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중 가장 힘든 1주일이 지났다.
다음 주도 바쁘겠지만, 그래도 개학 후 첫 주는 언제나 마음도 몸도 몹시 춥다. 
선생님들도 새로 오셔서 낯설고, 자리도 바꾸면 환경이 달라져서 마음도 설다. 

오늘은 인간 <존재>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볼까?
도대체 인간이란 건 뭘까? 

어린 아이를 교육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가르침이 <도리도리>야.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중추 신경이 지나는 '목 운동'을 시키는 거래.
그 다음 교육과정은 <짝짜꿍>이야.
목을 움직일 줄 아는 아이에겐, 팔을 미세하게 맞출 줄 아는 운동을 시키는 거지.
발은 눈 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쭉쭉 늘여주는 마사지 정도면 된단다.
그런 다음엔 <죔죔>을 가르쳐. 너도 이 교육과정은 다 마스터 했단다. ㅎㅎ
주먹을 쥐게 함으로써 더 미세한 손가락 근육을 훈련하는 거래.
마지막 훈련이 <곤지곤지>래.
왼손바닥에 오른손 검지를 맞출 줄 아는 신경 운동. 

이렇게 가르쳐도 15년이 되어야 다 자라는 인간.
그렇지만 그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을 다 할 수 있는 만물의 영장.
그러나 또 생태계 속에서 온갖 파괴를 생성시키는 지구 공공의 적. 

조지훈의 <풀잎 단장>을 읽어보며 인간과 자연의 의미를 곰곰 생각해 보자.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 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이 피어오르는 한떨기 영혼이여. <조지훈, 풀잎 단장>

시인이 오래된 성터를 거닐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렴.
그 성터에는 오랜 세월 거치는 동안 무너져버린 축대에 오래된 바위가 널브러져 있겠지. 
좀 높다란 곳에 있는 성터에 올라 하늘을 보다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풀잎을 보게 되었어. 

그러다가 풀잎과 자신의 <공통점, 유사점>을 발견하게 된 거야.
자연이나 사물을 바라보다가 깨달음을 얻는 일, 바로 관조의 순간을 맛보게 되지.  

풀잎이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듯,
나의 존재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는 것이구나.
내가 이렇게 약하고 작은 존재구나. 아~ 나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잰체하는 바보였구나~ 이런 생각을. 

그래서 풀잎을 보고 화자는 마음 속으로 외쳤단다.

   
  아, 너는 우리 인간의 <아름다운 분신>이구나.  
   

그래서 인생사에 찌들린 화자는 고달픈 얼굴로 풀잎에게 이야기한다.
낮은 목소리로 도란도란...
그렇지만 기쁜 마음으로 웃으면서... 
시간이 쏜살같이 흐를 땐 인간은 자연의 법칙, 섭리를 생각할 틈도 없어.
그렇지만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때'가 되면,
한 줄기 풀잎을 만나도 <그윽히 피어오르는 풀잎의 영혼>을 깨닫게 되는 것임을 화자는 발견하고 있어.

'무너진 성터' 같은 시어에서는 <인생 무상>이 느껴진다.
불교에서 <무상 無常>이란 말뜻은 '늘 제자리에 있는 것이 없이 변함'이란다.
금강경에서도 <모든 것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같다>고 한 것도 그런 거야.
한계가 있어서 유한하고, 변하고 사라지고 죽는다는 것. 

<풀잎 단장>이란 제목은 풀잎을 보고 느낀 짧은 생각(단상) 또는 풀잎을 보고 지은 짧은 글(단장)이 되겠지.

풀잎에 화자가 <동화>되면서 풀잎의 생명력에 신비로움을 느끼는 시였다. 
다음엔 한용운 시인의 <알 수 없어요>를 읽어 보자.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잎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한용운, 알 수 없어요>


제목이 벌써 좀 신비롭지 않냐? ㅋ
알 수 없어요. 

이 시에서는 총 여섯 번의 의문이 던져진다.
그 의문의 내용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모든 질문의 답은 한결같다는 거야. <알 수 없어요>
인간 존재의 모든 의문은 <인간의 지식 한계> 너머 있는 것이었단다.
그래서 인간은 오직 질문할 수 있을 뿐.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모를 뿐>이란 대답이었다는구나.
참 겸손한 표현이지 않니?

가을이 되어 오동잎이 수직으로 낙하하고 있어.
왜 지구는 오동잎을 끌어당기는 것일까? 이런 것이 바로 뉴턴이 궁금해 했던 거야. 

장마철에 바람이 부는 검은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인대. 
아무리 비바람이 강해도, 그 위엔 눈부신 태양과 푸른 하늘이 그대로 있는 거지.
참 신비로운 자연의 현상 아닐까? 

비가 내린 뒤, 수천 년 해묵은 나무와 이끼, 그 옆의 탑이나 부도(고승의 사리를 안치한 돌무덤) 사이를
걷노라면 어디선가 흙냄새와 나무의 향, 축축한 풍만함이 가득한 공기가 코를 통해 들어온다.
아, 이런 고마운 향을 느끼는 우리는 어찌하여 여기를 걷고 있는 걸까? 

비가 내리지도 않는데도 어디선가부터 흘러나온 작은 시냇물.
비가 오면 조금 커지지만 비가 오지 않아도 쉬이 메마르지 않는 시냇물도 참 신비로운 자연의 노래다. 

바다부터 하늘까지 가득한 저녁놀을 의인화하고 있어.
연꽃(불교적 완성의 의미) 같은 발꿈치로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하늘을 만지고,
떨어지는 해를 단장하는 저녁놀~ 아, 이런 아름다운 장면은 한 편의 시 같잖아.
도대체 누가 이런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겠니? 

마지막 부분은 <윤회>에 대한 이야기란다. 

나뭇가지가 타고 남은 재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이 오래 묵혀진 것이 바로 <석유>거든.
기름이 다시 타오르고 <무 無>로 돌아가는 것 같아도
세상 모든 것은 돌고 돈단다. 그것이 윤회의 섭리야.  

반야심경이란 <불경>에 짱구네 집 가훈이 나온단다.
짱구네 집 벽엔 <색즉시공> 넉 자가 붙어 있어.
색 色은 곧 존재하는 것, 있는 것 이런 말이야.
공 空은  없는 것, 사라지는 것 이런 말이지.
오나전 역설 아니니?
있는 것은 곧 없는 것이다.(한자로 是는 영어의 Be 동사야. ~이다는 뜻이지) 

아무리 뭐가 있어 보여도 다 없어지게 마련이고,
아무 것도 없어 보여도 가득 차게 마련인 것이 세상 이치라는 것이다. 

축구할 때면 부르짖는 '대~한 민국'도 사실 얼마 뒤면 사라질 거야.
남북이 통일되면 '북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도 사라지겠지.
그러면 <통일 조선>이 되든, <통일 한국>이 되든, <유나이티드 코리아>가 되든 새 이름이 붙을 거 아니니?
무엇이든 영원한 것은 없고, 또 전혀 아닌 것도 없단다.
세상은 돌고 돌지. 변하고 변한다. 바뀌고 바뀌고...
이게 <인생 무상>이고 <색즉시공>의 의미야.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화자의 구도 정신일 거야.
세상은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이렇게 고통스러운 곳인지... 일제 강점기의 시. 

부처는 4성제라는 것을 이야기했잖아.
고,집,멸,도...의 네 가지.
세상은 고통스러움의 연속인데, 이건 집착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것을 소멸시키고 싶은 자는, <스스로가 부처임>을 깨달아 '도'를 이루라. 이런 거지. 

이렇게 말로 듣는다고 깨달아지면 그건 진리가 아니란다.
언어의 경지를 뛰어넘는 가르침이 있어야 되지.
혼자서 마음으로 곱씹고 곱씹어야 진리의 한 끝을 보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화자가 마지막 행에서 외치고 있어.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정진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이 되겠습니까?
'밤'은 시련의 시대, 일제 강점기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등불이 되고 싶대.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지.  

만해 시에서 '임'의 의미는 참 다양하게 해석되는데,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의 서문 '군말'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대.  

"'임'만이 임이 아니라, 기룬(사랑한, 그립고 애틋한) 것은 다 임이다.
중생이 석가의 임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임이다.
장미화의 임이 봄비라면, 맛티니의 임은 이태리이다.
임은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임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장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임이 있느냐. 있다면 임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이처럼, 한용운에 있어서 '임'은 이 세상 모든 존재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조국일 수도 있고, 부처일 수도 있다.
그러한 것들은 개별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상징을 통해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즉, '임'은 애인인 동시에 조국, 조국인 동시에 부처, 아니 그 모두가 한데 어우러진 추상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임'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시는 <신비한 자연 현상>을 관찰하면서 자신의 구도 정신을 드러내고 있단다.
세상은 얼마나 신비로 가득한 곳인가?
어쩌면 풀잎 단장과 유사한 신비로움이 느껴지기도 하지?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단어로 <관심>을 꼽는단다.
무엇이든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똑바로 볼 수 있고,
기회도 잡을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고,
사람도 얻을 수 있고,
인기도 생길 수 있고,
대학도 갈 수 있고,
취직도 할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약장사의 만병 통치약이 바로 <관심>이라고 말이야.
늘 생각하는 것이 관심이지. 그런 걸 좀 수준높은 말로 하면 '도'가 될지도 모르겠다. 

스님, 기독교적 수도자 들은 늘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고통과 소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존재야.
삐뚤어진 세상과 올바른 인간의 삶에 대하여서도 <관심>을 가지고 말이지.
그러니 이런 종교적인 이야기도 가끔 들어 봐야 할 게다. 

오늘 첫 토요일 자습을 하고 왔구나.
고3때는 역시 대학 입시에 관심을 가지고,
다음 주 목요일에 치를 모의고사에 관심을 가지고,
네 성적과 실력에 관심을 가지는 일이 필요하겠다. 

삶은 늘 준비 안 된 상태에서 벌어지는 사태들의 연속이야.
그러나 그 상태에서도 지혜롭게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 또 인생의 묘미란다.
이제껏 편하게 살아온 민우야.
올해 더 지혜로워지는 한 해를 보내길 바랄게.
주말 즐겁고 힘차게 보내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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