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올라가지 전 마지막 휴가를 다녀오느라 며칠 쉬었구나.
이제 내일 3.1절 하루만 쉬면 본격적인 고3이다.
민우도 새로운 마음일 거라 생각한다.
그런 이야기가 있더구나.
농부가 밭을 가는데, 숙련된 농부가 간 밭은 똑바른데 비하여,
초보 농부는 삐뚤빼뚤 갈아놓았대.
초보가 숙련된 농부에게 비결을 물어 보았더니,
수십 년간 반복하다 보니, 밭을 갈 때 먼 곳의 소나무를 목표지점으로 삼아 간다는 것이었지.
이렇게 목표가 있는 사람은 똑바른 생활을 하는 데 더 힘들지 않은 법이란 이야기일 거야.
오늘은 지폐에 등장하는 인물 퇴계 이황의 '도산십이곡'이란 시조를 공부해 보자꾸나.
몇 번 '시조'는 '문자문학'이 아니라 '시조창'이란 노래란 이야기를 했을 것 같다.
도산십이곡은 '도산(陶山)'이란 지역의 십이 골짜기를 노래한 것으로,
이황이 만년에 후학 양성을 위하여 지은 '도산 서원' 주변의 자연을 노래한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요즘으로 치면 최고급 학원이었던 도산서원에 모인 서생들은,
멤버로 친다면 조선에서 내로라 하는 가문의 훌륭한 인재들일 거였어.
그 자부심도 대단했겠지.
조선시대에 '사대부'란,
군자의 도를 닦을 때는 '사'가 되고, 입신출세하여 이름을 떨치는 벼슬을 하면 '대부'가 되는 이였단다.
그 서원의 <교가>라고 보면 될 거야.
이 시조는 총 12수로 이뤄져 있는데,
앞의 6곡(전 6곡)은 <자연에 동화된 생활>을 그리고,
뒤의 6곡(후 6곡)은 <학문 수양 및 학문애(學問愛)>를 권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앞부분의 '자연에 동화된 생활을 하겠다는 의지'를 한자로 <지(志)>라고 부르고,
뒷부분의 '학문을 추구하는 생활을 하겠다는 내용'을 한자로 <학(學)>이라고 부른대.
<지>를 말한 부분은 <언지(言志) >, <학>을 일컬은 부분을 <언학(言學) >이라고도 하지.
이 노래는 문학적으로 볼 때에는 중국 문학을 차용한 곳이 많고,
생경한 한자어가 남용되어 높이 평가할 수는 없지만,
성리학의 대가의 작품이라는 점을 살펴보면,
시조의 출발이 유가(儒家)의 손에 있었고 그 성장 발전 역시 그들에 의하여 이룩되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노래야.
이황과 이이가 지폐에 새겨질 정도로 높이 알려진 이유는
조선은 군주제 국가인 <왕조>였고,
그 <왕조>를 떠받드는 이념적 기틀이 바로 <성리학적 질서>였는데,
중국의 <성리학>을 조선 지배 이념으로 학문적으로 높은 경지까지 연구한 사람들이 바로 이 두 사람이란 거야.
조선의 임금 입장에서는 엄청 중요한 사람들이었던 거지.
근데... 과연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그들이 뭘 해줬는지는... 글쎄다. 연구 과제구나. ^^
자, 그러면 조선 최고의 학원 도산서원의 교가를 1절부터 차근차근 읽어보자꾸나.
[1] 이런들 엇더하며 져런들 엇더하료
초야우생(草野愚生)이 이러타 엇더하료
하믈며 천석고황을 곳쳐 무슴하리.
이렇게 산들 어떠하며, 저렇게 산들 어떠한가
초야에 묻혀 사는 어리석은 서생이 이렇게 산들 어떠할 것인가.
하물며 자연을 몹시 사랑하는 병을 고쳐서 무엇하리
<자연 사랑>의 뜻(언지) 제 1장이야.
엇더하며, 엇더하료, 초야우생이, 엇더하료.
반복되는 구절을 표기해 보면 aaba 구조라고 볼 수 있지.
<천석고황>은 '샘물 천(泉)', '돌 석(石)'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슴 속 깊은 곳에 병이 되었다(고황)이라고 과장해서 표현하는 것이란다.
사대부가 세상으로 나아가는 입신출세를 하지 않더라도,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며 늘 기회를 기다리는 자세. 그것이 바로 '안빈낙도'이며 '안분지족'이지.
그러려면, 때를 만나 출세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할 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진인사대천명>의 자세가 필요하단다.
그러니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 자연 친화적 태도가 강조된 것이라 보면 될 거야.
2연을 보자.
[2] 연하(煙霞)에 집을 삼고 풍월로 벗을 삼아
태평성대(太平聖代)에 병으로 늘거가뇌
이 중에 바라는 일은 허믈이나 업고쟈.
안개와 놀을 집으로 삼고 풍월을 친구로 삼아
태평성대에 병으로 늙어가지만
이 중에 바라는 일은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나 없었으면...
역시 <안빈낙도>의 뜻(언지)을 드러낸 표현이지.
자연을 집으로 삼고 벗을 삼는다.
입신출세하면 세상 사람들이 '베프'가 되자고 난리를 치겠지?
그치만 화자는 아직 <세상에 나가지(출세)> 못했어.
그러니 자연을 벗을 삼을 수밖에.
세상은 평안한데, 병으로 늙게 되니 나이가 많아졌지.
그런데 희망 사항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살고 싶다는구나.

아직 입신출세하지 못한 선비가 <허물>이라면 어떤 것이겠니?
오직 출세를 위하여 인격적 수양을 게을리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지 못하고 출세를 위하여 안달복달하다가,
급기야 뇌물을 쓴다거나 과거 시험에 부정을 저지른다면 큰 <허물>이 되지 않을까?
아니면 허생전의 주인공처럼
마누라의 바가지에 못 이겨, 돈벌이에 나서서
선비의 고결함에 누를 끼치고 <장사치>의 비루함을 행하는 일도 <허물>이 될 거야.
돈에 연연하는 것을 '허물'로 친 허생이 변부자에게
"당신은 나를 장사치로 보는가?"하고 소리지른 말이 이런 맥락일 거야.
3연을 보자꾸나.
[3] 순풍(淳風)이 죽다하니 진실로 거즛말이
인성(人性)이 어지다하니 진실로 올흔말이
천하(天下)에 허다 영재(英才)를 소겨 말슴할까.
순수한 풍습이 줄어 없어지고 사람의 성품이 악하다고 하니 이것은 참으로 거짓이다.
인간의 성품은 본디부터 어질다고 하니 참으로 옳은 말이다.
천하에 슬기로운 사람(영재)을 속여서 말할 수 있을까?
순박한 풍조가 사라진다고 한다. 에이, 거짓말이겠지.
인간의 품성은 원래 어질다고 한다. 그래, 정말 옳은 말이야.
세상에 허다하게 많고 많은 영재를 속일 수 있겠어?
똑똑한 사람이라면 인간은 원래 <착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
세상이 험악한 것 같지만 <순박한 풍조>는 아직 남아 있대.
3연에선 자연 친화가 나오지 않지?
그렇지만, 아직까진 <언지>잖아. 화자의 뜻을 강조하는 부분.
인간의 품성은 원래 순박한 것이고, 어진 것이래. 성선설이지?
맹자가 4단을 이야기했어. '단(端)'은 '새싹의 뾰족한 끝'을 가리키는 말이야.
인간에겐 네 가지 싹수가 있다는 거지.
불쌍한 인간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나쁜 일을 싫어하는<수오> 마음.
좋은 일만 바라지 않고 겸손하게 <사양>하는 마음.
옳고 그른 일을 가릴 줄 아는<시비> 마음.
이런 새싹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해서 4단이라고 했고,
그것을 유교의 <인, 의, 예, 지>와 연결지어 생각하기도 했던 거란다.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이어받기도 했겠지.
부처님이 선배니 말이야. 선배의 좋은 점은 따라해야 하지 않겠어?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싹수>를 가지고 있단다.
그러니, 학교든 학원이든, 도산서원이든 그 싹수를 바탕으로 교육을 하는 거지.
[4] 유란(幽蘭)이 재곡(在谷)하니 자연이 듯디 죠해
백설(白雪)이 재산(在山)하니 자연이 보디 죠해
이 중에 피미일인(彼美一人)을 더옥 닛디 못하얘
그윽한 난초가 골짜기에 피어 있으니 듣기 좋아
흰눈이 산에 가득하니 자연이 보기 좋아
이 중에 저 아름다운 한 사람(임금)더욱 잊지 못하네
난초가 골짜기 가득 피었으면 그 향을 맡기(듣기) 좋고,
눈이 산에 가득 쌓였으면 그 경치가 보기 좋지.
이렇게 사는데도, 안분지족의 마음 속에 잊지 못하는 한 가지 뜻은,
바로 <그 아름다운 한 분>을 향한 사랑이란다.
조선의 성리학은 <왕조>의 이념이라고 했지?
결코 <어리석은 백성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자가 많아서> 훈민정음을 만든 게 아니란다.
왕조의 이념인 성리학을 백성에게 교육하기 위해서 훈민정음이 필요했던 거지.
그래서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열심히 찍어낸 책이
유교의 <바른생활 교과서>인 <소학>이었단다.
국어책에 <소학>과 <삼강행실도>가 실린 걸 배웠지?
정말 훈민정음이 어린 백성을 위한 거였다면,
열심히 번역, 출판했어야 하는 책은 '법전'이나 '의학서', '각종 증명서' 등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러니 성리학의 기본인 <뜻>을 드러내는 시에서
임금님(미인)이 빠질 수 없었겠지.

[5] 산전(山前)에 유대(有臺)하고 대하(臺下)애 유수(有水)ㅣ로다.
떼 많은 갈며기는 오명가명 하거든
엇더타 교교(皎皎) 백구(白鷗)는 멀리 마음 하는고
산 앞에 높은 대(낚시터)가 있고, 대 아래에 물이 흐르는구나.
떼를 지어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거든
어찌하여 희고 깨끗한 갈매기(어진 사람 - 현자)는 멀리 마음을 두는고
'대'는 절벽을 상상하면 돼.
부산에도 '태종대, 해운대, 이기대, 오륜대, 몰운대, 자성대' 등이 많잖아.
'대'는 높직한 곳이어서 절벽이나 동산 같은 뜻을 지닌다.
그 아래 물이 흐른대.
갈매기도 오락가락 하고 있는데,
어쩌자고 교교한 달밤에 갈매기는 마음을 멀리 두고 있을까? 이런 생각.
멋진 경치에 떼를지어 나는 갈매기들은 <일반 갈매기>야.
리처드 바크가 쓴 <갈매기의 꿈> 이야기를 아니?
여느 갈매기는 먹고 사는데 급급하지만,
오타쿠 갈매기가 한마리 있었다. 그 이름은 조나단 리빙스턴!
그는 날마다 더 폼나게 나는 법을 연구하지.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그는 혼자 연습에 몰두해.
아까도 이야기했듯,
갈매기 조나단은 <자신이 할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선비>의 자세와 통하는 것 같아.
진인사 대천명. 조나단에겐 진구사 대천명이겠지. ㅋ
갈매기 떼는 오명가명 날지만,
어찌하여 <교교 백구>는 멀리 마음을 두는 것일까? 이런 의미.
교교는 '달빛이 밝고 환하다'는 때 쓰는 '교교'하다~ 이런 거야.
<교교 백구>는 일반 선비떼와 구별되는 존재지.
그저 입신출세에만 눈먼 선비와는 달리,
멀리 마음 두는 선비.
조나단 리빙스턴처럼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말을 하려면,
마음 자체를 일반 갈매기들과는 다르게 먹는 자세가 필요하단다.
[6] 춘풍(春風)에 화만산(花萬山)하고 추야(秋夜)에 월만대(月萬臺)라
사시가흥(四時佳興)이 사람과 한가지라.
하믈며 어약연비(魚躍鳶飛) 운영천광(雲影天光)이야 어내 그지 이시리.
봄바람에 산에 꽃이 만발하고, 가을밤에 달이 대에 가득하다.
사계절의 흥취가 사람의 흥겨움과 같구나.
하물며 고기가 뛰고 소리개 날며 구름은 그림자 지고 빛이 가득하기 어느 하나인들 다함이 있겠는가.
자, 이제 <언지>, 즉 선비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마음가짐의 마지막 노래야.
앞의 다섯 곡을 요약하자면,
1. 안빈낙도하며 자연을 즐기고,
2. 선비로서 허물을 짓지 말고,
3. 성선설(인간의 가능성)을 의심치 말고,
4. 임금을 늘 생각하고,
5. 뜻을 멀리, 크게 두고...
6. ( )
이런 거야. 이제 6번을 채우자.
봄에는 산에 꽃이, 가을엔 누대에 달이 가득한 자연 친화적 풍광은 익숙한 거지?
자연의 아름다운 변화의 흥겨움은 인간 세계와 동일하대.
물고기, 솔개, 구름, 햇빛은 끝이 없을 거라는구나.
즉 자연이 그침이 없이 날마다 새롭게 생동감 넘치듯,
인간도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뜻이 담겼다 보면 되겠다.
위의 빈 칸에 채울 내용은?
(자연처럼 끝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를 가지자)는 권유가 되겠지.
자, 그럼, 이제 뒷부분의 여섯 수를 살펴 보자.
언학이라고 했으니, 공부합시다~ 이런 내용이겠지?
미리 생각해 보자.
퇴계 선생님은 무엇을 완성하신 분이라고 했지?
<왕조>의 이념적 기반인 <성리학>이야.
이황은 임금을 가르치려고 <성학십도>란 책도 썼단다.
성인의 학문을 가르치기 위한 열 장의 <그림>이야. 시청각 자료라 보면 되지.
성리학을 열 장의 파워포인트 자료에 정리한 책이라 보면 된단다.
참고로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는 성리학의 <요점을 모은> 요점 노트가 되겠지.
암튼, 성리학에 대한 탐구와 학문적 열정을 잊지 말자는 이야기가 앞으로 펼쳐질거야.
[7] 천운대 도라드러 완락재 소쇄(瀟灑)한듸
만권(萬卷) 생애(生涯)로 낙사(樂事)ㅣ 무궁(無窮)하얘라.
이 중에 왕래(往來) 풍류를 닐러 므슴할고
천운대를 돌아들어간 완락재는 깨끗한데
많은 책에 묻혀 사는 생활의 즐거움이 끝이 없구나
이런 중에 바깥을 거니는 재미를 말해서 무엇하랴
천운대는 높직한 '대'겠지. 완락재는 '별당'일 거야.
서재로 쓰는 건물이겠지. 근데, 거기가 <소쇄>하대.
'소쇄'는 아주 중요한 낱말이란다.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말인데,
한여름 무더위에 소나기가 한 줄금 뿌리고 간 뒤의 시원한 느낌, 이런 것이란다.
<소쇄>는 풍경뿐만 아니라, 정신적 경지까지도 일컬을 수 있을 거야.
왜 좋은 사람은 만나고 나면 마음이 상쾌해지잖아.
책을 만 권 읽었다니 과장법이다.
예전엔 책이 그렇게 많지 않았으니 말이야.
그렇지만 암튼 대단한 독서가란 이야기지.
즐거움이 끝없단다. 독서의 즐거움.
그런 즐거움 중에서도,
<왕래 풍류>는 말할 것도 없이 즐겁다는구나.
왕래는 <오고 가는 것>이지?
풍류는 자연 속에서 학문을 논하는 것일 거야.
책을 만 권 읽은 즐거움보다 더 큰 것은 <왕래 풍류>래.
아빠가 교지에 쓴 글 읽어 봤니?
공자가 말한 <멀리서 벗이 오니 즐겁지 아니한가?>하는 구절.
그 벗은 <학문적으로 토론이 가능한 벗>일거야.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 말이지.
혼자서 책읽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은 마음이 통하는 벗과 오가며 의견을 나누는 공부라는구나.
그래서 <서원>에서 함께 공부하는 일이 중요하겠지.
[8] 뇌정(雷霆)이 파산(破山)하여도 농자(聾者)는 못 듯나니
백일(白日)이 중천하야도 고자는 못 보나니
우리는 이목 총명(聰明) 남자로 농고같지 마로리
우뢰 소리가 산을 깨뜨릴 듯이 심하게 울어도 귀머거리는 못 듯네
밝은 해가 하늘 높이 올라도 눈 먼 사람은 보지 못하네
우리는 귀와 눈이 밝은 남자가 되어서 귀머거리와 봉사 같지 말리라
귀머거리는 천둥소리를 듣지 못하고, 맹인은 해를 보지 못한다.
우리는 이목이 밝은 남자이니, 귀머거리, 맹인처럼 살지는 말자는 이야기다.
자, 이 노래는 일반인들에게 들려주는 노래가 아니라고 했다.
왕조 조선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을 연구하는 <도산 서원>의 주제가인 만큼,
뻔하게 눈 앞에 보이는 <진리>인 성리학 연구를 반드시 해야한다는 강조일 것이다.
[9]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봇 뵈
고인을 못 뵈도 녀던 길 알페 잇네
녀던 길 알페 잇거든 아니 녀고 엇졀고
옛 어른(성인)도 나를 보지 못하고 나도 그분들을 못 보네
그러나 그분들이 행하던 길은 아직도 앞에 놓여 있네
그렇듯 올바른 길이 우리 앞에 있는데 그를 따르지 않고 어찌할고?
이 9연~11연이 시험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연들이다.
성인도 나를 못 봤고, 나도 성인을 만나진 못했지만,
그분들이 녀던(가던, 다니던) 길이 앞에 있다.
성인의 길이란 곧 <성리학적 길>인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는 것이 <성리학>이다.
요즘 이야기하는 <인문학>에 들어가는 문학, 역사, 철학 등이 다 포함된 것인데,
그 기본이 인간의 본성이란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순하고 선한데,
그 <어진 본성>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이 성리학이다.
극기복례(克己復禮)는 '자신만을 내세우는 이기심을 이겨내고, 예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논어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말은,
인간다움의 요체는 '사랑'인데, 사랑을 실천하는 길은 곧 자신을 절제하는 마음.
<제가 하기 싫어하는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정신이다.
공자의 말씀으로 비롯된 성리학적 올바름의 드러난 모습인 <예>를 행하는 일.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안다면,
<공자님이 행하신 길이 앞에 있으니, 나도 아니할 수 없다>는 반어적 질문이다.
안 가고 어쩌겠는가? 가야지. 당근.
성리학, 이거 참 좋은데~
뭐라 말로 설명할 수가 없네~.
좋다.
누구한테 좋다고? 남자한테? 노~~~
바로 임금한테 좋단 거야.
선비는 오로지 왕조를 지탱하기 위한 존재로서만 의미가 있다보면 될 거다.
[10 ] 당시(當時)에 녀던 길흘 몃 해를 버려 두고
어듸 가 다니다가 이제아 도라온고?
이제야 도라오나니 년 듸 마음 마로리.
그 때 뜻을 세우고 학문 수양에 힘쓰던 길을 몇 해씩이나 버려 두고
어디에 가서 무엇하다가 이제야 돌아왔는고?
이제라도 돌아왔으니 다른 곳에 마음 두지 말고 옛날에 하던 학문 수양하리라
퇴계는 젊어 등과하여 노년에야 고향으로 돌아온다.
안동의 '도산' 골짜기에 손수 설계한 집을 짓고,
도산서원이라 하였다.
현판을 쓴 이는 한석봉인데, 너무 쫄아서 질그릇 도 글자가 삐뚤어졌다는 농담도 있다.
학문 연구의 길을 버려두고 벼슬살이의 북새통에서 살다 왔다.
어디 돌아다니다 이제 돌아왔는가~ 이런 반성이 보인다.
이제 돌아왔으니, 년 듸(다른 데) 마음두지 말자! 이런 의지가 보인다.
다른 데 마음 쓰지 말고, 열공!!!하자는 의지가 불꽃을 튀긴다.
그 공부의 내용은 이제 알겠지?
바로 성리학이다. 조선 왕조의 기틀, 성리학.

[11] 청산(靑山)은 엇데하야 만고(萬古)애 프르르며,
유수(流水)는 엇데하야 주야(晝夜)애 긋디 아니하는고.
우리도 그치디 마라 만고상청(萬古常靑)호리라.
푸른 산은 어찌하여 영원히 푸르며
흐르는 물은 또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흐르는가
우리도 그치는 일이 없이, 언제까지나 푸르게 살리라
산은 맨날 푸르고, 물은 맨날 흐른다. 변치 않는 자연의 속성이다.
근데, 인간은 툭하면 공부를 스톱한다.
특히 일에 바쁘면 공부를 뒷전으로 미룬다.
그 공부는 바로? 성리학이지.
어떤 대기업에서 <일십백 운동>을 말한다고 하더구나.
초중고 대학에서 <일>을 배운 사람을,
기업에서는 <십>을 알도록 가르칠테니,
스스로 <백>을 공부해야 미래에 적합한 인재가 된다고 한다.
세상의 지식은 <네이버 지식in>에게 물어보면 다 나온다. 물론 쬐끔은 틀리지만 ㅋ
배가 아파도 네이버에 물어본다. 의사는? ㅋㅋ 나중에 확인차 물어보는 거고...
지식의 변화 속도가 엄청나다. 정보의 양은 메가톤급이다.
한 사람이 하나의 직업으로 평생 사는 시대가 가고 있다.
한 나라에서 사는 시대도 가고 있다.
그래서 요즘 맨날 나오는 말이 <자기 주도적 학습>이란다.
학교에서 아무리 열공해도, <1>밖에 못 배운다니 말이다.
회사에서 전문적 지식을 습득해도 <10>밖에 안 된다니 한숨난다.
평생 배워야할 <100>은 그야말로 스스로 학습하는 수밖에 없다.
변하지 말고, 그치지 말고, 꼿꼿하게 공부하는 자세를 버리지 말자는 의미의 시조를
책상 머리에 붙여두는 일도 좋을 듯 싶다.
[12] 우부(愚夫)도 알며 하거니 긔 아니 쉬운가?
성인도 못다 하시니 긔 아니 어려온가?
쉽거나 어렵거나 중에 늙는 줄을 몰래라.
어리석은 자도 알아서 행하니 학문의 길이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성인도 다하지 못하는 법이니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쉽든 어렵든 간에 학문을 닦는 생활 속에 늙는 줄을 모르겠노라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학문>인 성리학.
그건 바보도 안다. 알기는 쉽다.
그렇지만 공자도 못다 하셨다. 실천은 어렵다.
알기는 쉽고 실천은 어렵지만,
그 학문을 닦는 속에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그렇게 사는 것이 훌륭한 생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결국 <성리학>의 완성은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있다는 것이란다.
작년부터 발굽이 갈라진 동물에게 걸린다는 <구제역>이란 동물질병이 대유행을 했다.
그래서 그 병이 걸린 소와 돼지 등을 죽이는 <살처분> 명령이 내렸어.
근데, 소는 숫자가 적으니깐 한마리씩 죽여서 묻었는데,
돼지는 숫자가 너무 많으니까 구덩이를 파고 비닐을 깐 뒤
몇백 마리에서 천여 마리까지 생매장을 했단다.
요즘 그 참상을 담은 동영상이 떴는데, 정말 눈뜨고 보기 어렵더라.
문제는 그 담에 생겼어.
동물 사체에서 흘러나올 액체(침출수)를 모으기 위해서 비닐을 두 겹으로 까는 건데,
산 돼지를 무더기로 묻으니, 그 돼지들이 발버둥을 치면서 비닐을 다 찢었어.
원래 사체에서 나오는 물은 정화조에 모이도록 되어있는데, 비닐이 찢어지는 바람에
그 돼지들의 사체가 썩으면서 나오는 물이 지하수로 들어간 거야.
그 지하수를 펌프로 퍼올려 농업용수로 쓰던 농가들은
어느날 갑자기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물을 농작물에 뿌릴 수 없게 되었지.
그 물은 결국 식수로 사용하는 강물로까지 흘러들어가게 되었단다.
동물의 사체를 무더기로 묻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무도 뻔한 일을 대~~충 해 놓으니 당연히 이런 결과가 생긴 거야.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원인은 너무도 작은 것이었단다.
이렇게 세상 살이에서 중요한 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야.
<내가 알아야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책이 있었어.
성인의 말씀을 아는 것은 쉽다는 거지.
뭐, 세상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책이 있고,
다 따지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철학자들과 그 유파가 있단다.
그치만, 삶에서 중요한 것.
그런 철학적 태도는 어려운 게 아니란 거야.
문제는,
실천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 그런 거지.
이 노래는 16세기에 지어진 시조란다.
근데, 하나 살펴볼 게 있어.
18세기에 상당히 앞서나간 사상을 가졌던 박지원같은 사람도 한문으로 소설을 썼단다.
교과서에서 배운 <허생전>도 사실은 한문 원본을 번역한 거야.
그런데, 왕조의 성리학적 토대의 핵심 요원이던 퇴계 요원이 <시조>로 교가를 지어 부른 이유가 뭘까?
그 내용이 <도산십이곡 발>에 잘 적혀 있어.
'발'은 '창작 동기, 배경, 작가의 견해' 등을 적은 글이야.
읽고 설명해 볼게.
도산 노인은 평소에 음률을 이해하지 못하나, 세속의 음악은 싫어하였다.
그러나 노인은 한가롭게 병을 요양하던 중에 무릇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으면 시를 짓곤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시는 옛날의 시와는 달라서 읊기는 좋아도 노래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하여,
이를 노래로 부르려면 우리말로 지어야 되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음절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별이 지은 ‘육가’를 본을 삼아 ‘도산육곡’ 둘을 지으니,
그 첫째는 ‘지(志)’를 말한 것이고, 둘째는 ‘학(學)’을 말한 것이다.
이를 아침 저녁으로 아이들에게 익혀 부르게 하며, 의자에 기대어 듣기도 하려니와
또한 아이들이 스스로 노래하고 춤추게 하면 비루함과 인색함이 사라지고 마음이 감동하고 서로 통하여
노래 부르는 자와 듣는 자가 서로 이로움이 있을 것이다. <이황, 도산십이곡 발에서>
오늘의 시는 옛날의 시와는 달라서 읊을 수는 있겠으나, 노래하기에는 어렵게 되었다.
이제 만일에 노래를 부른다면 반드시 이속(俚俗)의 말로써 지어야 할 것이니,
이는 대체로 우리 국속(國俗)의 음절이 그렇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일찍이 이별의 노래를 대략 모방하여 ‘도산 육곡’을 지은 것이 둘이니,
기 일(其 一)에는 ‘지(志)’를 말하였고, 기 이(其二)에는 ‘학(學)’을 말하였다.
아이들로 하여금 조석(朝夕)으로 이를 연습하여 노래를 부르게 하고는 궤(几)를 비겨 듣기도 하려니와,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래를 부르는 한편 스스로 무도를 한다면
거의 비린(鄙吝)을 씻고 감발(感發)하고 융통(融通)할 바 있어서,
가자(歌者)와 청자(廳者)가 서로 자익(資益)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이 시를 창작한 배경을 알 수 있는 자료야.
도산 노인(이황)은 우선 세속의 음악과 지금의 한시와 다른 노래를 짓고자 했대.
그리고 아이들로 하여금 이 노래를 불러 ‘지(志)’와 ‘학(學)’을 깨닫게 하고자 하는
후학 양성의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어.
또한 아이들이 밤낮으로 이 노래를 통해 정신 수양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지었으며,
나아가 이 노래를 듣는 자도 부른 자와 같은 마음이 일어나도록 유도했다고 그래.
우리 나라의 음률에 적합한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한 것이지.
결국 이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 속에 <내면화>되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을지,
생각해 보면 이 노래의 주제를 알 수 있단다.
내가 몇 번 반복해서 이야기한 것처럼
<언지>에서 선비의 바람직한 삶의 자세를,
<언학>에서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탐구의 자세를 가르치려 한 것이겠지.
이렇게 노래는 그 시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란다.
요즘 노래들이 '가벼운 만남과 헤어짐'을 노랫말에 담고 있다면,
시대가 그렇게 변하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
자, 이제 바쁜 학기초가 되겠구나.
민우도 마음을 잘 가다듬고 새학기를 맞기 바란다.
곧 겨울눈을 찢는 아픔을 겪고 새싹과 봄꽃들이 치열하게 돋아날 것이다.
그 꽃들을 보면서 삶의 원리도 곰곰 생각해 보는 봄을 맞기 바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