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같이 차 타고 가는데,
창밖에 봄이 온 것처럼 온 세상이 환하더구나.
나무는 아직 새카맣게 보이지만,
지난 토요일이 雨水였단다.
더이상 눈이 오지 않고 비가 온다는,
얼어붙은 대동강(패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 

바야흐로 봄이다.
곧 화창한 햇빛과 함께 꽃들이 홍수처럼 밀려올 것이다.
동양 철학에서 봄을 '태양'의 계절이라고 한단다.
여름을 '소양'이라고 하고.
여름이 '양'의 기운이 더 많아보이지만, 사실은 봄이 더 많대.
여름은 이제 시들어 가는 거지. 

사람이 패기있고 의욕적인 시절도 생각해보면 꽃피기 전인 너희때가 아닐까 싶어.
아직 무엇이든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말이다.
오늘은 성실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김동환의 '북청 물장수'는 읽는 맛이 상큼한 시란다.
마치 봄냄새가 가득한 냉잇국을 후루룩 마시는 기분이야.
한번 읽어 보렴.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 물을 솨-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린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김동환, 북청 물장수>

수돗물이 일반화되기 이전.
도시엔 이렇게 물장수가 많았단다.
매일 물을 길어다 넣어 주고 얼마를 받았겠지. 
그들은 어머니들이 아침에 밥하기 전에 물을 부어주고 가야했을 테니,
얼마나 부지런했겠니. 

새벽마다 꿈이 아직 현실로 넘어오기도 전에,
솨~ 찬물을 붓고 가는 물장수.
그가 사라질 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이유는 뭘까?
물장수가 멀어져가는 걸 생각하면서 그의 발걸음이 내 가슴을 디디고 가는 건,
그이의 물 붓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일 거야.
화자의 애정이 잘 담겨 있지.  

북청 사람들 중에 서울 지역에 물을 대주는 이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청신(맑고 신선한)한 새벽의 분위기를 전해주는 사람들이지.

'물에 젖은 꿈'은 새벽의 신선한 분위기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거야.
아직 잠이 덜 깬 이른 새벽에 물을 날라다 붓는 물장수에 대한 화자의 애정이 담긴 표현이지.
마지막 연에서 날마다 기다려진다고 하여 애정이 더 강조되고 있단다. 

주제는 '북청 물장수에 대한 신선한 감각과 그리움' 정도가 될 거야.
무슨 일을 하든 즐겁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일을 맡겨도 힘들다며 핑계로 일관하는 투덜이도 있단다.
북청 물장수는 비록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일을 하진 않지만,
오히려 험한 일이기도 하지만,
신이 나서 흥겹게 일을 하는 멋진 사람으로 보이는구나.
시인 김동환은 '국경의 밤'이란 서사시로 유명한 사람이다. 
다음에 더 살펴볼 기회가 있을 거야. 

제 고향 떠나 서울에서 물장수 하는 북청(함경남도 동해안) 사람들의 외로움도 컸을 것이다.
그렇지만 김동환의 시에서는 서글서글 일 잘하는 그들의 모습이 유쾌하게 그려졌다.
다음엔 고향을 잃고 외로워하는 김소월의 시를 몇 편 보자.

물로 사흘 배 사흘
먼 삼천리(三千里)
더더구나 걸어 넘는 먼 삼천리(三千里)
삭주구성(朔州龜城)은 산(山)을 넘은 육천리(六千里)요

물 맞아 함빡히 젖은 제비도
가다가 비에 걸려 오노랍니다
저녁에는 높은 산(山)
밤에 높은 산(山)

삭주구성(朔州龜城)은 산(山) 넘어
먼 육천리(六千里)
가끔가끔 꿈에는 사오천리(四五千里)
가다오다 돌아오는 길이겠지요

서로 떠난 몸이길래 몸이 그리워
님을 둔 곳이길래 곳이 그리워
못 보았소 새들도 집이 그리워
남북(南北)으로 오며 가며 아니 합디까

들 끝에 날아가는 나는 구름은
밤쯤은 어디 바로 가 있을 텐고
삭주구성(朔州龜城)은 산(山) 넘어
먼 육천리(六千里) <김소월, 삭주구성(朔州龜城)>

삭주 구성은 평안북도 군청 소재지로  화자가 가고 싶고 그리워하는 공간이란다.
화자의 고향인 모양이지.

1연은 고향 삭주구성의 멂을 표현한 것이다.
화자가 가기엔 너무 먼 거리감이 생생하지.

2연의 '물 맞아 함빡히 젖은 제비'는
고향엘 가다가 비에 걸려 돌아오더라는 이야기를 끌어들이고 있다.
자신의 처지도 비 만나 고향에 못 가는 제비와 같다는 것이지. 동병상련.
제비는 비 만나 못 가고,
화자는 높은 산(山), 높은 산(山) 때문에 못 가고... 

3연에서는 6천 리 거리를 가지 못하지만,
가끔 꿈에는 4,5천 리라도 가다 오곤 한다는 이야기.

4연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절실함을 노래하고 있다.
'새들'도 집이 그리워 오며 가며 하더라마는
인간인 화자는 집이 그리워도 오갈 수 없는 아쉬움. 

5연에선 '구름'도 밤엔 고향 가까이 어디쯤 갈 수 있을 테지만,
내 고향 삭주구성은 산이 가로막은 먼 육천 리... 거기 있어 가지 못한다는 아쉬움 가득.
한국은 제주에서 백두산까지가 3천 리밖에 안 되는데,
육천 리라고 표현한 것은 <심정적 거리감>이 그만큼 크다는 이야기겠다.

이 시도 소리내어 읽어 보면 7.5조의 운율감이 느껴지는 부분도 많단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에서도 그런 운율을 찾은 적 있지.
일제 강점기엔 당연히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동환의 '산너머 남촌에는'을 보면, 7.5조가 확연히 드러난단다.
소리내어 운율만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1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南)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제 나는 좋데나.

2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제 나는 좋데나.

3
산 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 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재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었다 이어오는 가는 노래는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네. <김동환, 산너머 남촌에는>

잃어버린 고향은 <산너머 남촌>이란 이상향으로 소생했다.
7.5조의 운율과 함께 희망차고 활기 넘치는 산너머 남촌이 멋진 그림으로 살아오는 시다.  

다음엔 김소월의 '나그네' 설움을 읽어 보자. '길'이란 유명한 시다.

어제도 하룻밤
나그네 길에
까마귀 까악까악 울며 새었소.

오늘은
또 몇십리
어디로 갈까.

산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말 마소 내 집도
정주 곽산
차 가고 배 가는 곳이라오.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가?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십자 복판에 내가 섰소.

갈래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김소월, 길>

1연에서 ‘어제도’라고 표현하여 유랑생활이 계속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구나.
3,4연까지는 차가고 배가는 내 고향엘 나는 못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그네의 설움. 

그러다 올려본 하늘엔,
기러기가 잘 가고 있다.
공중엔 길 있어 잘 가는가?
아, 얼마나 고향엘 가고 싶으면 고향 가는 기러기가 저리도 부러울까.  

6연에서 기러기에게 아예 하소연을 한다.
당신은 고향엘 그리도 잘 가지만,
나는 열십자 복판에 섰소.
열십자는 4거리잖아. 어디로 가야할지 나는 모르겠다는 이야기지.
고향엘 가지 못하는 외로움.
이런 부조리가 어디 있겠니?
그렇지만 식민지와 도시화는 사람을 부조리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 일쑤였단다.

마지막 연에서 <갈래갈래 갈린 길 길~>에서는 같은 음운이 반복되면서 재미를 주는 곳이지.
갈래갈래 갈린 길이 저렇게 많지만,
내가 갈 길은 바이(전혀) 없다는 절망적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어.

이 시의 운율 역시 7.5조라고 볼 수도 있고, 3음보로 볼 수도 있단다.
갈 고향 잃은 화자의 서러운 처지를 하소연하는 문체로 표현하고 있지.
김소월이 이렇게 '나라 잃은 민족 전체의 비애어린 삶'을 주제의식으로 표출한 시는 제법 된단다.
'엄마야 누나야'도 그렇고, 문학 교과서에 실렸던 '초혼'도 그렇게 볼 수 있지. 

박목월의 '나그네' 역시 이런 유랑민의 허전한 마음을 그린 시로 보기도 한단다.
나그네는 다음에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초혼'을 한번 읽고 마치기로 하자.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김소월, 초혼(招魂)>

이 시는 한 연을 4행으로 가지런하게 배열한 단정한 시다.
혼을 부르는 '고복 의식'이 드러나 있지.
망자의 혼을 세 번 부르는 것은 절절한 그리움과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1연에서 <이름이여!>를 네 번이나 반복하고 있구나.
간절하게 고인을 부르는 소리로 '초혼제'의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부서진 이름', '헤어진 이름', '주인없는 이름'
이런 것으로 고인이 된 당신을 상정하고,
'부르다가 내가 죽을 것 같은 이름'으로 화자의 아픈 마음을 표현했다.  

슬픔이 전혀 절제되지 않고 있지.
슬픔이 절절하게 표출되고 있어서 화자의 절규가 잘 드러나는 시란다. 

2연에선 끝끝내 마저하지 못한 한 마디 말을 외친다.
'사랑했다고' '사랑했다고...'  

3연의 '서산 마루에 걸린 붉은 해'는 <하강>의 이미지를 갖는다.
죽음의 시는 이렇게 <하강>의 이미지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단다.
사슴도 슬피 우는 것은 <감정 이입>이 되겠다.
사슴은 그저 우는 것이지만, 화자가 슬프니 이입된 감정이지.
'떨어져나가 앉은 산'이 화자의 현재 위치다.
무덤 가에 갔는지도 모르겠구나.
거기서 목놓아 그대를 부른다. 

4연의 설움에 겹도록 부르는 소리가 반복되는 것 역시
복받친 감정이 거칠게 여과되지 않고 그대로 표출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대를 부르는 소리는 그대에게 가지 못하고 비껴간다.(빗나간다.)
나는 여기 땅에서 그대를 부르고,
그대는 거기 하늘에 있는가?
그 사이가 너무 넓다는 건, 그만큼 거리감을 실감한다는 이야기다. 

5연에서 망부석 설화처럼 '슬픔이 응결'되어 <돌>이 될지라도,
나는 절절하게 그대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사랑했다고, 진정 사랑했노라고... 

죽은 임에 대한 사랑의 노래이기도 한 이 시는,
망해버린 조국에 대한 애국의 노래일 수도 있단다.

이 시에서 <죽음>은 혼백이 사라짐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화자는 사랑한다는 말을 못해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을
그대가 돌아오면 들려주고 싶다는 절규로 소리친다.
물론 그 소리는 그대에게 갈 수 없다.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어 그런가. 비껴갈 뿐이다.

이 시에서 그려진 고복 의식, 곧 '초혼(招魂)'이라 불리는 이 의식은
사람의 죽음이 곧 혼의 떠남이라는 믿음에 근거하여 이미 떠난 혼을 불러들여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려는 간절한 소망이 의례화된 것으로서,
사람이 죽은 직후에 그 사람이 생시에 입던 저고리를 왼손에 들고
지붕이나 마당에서 북쪽을 향해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즉, 초혼은 죽은 사람을 재생시키려는 의지를 표현한 일종의 '부름의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의 운율 역시 3음보로 이뤄져 있지만,
격렬한 감정이 표현되는 구절은 2음보로 이뤄져 있기도 해서 감정에 충실하고 있다. 

현대인은 모두 고향을 잃은 존재라고들 하더라마는,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있는 곳이 모두 고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란다.
어린 시절에 오래오래 한 곳에서 살면 평생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있을 수 있겠지만,
유목민처럼 고향이란 것이 마음에 없더라도 평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도 있는 일이지. 

다만, 유목민의 생활에선 더욱 에티켓과 명확한 이해타산이 계산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수십 년을 바라봐서 말하지 않아도 아는 농경 부족의 습관보다는,
매순간 새로 만나 정확한 표현이 발달한 유목 부족의 습관이 유리할 때도 많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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