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들 민우야.
바야흐로 봄이 오는구나.
이제 너는 학교로서는 최고 학년인 고3이 될 순서고.
이제까지 학교를 11년간 다닌다고 고생 많았다. 

마지막 한 해를 정말 성실하게 잘 보내길 바란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지난 19년간 참 여러 번 이야기했을 것 같구나.
한국 사회가 열린 사회라면 아빠가 시 특강을 했을 때,
그렇게 부정적 현실에 대한 저항 이야기도 많이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 밝지만은 않기 때문에,
또,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진다고 그것이 손쉽게 이뤄지지 않는 시대기 때문에,
너희는 한층 고민이 많은 시대를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삶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
이것은 인류가 존속하는 한, 최대한의 공통적인 의견이 아닐까 해.
나는 어디쯤 와서 살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디로 갈 건지...
이런 것이 철학이고,
그것이 바로 고전이고, 문학이고,
결국, 책에 쓰인 것은 다들 그런 것들이란다. 

오늘은 자신의 삶을 돌아본 시들을 몇 편 소개할게.
우선, 시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본 김광균의 '노신'을 읽어 보자.

시(詩)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기적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 것의 베갯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오장을 씻어 내린다.
노신(魯迅)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 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上海) 호마로(胡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거린다.
여기 하나의 상심(傷心)한 사람이 있다. <김광균, 노신>

'노신'은 중국어로 '루쉰'이라고 읽는다.
루쉰은 중국의 정신적 스승으로 일컬어지던 분이다.
중국이 일본에 패망하던 어렵던 시절,
꼿꼿한 정신으로 중국인의 멍청한 정신 상태를 꾸짖던 분이기 때문이지.
루쉰의 소설로 "아큐정전"이란 작품이 있다.
'아큐'란 바보는 늘 '과거에 나는 잘났던 인물이야. 우리 집안은 대단한 집안이지.'이렇게 착각을 일삼는 놈이지.
얻어맞으면서도 '나는 똥이야. 나를 때린 저놈은 똥을 때린 거지.' 이렇게,
바보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정신적 승리>라며 좋아하던 바보란다.  

근대 중국이 그랬다는 비유지.
마치 조선이 왜구에 불과하던 일본이 통일국가가 된 후 서구 문물을 받아 들이고,
급기야 조선과 중국을 침범하는데도,
왜놈들, 쪽바리들, 이러면서 무시하기만 하다가 망해버린 것을 꾸짖는 거야. 

화자 김광균은 젊은 나이로 '시인'이란 직업이 못마땅하다.
가족을 먹여살리기도 어렵기 때문이지
서른 먹은 화자는 <시를 믿고 살기 어려워서> 잠을 못 잔다고 그래. 

멀리 기차의 기적소리 들리고,
아내와 어린 아기는 잠이 들었는데, 창밖엔 눈이라도 쌓이나 봐. 

시인이란 사람은,
어디 잡지사 같은 데서 책을 만드는 일을 도와주며 살겠지.
근데, 그 일이 그닥 쉽지만은 않구나. 

무수히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이런 구절에서 보면, 먹고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이 나지 않니?
실제로 뺨을 얻어 맞거나, 돌팔매를 맞은 것은 아니겠지만,
먹고 산다는 것.
그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일제 시대에 말이지. 

그래서 혼자 등불을 켜고 일어나고, 담배를 피워 물어.
그건 내적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는 과정이지.
혼자서 온갖 고민을 다 하는 거야.
가족을 먹여살리기 어려운 가장의 비애. 그런 거. 
그러노라면, 쓸쓸한 고뇌로 오장육부,
창자를 쓸어내리는 고통이 느껴지지. 

그런 고통스런 밤이면,
중국의 '루쉰'을 떠올리게 된다는 거야.

온 세계가 제국주의의 고통으로 울고 있는 시절.
상하이의 '호마로' 어느 뒷골목에서
루쉰은 홀로 쓸쓸히 등불 아래서 시를 썼겠지.
물론,
고통스런 마음으로 가득한 삶이었겠고 말이야. 

그러면,
마치
루쉰이 나에게 속삭거리듯,
등불아래서 그이의 목소리를 듣는 듯,
혼자서 이런 느낌을 갖게 된단다. 

"여기 하나의 상심(傷心)한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옛날 중국에서 근대화를 위하여 고통을 이기며 견뎌냈다.
너는 지금
한반도의 어려움 속에서 시인으로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의 어려움처럼
너의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 
나도 상심했었으나 이겨냈든, 너도 상심을 이겨내기 바란다. 

이런 동병상련의 마음을,
거기서 얻는 힘을 나타낸 시가 바로 <노신>이리라. 

시인 김광균이 가족을 부양하기도 힘든 상황을 당했던 거 같다.
그 때,
중국의 힘겹던 세월을 부득부득 이겨낸 '루쉰'을 생각하며
힘겨운 세월을 이겨낸 화자의 심정을 잘 나타낸 시로 보인다. 

이번에도 먹고 살기 위하여 교사라는 직업을 택한 어떤 시인의 시를 읽어보자.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정희성, 길>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지낸 세대는
자식이 떵떵거리는 권력을 가지거나 적어도 지식인으로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처럼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국가에서
4년제 대학은 무조건 보내야 한다는 통념이 생겼을 것이다. 

자식이 공부를 잘 하는 경우에,
부모는 자식이 법관이 되거나, 좋은 대학을 나와서 여러 친구와 함께 사업을 하길 바랐던 것이 흔했다.
돈없는 사람도 높은 권력을 잡기 쉬운 것이 법관이었고,
돈만 많이 벌면 또 세상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화자는 어쩌다 보니,
국문과를 가서 시를 읽고 쓰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국어 선생이 되어
높은 권력자가 되지도 못했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되지도 못했다.

아니, 거꾸로 나이 마흔이 되었는데도 아직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던 시절.
옆 자리에 누워 자는 아내도 화자의 처지를 비웃는다.
참 삶은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화자가 서러운 것은
법관이 되거나 돈을 못 벌어서만은 아니다.
화자가 미친듯이 공부를 했으면 법관이 되었을 수도 있고,
화자가 미친듯이 사업을 했으면 돈을 벌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화자의 현실에서 서러운 일은,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니?
세계에서 '행복 지수'를 따져 보면,
가난한 나라가 '행복'을 느끼는 경우가 많단다.
방글라데시는 최빈국 중의 하나지만, 늘 행복은 최고 지수를 얻곤 하지.
그건, 모두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함이 멸시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한국도 전쟁 이후가 지금보다 더 행복한 세대였는지 몰라. 

지금 한국은 세계에서 '자살률 1위, 출산저하율 1위' 이런 불행한 국가거든. 
행복하지 않은 거지. 죽고 싶고, 자손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세상.
어떻게든 세상 사는 일에 적응하는 일에 길들지 않은 화자에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고,
노엽다는구나. 

화가 날 수밖에 없지 않겠니?
그래서 아내에게 말한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아내에게, 울지 마라.
법적으로 잘못하지 않고,
그저 평범한 교사로 살고 싶은 게 화자의 꿈이지만,
그렇게 살기 참 어렵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옳은 것을 옳다고 가르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면, 감방엘 가던 시절이 한국에선 먼 과거가 아니었거든. 

그래도 화자는 마음은 단단히 먹는다.
어쩌겠는가.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서,
화자의 마음을 비겁한 곳으로 돌리려 해도,
화자는 꼿꼿한 마음으로.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시야.  

제목인 '길'은 '인생'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지.
이 시의 화자에게 '길'은
교사로서의 '인생'이었다고 보면 될 거야.
아빠도 그렇지만, 옛날 시절의 선생님은,
꼿꼿한 정신의 상징처럼 여겨졌단다.
절대로 더러운 일에 공감하지 않는 선비 정신을 가진 존재.
큰 돈을 벌러 떠났다면 그 뜻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을,
아이들과 이런 저런 일로 소일하는 것을 낙으로 삼아,
권력도 돈도 손에서 놓친 사람들. 그런 존재. 

그래서 선생님들의 삶은 어쩌면 권력도 돈도 놓쳐버린 패배자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아빠는 아직도, 교사가 가져야 하는 자존심 하나를 믿고,
어리석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 시가 바로 '길'이란 시야.
아빠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한단다. 

민우가 어떤 삶을 살지 모르지만,
아빠는 나의 살아온 길에 대하여, 나름대로 만족한다.
시대를 잘 만나, 먹고 살 만하고, 아빠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말이야.
물론, 정말 아이들과 즐겁게 수업하고 열정적인 교육활동을 펴기엔 학교가 답답한 구석도 있지만,
아빠가 살아온 삶에 대하여 아빠는 나름의 자존심과 행복을 느끼고 있거든. 

세상은 남의 눈으로 보는 게 아닌 거 같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것.
그것만큼 아름다운 일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아빠는 나이가 들수록 자주 하게 된단다.
다음엔 박재삼의 <흥부 부부상>을 읽어 보자꾸나.
아빠가 하던 이야기와 상통하는 주제를 담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흥부 부부가 박덩이를 사이하고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헤아려 보라.
금이 문제리.
황금 벼이삭이 문제리.
웃음의 물살이 반짝이며 정갈하던
그것이 확실히 문제다.

욕심이 없는 웃음의 아름다움
없는 떡방아 소리도
있는 듯이 들어내고
손발 닳은 처지끼리
같이 웃어 비추던 거울면들아.

가난 속에서도 서로 위로하던 웃음
웃다가 서로 불쌍해
서로 구슬을 나누었으리.
그러다 금시
절로 면에 온 구슬까지를 서로 부끄리며
먼 물살이 가다가 소스라쳐 반짝이듯
서로 소스라쳐
본웃음 물살을 지었다고 헤아려 보라.
그것은 확실히 문제다. <박재삼, 흥부 부부상>

자, 여기서 흥부 부부는 어떤 존재로 거론되냐면 말야.
엄청 가난한 사람들이잖아. 그치?
근데... 그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는 말이지. 

가난한데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가난하다고 이야기하는 건,
글쎄, 과연 어떤 것이 부유한 거고, 어떤 것이 가난한 건지 생각해 봐야 한단 거야. 

엄마 아빠가 어리던 시절, 한국은 전쟁을 겪고 난 후였단다.
그래서 유엔의 원조도 받고, 거지같이 살던 시대였어.
새옷을 사입기도 힘들고, 학교도 제대로 다니기 힘들었지.
돈이 없으면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기 어려웠단다.  

이 시에서 흥부 부부가 박을 가르기 전,
그 상황을 생각해 보자고 한다. 

흥부 부부가 왜 박을 가르려 했지?
제비가 <보은표>, 곧 은혜를 갚는 박씨(報恩瓢)를 가져다 줬고,
그 박이 쑥쑥 자랐고,
근데, 배가 고파 죽겠고,
박 속이나 파서 죽이나 쒀 먹자고 켠 거거든. 

근데,
흥부 부부가 박덩이를 사이하고,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생각해 보래. 

그건, 배가 아무리 고파도,
부부 사이의 정,
초코파이 없이도 다사롭게 나눌 수 있는 정에 대한 이야기잖아.
그건, <금 덩어리>나 <황금 벼이삭>같은 금전적 문제를 초월한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단다.
흥부 부부가 <웃음의 물살이 깨끗하게 반짝이던 그것>이 중요하다는 거지. 

앞의 <황금 벼이삭이 문제랴>는
돈이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고,
뒤의 <확실히 문제다>는
믿고 사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는 이야기지.
똑같은 <문제>란 단어도,
앞의 것은 '노 프라블럼'이고, 뒤의 것은 '썸씽 굿'이란 이야기야. 

이 정도 했으면 2연은 그냥 휘리릭~~~ 넘어간다.
욕심없어도, 아름답다.
노 프라블럼.
가난해서
떡방아 찛을 것 없는 집(백결 선생 전설도 있잖아.)도
방아 찧을 것도 없는 집에서 거문고로 둥~더덩~ 울리는 음악도
곡식 있는 듯이 들어 주고 말이지,
손발 닳게 고생하던 사람들도,
같이 웃으며 서로 빤히 사정 알던,
거울에 비친 것처럼 사정을 뻔히 알던 사람들끼리
더 가지고 못 가진 것에 대하여 자랑할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던 것처럼,
노 프라블럼!!! 

언더스탠드???
이런 생황이 이해가 가니? 

가난한 사람들끼리 서로 위로하던 웃음,
동병상련의 처지.
웃다가
서로 불쌍한 맘에
서로 눈물을 나눴겠지.
그 눈물은? 뭐로 비유되었다고? 그래. 구슬. 

이 흥부 부부는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사람일까?
그건 아니겠지?
흥부 부부는 가난해서, 먹을 게 없어서 박을 탔던 사람들이었으니 말이야.
그들이 추구했던 행복은, 바로 <정신적인 것>이었겠다. 

그러다 금시
절로 면에 온 구슬까지를 서로 부끄리며
먼 물살이 가다가 소스라쳐 반짝이듯
서로 소스라쳐
본웃음 물살을 지었다고 헤아려 보라. 

이런 부분을 읽어 보면, 히야~ 시인은 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독심술사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둘이서 박을 타다가 서로 하도 불쌍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치자.
그러다가 금세,
두 부부의 얼굴에 맞닿은 눈물을 느끼고는,
서로 부끄러워하여
물살들이 서로 부딪혀서 반짝이는 빛을 내듯,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가난하지만,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웃음을 짓는 그 웃음,
그 본웃음의 물살.
그런 흥부 부부의 웃음의 물살을 생각해 보자. 

가난하지만,
서로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는 사랑의 마음들이 지어내는
본웃음 물살. 
이것이야말로 <확실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확실한 문제>는
삶의 의미,
과연 부유한 삶만이 삶일까?
이런 <삶의 의의>를 따지는 시가 이 시가 되는 것이다. 

이 시가 탄생했던 1960년대는 참 가난했던 시대였다.
유엔의 원조를 받던 시대.
그렇지만, 그 가난했던 시대의 가족은 <흥부 부부>처럼 <행복>을 느끼기도 했던 것이고,
정말 가난하다고 해서 <행복>을 모르겠는가? 하면서 삶의 의의를 나누던 시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예전 어떤 싹퉁바가지 없던 광고처럼,
당신이 어떤 아파트에 사는가가 당신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가난을 무능력으로 취급하던 시대는 아니었던 거다.
이 시의 주제는 바로 <가난한 삶의 애환과 소박한 행복, 가난한 삶의 애환과 그 정신적 극복.
정신적 행복을 추구하는 소박한 인간상> 이런 것들이었다고 보인다. 

민우야.
세상은 참 복잡하고 끝없이 가지가 많아 보인다.
그걸 누구랑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답도 여러 가지일 것 같구나. 

나는 행복하다, 아니다를 혼자서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늘 주변 사람들과 얽히고 설킨 속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미치고 싶었을까? 

아빠는 만약에 내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다면,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많단다.
그 때는, 독립 투사가 되기보다는 아마도 정신병자가 되었을지 모른단 생각을 해봤어.
그런 시대적 상황을 글로 쓴 사람이 아마도
'이 상'이란 작가가 아니었나 싶다. 

그는 '김해경'이란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이상' 곧, 이상한 놈, '싸이코'란 별명을 쓴 거잖아.
지금은 '정지훈'이가 '비'란 이름을 써도 문제가 없지만,
80년 전에 <싸이>란 이름을 쓴 '이상'은 확실히 <문제 작가>임에 틀림 없었지. 

니네가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하다고 하는 지 몰라도,
나는 일제 강점기에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 모르겠다~ 얼라리요~ 헐~
이런 시가 바로 <오감도>란 생각이 들어.
우선 <오감도의 1호>를 한번 읽어 보자꾸나.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 오감도- 시 제1호> 

이 시는 절대로! 수능에 날 수 없는 문제란다.
해석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지. 

그렇지만, 이상이 왜 이런 시를 썼을지는 상상해 볼 수 있지 않겠니?
그 시대의 문제작이었으니 말이야.
이상이 이런 시를 쓴 것은,
확실히 그것은 <문제>였거든.  

<오감도>란 어휘는 한국어에 없단다.
<조감도>는 있지.
새가 하늘에서 <부감 : 날면서 내려다 보기>하는 듯 그린 그림을 <조감도>라고 그래.
그럼, 오감도는?
언어 유희일 수 있어.  

너희 인간 사는 세상?
족까지 말라고 해~ ㅋ
니들이 알긴 뭘 알아? 

일본 넘들? 조선을 먹었다고?
니들도 족까지 마~ 일본은 뭐, 만 년 간대니?
이렇게 하늘서 내려다본 새의 시선에서 인간 세상의 미약함을 비웃는 시선이었는지도 모르지.
근데, 왜 <조감도>를 <오감도>로 바꿨냐고? 

아, 일본 넘들도 <조감도>는 뭔가 하느님의 시선이잖아.
그러면, 일본 넘들을 비판하는 <하느님의 뜻>일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러니깐, 새 조(鳥)자에서 작대기 하나 떼고, 까마귀 오(烏)자를 쓰면
뭐, 무슨 뜻인지 설명할 필요도 없잖아.
미친갱이란 뜻의 <싸이코>란 이름으론 도저히 방송에 출연이 불가하니깐, <싸이>라고 쓴 넘이 부른 노래 알아?
<완전히 새 됐어>거든.
원래 <완전히 좆됐어>라고 욕으로 노랠 만들었는데,
그럼 당연히 방송 불가거든.
그래서, '새 조'자를 응용해서,
<완전히 새 됐어>로 바꿔서 성공했지. 

천재 시인 <이 상>을 그대로 본딴 것이
'싸 군'의 '오나전 새 됐어'야.
시대는 바뀌었지만, 아이디어는 같지. 

이 시에서 13인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 하는 이가 많아.
그치만, 13일의 금요일이 예수가 죽었다는 이도 있고,
제목의 <까마귀 오>자와 연계하여 불길하다는 이도 있고 그래.
사실,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ㅋㅋ 
아마, 세상 사람들아,
엿 드실래요? 이런 의미였는지도 몰라. 

이 시에서 생각할 점은
<무서운 아해>야. 

자, '무서운 아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건, <무섭게 보이는 아이>란 뜻과, <무서워 하는 아이>란 뜻으로 볼 수 있어.
중의적이지.
이 13인의 아해는 무서워 보이는 아이기도 하고,
무서워 하는 아이기도 해. 

자, 오감도.
조감도야.
하느님의 시선에서, 즉,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니,
세상은 참 요지경이지. 웃기거든. 

일본 넘들이 조선 넘들을 잡아 먹고 아웅다웅 하고,
조선 넘들 중에도 일본넘 앞잡이들이 동족을 괴롭히고 그런단 말이지.
웃기지 않겠어? 하느님 입장에서? 

조선 넘이 조선 넘을 괴롭히고,
조선 넘이 조선 넘을 무서워하고 말이지.
'무섭게 보이는 넘'이 곧 '무서워 하는 넘'이고 말이야.
이건 뭐,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란다.
국가 간의 관계나, 인간 간의 관계나 똑같고, 다 다르지. 

길은 막다른 골목이나 뚫린 골목이나, 모두 적당하다고 그랬지?
일제 시대에도 힘겹게 살았고,
지금은 해방된 세상인데도 살기는 힘겹단다. 

막다른 골목, 일제 강점기에 모든 아해들은 <두렵다>고 그랬겠지?
그러나 뚫린 골목,
아해들이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세상은 <두렵다>고 볼 수 있어. 

세상은 늘 불안의 요소를 안고 있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라고 볼 수 있는 거야.
그래서 이런 시들을 <모던>하다고 한단다. 현대적이라고.

띄어쓰기를 하나도 하지 않았지만,
사실 한국어나 일본어는 명사를 중심으로 조사가 붙은 형식이어서 띄어쓰기가 큰 의미가 없으니
이런 양식이 가능한 거란다.
영어같은 경우는 띄어쓰기를 무시하는 '신선한?' 양식은 실험이 불가능해.
'Tobeornottobethatisaquestion.'같은 글은 이해가 불가능하잖아.
'To be or not to be, that is a question.'은 누구나 이해하는 글인데 말이지.  

오늘은 '인간의 삶'과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를 몇 편 봤다.
민우도 이제 곧 어른이야.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지,
아빠랑 이렇게 시를 통해 이야기나눌 수 있는 삶이 되면 좋겠다는 게
아빠가 이렇게 매일 글을 쓰는 이유란다.
사랑하는 아들,
이렇게 쓸 수 있는 데는, 그런 모든 것이 들어간 마음이 작용한다는 거.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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