창닦이처럼 좌절스럽지만은 않길...
그리고 울상으로 새 한 주를 맞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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