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란 이름을 기억하니?
아빠가 처음 선생님이 되었던 해.
1989년 여름, 아빠는 친구들과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밤이면 무더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라디오를 켜놓고 책을 읽으며 뒹굴곤 했단다.
근데 라디오에서 '기형도'란 시인이 죽었다면서 매일 시를 읽어 줬어. 

그 해 여름은 참 무서운 해였단다.
선생님들이 모여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는데,(이게 선진국엔 다 있는 거거든.)
빨갱이들이라고 텔레비전에서 마구 매도를 하고,
1500여명을 해직을 시키고 그랬어. 

그 어둡던 시절과 딱 맞춰서 기형도의 어두운 시들을 들으면서
아빠는 친구들 모르게 누워서 눈물을 흘렸단다.
이런 어두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미워서 눈물을 흘렸고, 
그런 시대에 선생을 하게 된 것이 싫어서 눈물을 흘렸어.
결국 나는 군대엘 가서 해직은 되지 않았지만,
지금도 기형도 시를 읽으면 그 당시의
눈물 가득한 먹먹한 스물 네 살의 젊은 가슴이 오롯이 되살아 나곤 한단다. 

전에 기형도의 '엄마 걱정'을 읽은 적 있지?
'찬밥'처럼 방에 담긴 아이. '내 유년의 윗목'을 기억하는 가엾은 아이.
그가 어른이 되었으니 얼마나 어두울까. 
그의 유명한 시들만 몇 편 살펴볼게.
그의 시집 제목은 <입 속의 검은 잎>이란다. 
'입' 속에 '잎'이 있을 리가 없지? 비슷한 발음을 이용한 언어유희지.
'입' 속의 '혀'를 '검은 잎'으로 비유했어.
곧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는 죽은 혀.
발언하지 못하는 죽은 언론과 죽은 문학에 대한 풍자겠지.
우선 그이 <질투는 나의 힘>을 읽어 보자.
영화 제목 <복수는 나의 것>도 이 시의 패러디겠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녔는데,
시를 잘 써서 '현상 공모'는 늘 1등을 했단다.
그래서 응모해 놓고 발표도 되기 전에 술값을 다 쓰곤 했단 이야기도 있어. 

연 구분이 없는 시라서 서술어가 종결형 어미를 쓰는 곳에서 나눠서 다섯 부분으로 읽어 보자.
첫 부분에선 시를 쓰게된 계기가 드러나 있어.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점을 상정하고 있지.
나이든 눈으로 본다면 스스로는 '어리석게도 너무 많이 기록'했을 뿐인 시인일 것 같대.
지금 자신의 시에 스스로 만족하지만, 미래의 눈으로 보면 아닐 거란 생각이지.
젊었던 시절,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워 너무 많이 써댔다는 반성을 하는 부분이야. 

두번 째 부분에서 자신에 대한 성찰이 드러난단다.
자신을 '어슬렁거리는 개'에 비유했으니 '보잘것 없는 존재'로 본 것 같지?
지칠줄 모르고 뭔가를 했지만, 제대로 한 것은 없고 '머뭇거렸을 뿐'인 것처럼 반성하게 될 거란 이야기지.
아직도 미래의 시점에서 자기를 본다면 그렇다는 이야기야. 

세번 째 부분에서도 자기 반성이 들어 있다.
자기 시를 돌아보니 '탄식'뿐이어서 한심하대.
젊은 자신이 살아온 날들은 참 실망스러운 것이었고,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바보스런 것이었지.
희망에 가득차서 열렬하게 적었던 시들을 돌아보노라니,
잘 사는 사람에 대한 질투,
명예와 권력을 가진 사람에 대한 질투,
자신보다 똑똑하고 글 잘 쓰는 사람에 대한 질투, 질투, 질투들...
자신이 희망했던 바는 온통 질투 뿐이었다고 회고할 거래.
그래서 화자는 미래에 읽을 수 있도록, 자신의 글을 평가하고 있어.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화자의 반성이 압축적으로 효현되고 있지.
화자의 삶을 회고하고 성찰해 보니,
타인의 삶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 지나지 않았음을,
지나친 질투로 똘똘 뭉친 것이었음을 반성하고 있는 시지.
그런데 제목에서는 '질투만이 나의 힘'이라고 했어.
시를 읽어보면 질투는 '부정적'으로 그려지는데, 그것을 '힘'이란 긍정적 요소와 매칭시켰으니,
역설적 표현이 되겠구나. 

마지막 부분은 화자가 정말 열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했음을 표현했어.
그렇지만,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지.
늘 자신보다 나은 누구, 현재보다 나은 미래만을 위하여 꿈을 꾼 자신밖에 없음의 발견.
누구보다 바쁘게 살고 있었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사랑해서' 그런 것이 아님을 반성하는 시란다.
좀 우울하지만, 아름다운 생각 아니니?
정말 바빠 보이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놓치고 살기 쉬운 게 인생이니 말이다.

다음엔 그의 '빈 집'을 읽어 보자.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는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 집>

기형도에게 세상은 온통 '빈 집' 투성이였는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 엄마를 기다리던 '빈 집'에 홀로 엎드려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오지 않던 엄마를 걱정한 것처럼,
어른이 된 기형도에게도 '우리집'은 오지 않았다.
사랑을 잃고 그는 쓴다. 

짧았던 밤. 그는 사랑을 했고, 이제 그 사랑을 잃었다. 
모두에게 안녕을 고한다. - 그녀와 함께했던 모든 것들에게...
안개와 촛불들, 흰 종이들과 눈물들.
한 때는 그녀와 나의 것들로 착각했던 그것들은 더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일 뿐이다.

그리고 이제 문을 잠근다.
이룰 가망없는 그의 사랑은 '빈 집'에 갇힌다.
김기덕 같은 이의 작품을 만들게 해주는 모티프가 될 정도로 강렬하면서도 텅 빈 시상이 가슴을 저민다.
김기덕의 '빈 집'은 낮에는 사랑이 없고 사람이 없는 텅빈 집을 상상 속에 밀어넣은 영화다. 

기형도의 '빈 집'은 절망과 폐쇄의 공간이다.
모든 열망을 상실한 후의 공허한 내면의식이 반영된 정서적 공간이라 보면 되겠다. 

이 시에서 사랑을 잃어버린 행위는
연인과의 그것이기도 하고, 인생이나 세상에 대한 열정일 수도 있다.
'질투는 나의 힘'에서 자신은 '질투했을 뿐'임을 깨달았듯,
사랑을 잃고 그는 세상을 향한 문을 닫는다.
혼자 '빈 집'에 스스로를 가둔다.
그의 영혼은 메마르고 쓸쓸하다.

그의 작품들은 우울한 기억과 회상들로 가득하다.
개인적 경험이기도 한 이것들은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였다.
그의 시에는 좌절, 불안, 허무, 불행, 죽음의 이미지가 가득하다.
이 기괴한 시어들을 일컬어 '그로테스크(기괴한 건축 양식에서 나온 말)'라고 부른다.

마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떠올리는 그의 시 '안개'를 읽어 보자.
이 시를 기형도가 유명해 졌다고 한다.
암울하고 전혀 내일이 보이지 않던 1980년대 독재 시대가 잘 반영되어 있단다.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기형도, 안개>

이 시의 '안개'는 자연 현상이라기보다는 '공장에서 뿜어진 매연'이기 쉽다.

1문단에서 샛강에 안개가 끼는 것은 외부와 경계를 짓는 것으로 읽으면 될 거야.
3문단을 먼저 보면, 다시 샛강에 안개가 낀다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어.
안개는 명물이고, 여공들은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공장으로 간대.
제법 밝고 경쾌한 어조로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반어법>이란다. 

공장으로 가득한 가난한 사람들의 그 읍 사람들은
늘 매연 가득한 대기 속에서 살아가면서 햇볕을 쬐지도 못한다.
여공들은 건강미를 잃고 얼굴은 허옇게 뜨고, 아이들도 자라기 전에 공장엘 가야 한다.
이렇게 부정적인 현실을 <명물이고, 아름답고, 무럭무럭 자라 공장엘 간다>고 썼으니 반어지. 

2문단에선 '안개의 군단'이 지배하는 부자유한 도시를 형상화하고 있다.
온통 우울하고 답답하다.
사람이 겁탈당하고, 얼어죽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이렇게 썼다.
안개가 자욱한 세상에 사는 것은 사회적 책임이다.
가난하게 공장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독재정권의 책임이 가장 크다.
대기업과 재벌들은 정치가와 짜고 큰 이득을 얻는다.
그리고 다시 독재정권을 지원하고 다시 이득을 얻는다.
이 톱니바퀴 속에서 '난쟁이'들은 나약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개인적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라고 표현한 것도 <반어>다.
그것을 개인의 불행이라 여기지만, 사실은 구조적인 사회의 문제라는 속뜻이 강하게 비친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내들은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비판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감옥에 갇혔기가 십상이다.
경찰은 무조건 기업가의 편을 든다.
국가도 무조건 기업가의 편을 든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이런 말은 국민을 괴롭히는 나라라는 뜻이다.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나라에서는 인삿말도 '부자되세요~'가 되었다.
이런 나라는 세상에 잘 없단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헐~
돈이 곧 인격이 되는 무서운 곳이 '안개낀 도시'다.
비판하는 자들은 조용히 사라지고,
모든 문제는 <개인적인 불행>일 뿐이다.

이 시는 산업화로 인해 파괴되는 자연과 삭막해지는 인정에 대한 고발의식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 시와 비슷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시가 있어 한편 소개할게.
바로 이성복의 '그 날'이다. 우선 읽어 보렴.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 점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그 날>

이성복은 어려운 비유나 상징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
그저 '그 날'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씩 주워섬기고 있다. 

그 날 일어난 사건 목록을 만들면 아래와 같다. 

1. 아버지는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학교갔다
2. 어머니의 다리는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노닥거렸다  
3.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4. 역전엔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어린 여자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5.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6.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7.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8.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9. 새 점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10.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11.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이렇게 적으나 마나 한 일들로 가득한 날이 '그 날'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렇지도 않아보이는 '그 날' 사람들은 아프게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는 사장과 다투고, 어머니는 다리가 붓고, 가난한 여인들은 몸을 팔았다.
잡초뽑는 여인들과 집 허무는 사내들의 가난은 삶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이 시의 백미는 마지막 두 행이다. 
그토록 세상이 고통스러웠던 그 날,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마치 기형도가 <개인적 불행일 뿐>으로 치부하는 것과 같다.
세상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다고 소리치지도 아픈 이를 위해 치유하려는 노력을 하지도' 않았다.

세상은 <무사했고> <완벽했고 없는 것이 없었다>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표현은 모두 <반어법> 되시겠다.
세상은 아프고 엉망 진창이다.
그런데 무사하다, 완벽하다, 안 아프다 했으니 '반어'지. 

불규칙하게 시어를 행갈이해서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소외당하는 자들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을 고발하는 일종의 <참여시>다.

부모는 고단하고 아픈데, 자신은 노닥거리고 여동생은 음악회를 간다.
이런 부조화가 시의 문제의식을 심화시키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데도, 전방은 무사하단다. 전쟁으로 대치중인 국가에서 할 말은 아니다.

없는 것이 없는 완벽한 국가인데도,
가난에 찌든 여성들은 창녀가 되고, 어린 여자애도 곧 창녀가 될 운명이다.
미래까지도 비관적이다. 

여동생은 사랑하는 이와 음악회를 갔는데,
화자는 자신의 잘 풀리지 않는 사랑이라도 있는 듯,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무서운 상상도 한다.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여성에 대한 분열증적 반응이다.
앞서가는 부츠신은 멋진 여자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어두운 시대지만,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빈다.
향락적인 사회 풍토에 대한 비판이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한 문장에 모순되는 두 가지 주장이 담겼다.

병듦 = 가난 = 아픔 = 괴로움
아프지 않음 = 건강 = 즐거움

이렇게 상반되는 것들이 담겼으니 <역설>이 된다.
이성복의 <그 날>과 기형도의 <안개>에 담긴 세상을 <부조리한 세상>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고귀한 존재지만,
식민지 사회라든지,
인간보다 물질을 앞세우는 자본주의 사회 같은 곳에서는
인간이 돈과 권력 앞에 허리굽히는 일이 많다. 

알베로 까뮈라는 작가는 <이방인>이란 소설에서 식민지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소재로 삼아,
식민지가 인간의 조건을 얼마나 <부조리하게> 만드는지를 고발한다.
정신 이상이 되어 햇빛이 번쩍거리는 것으로 살인을 저지른 주인공 뫼르소는
일반적인 미친놈이 아니다.
그는 분명 미쳤지만, 사회적인 <부조리>가 그를 미치게 했다는 고발인 것이다.
이 시들의 주제 의식과 비슷한 면이 있어 까뮈를 잠깐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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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은입니다 2013-08-04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아버님하고 연배가 비슷하시고 자상하게 시대상황과 선생님의 경험담을 이야기형식으로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여러과목 특히 가끔 역사공부할때 느끼지만 아버지께서 약주를하시며 상기되신 목소리로 들려주던 근현대사의 장면은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가 않더라구요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