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해가 지면 어두워지고, 해가 뜨면 밝아진다.
해가 뜨기 전의 어둑한 시간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해가 질 무렵의 흐릿한 시간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박남수는 특히 아침의 또렷함을 사랑한 사람이다.
박남수의 시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잡아내려한 노력이 돋보인다.
누구나 귀찮다는 듯 게으른 하품을 물고,
아침을 먹고 직장으로 학교로 종종걸음을 치는 시각.
시인은 아침을 관찰한다.
그런 시 '아침 이미지'를 읽어 보렴.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어둠은 온갖 물상(物象)을 돌려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屈服)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地上)의 잔치에
금(金)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開闢)을 한다. <아침 이미지>

어두울 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다가,
아침이 되면 새가 보이고, 돌이 보이고, 꽃이 보인다.
그것을 시인의 관찰력은 <어머니인 어둠>으로 읽은 것이다.
그래서 어둠은 새와 돌과 꽃을 낳는다.
표현도 그저 한 줄로 늘어 놓으면 단조로우니,
'돌을 / 낳고'에서, 행을 바꿔버렸다. 
읽는 사람더러 좀 '긴장'하며 읽으라는 '강조'의 표시다.

아침이 오면 '어머니 어둠'은 온갖 물상(사물, 삼라만상 : 세상의 모든 것)을 낳고 나서,
스스로 사라진다. 그걸 굴복한다고 표현했으니 의인화를 심하게 했다. 

아침이 오면 물상들은 멈춰있던 자세에서 '어깨를 털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침이 오는 모습을 움직임을 통하여 독자가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려 노력한 것이다.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는 표현에서
아침은 건강한 생명력으로 삶에 활력을 주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아침이 되어 활기차고 밝게 돌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화자는 즐겁게 관찰하고 있다.
마치 잔치라도 벌어진 듯, 세상은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다. 

해님이 방긋 웃으며 떠오르는 모습을 보면,
화자는 즐거워 죽는다.
황금색 태양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모습은 마치 트라이앵글 소리라도 들리는 듯,
즐거운 울림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울러퍼질 듯 청각적 심상을 활용하여 그린다.
공감각적 심상이란 말을 여러 번 썼지?
보이는 태양(시각)을 울리는 소리(청각)로 표현했으니 시각의 청각화~ 되시겠다. 

아침이면 세상이 '개벽'을 한다.
개벽은 '천지 개벽'으로 세상이 처음 열릴 때를 나타낸다.
매일 아침 개벽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아침을 경건하게 맞는 화자의 경외감(존경과 두려움)이 잘 드러난 표현이다. 
이 '개벽'이란 시어에 화자의 감동이 <압축, 응축> 되어 있다보 볼 수 있단다.

이 시만큼 '아침의 신비와 활기'를 잘 관찰하여 쓴 시도 찾기 어렵단다.
'밝은 아침을 맞이하는 삼라만상의 생동감'이 오롯이 살아있어서,
독자의 기분마저도 상승시키는 효과를 노리고 있지.
매일 아침, 소가 도살장 끌려가듯 억지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너 잘못살고 있는 거 아니니? 아침이 얼마나 신비로운 건데,
어제 죽어간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었던 아침이 지금이라고~~!!"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해. 

이 시의 특징적 시어는 <어둠>인데,
보통 '어둠'이 부정적 의미로 잘 쓰이잖아.
근데 이 시에서는 어떤 의미로 쓰였다고 했지?
그래. '모태(母胎)의 이미지'란다.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그래서 건강한 생명을 탄생하게 하는 잠재력 가득한 어머니의 이미지지. 

다음엔 그의 '종소리'를 읽어 보렴.
이 시에서도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현상을
그 청각적 경험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고 감각적 언어들을 동원하고 있단다.

나는 떠난다. 청동(靑銅)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振幅)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忍從)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雷聲)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종소리) 

이 시의 화자 '나'는 바로 '종소리'야.
종소리가 의인화된 것이지.
1연에서 '나는 청동으로 된 종의 표면에서 떠난다'고 했으니,
종소리가 마치 나비처럼 종의 표면에 붙어있던 것처럼 보이잖아.
그러다 기둥으로 종을 쿵! 치면 나비처럼 붙어있던 종소리가 비로소 떠난다는 거지. 

햐~ 상상력도 참 특이하지 않니?
세계적으로 한국에 전래된 종은 그 음색이 곱고도 울림이 오래 아름답게 멀리 퍼지기로 유명하단다.
그런 소리를 듣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공명이 일어 이런 시를 쓰고 싶었는지도 몰라.
한국 종은 신라시대로부터 이어지고 있는데, 구성도 독특하고 소리도 아름답대. 

표면에 수백 수천 마리가 떼를 지어 붙어있던 새처럼
일제히 날아가는 모습을 그리는 표현 자체가 장관이구나.
진폭(동그라미처럼 울리는)의 새가 되어 날아가는 종소리는 금세라도 화면에 잡힐 것 같아. 

광막한 울음 소리가 되어 날아가는 종소리.
멀리멀리 전달되는 종소리를 그리고 있는 1연. 

그런데 2연으로 넘어가면서 또다른 이미지를 얻어낸다.
종소리는 <청동의 벽>으로 이뤄진 <칠흑의 감방>에 갇힌 존재로 그려진다.
그 종소리는 울림과 동시에 '인종(참고 따름)'의 시간을 끝낸다.
자유를 구속하는 '역사'적 현실까지도 종소리와 연관지어 그려내고 있다.

3연에서 종소리는 바람을 타고 멀리 멀리 날아간다.
들을 지나 꽃을 만나고 하늘로 오른다.
거기서 푸르름, 웃음, 악기 소리처럼 싱그러운 존재로 마음껏 표현된다.
지난 시간 이야기한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나는 자유다!"를 외치며 하늘 높이, 들판 너머 멀리까지 흘러간다. 

그러다 4연에서 부정적 시어가 등장한다.
2연의 '구속'인 '청동의 벽'과 '칠흑의 감방'에서 벗어나 자유를 구가하지만,
'먹구름' 깔린 시대가 다시 도래할 수도 있다.
그러면, 멀리 나아간 종소리는 하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천둥소리)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되어 온 세상에 울려퍼진다.
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은 곧 '자유의 소리'가 온 세상에 고루 퍼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소리를 가루가 자욱하게 퍼져나가는 것처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이것도 청각의 시각화, 곧 공감각적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단다.  

이 시의 주제는 '종소리를 통하여 본 자유, 역사의 의미' 정도가 되겠지.
예전엔 이렇게 웅장한 목소리의 시를 '남성적 어조'라고도 했는데,
요즘엔 성차별 용어라고 구박받을 소지가 있어 그런 표현은 쓰지 않는단다. 

그리고 1,2연에서 도치법을 사용하여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는 것도 특징의 하나란다.
박남수의 '종소리'의 소리는 공간적으로 높은 곳까지 '상승'하고, 먼 곳까지 '팽창'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주제는 <해방>이란 이야기는 이미 했다.
아래서 지훈의 '범종'을 읽으면서 '소리의 이동 경로'와 '주제'의 차이를 생각해 보자꾸나.

무르익은 과실이
가지에서 절로 떨어지듯이 종소리는
허공에서 떨어진다. 떨어진 그 자리에서
종소리는 터져서 빛이 되고 향기가 되고
다시 엉기고 맴돌아
귓가에 가슴 속에 메아리치며 종소리는
웅 웅 웅 웅 웅……
삼십삼천(三十三天)을 날아오른다 아득한 것.

종소리 위에 꽃방석을
깔고 앉아 웃음짓는 사람아
죽은 자가 깨어서 말하는 시간
산 자는 죽음의 신비에 젖은
이 텡하니 비인 새벽의
공간을
조용히 흔드는
종소리
너 향기로운
과실이여! <조지훈, 범종(梵鐘)>

조지훈은 범종의 울림을 '향기로운 과실'에 비유하였다.
과실은 '열매'이니, 결실을 맺는 것이고,
과실과 종소리의 공통점은 바로 <정신적 성숙>에서 찾아낸 것이다. 
새벽에 텅빈 공간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얻게 되는 정신적 성숙이 <범종>의 주제다. 

이 시에서의 소리는 '응축→하강→확산→상승'의 단계를 거친다고 볼 수 있단다.
'무르익은 과실'처럼 응축하고,
허공에서 떨어지고,
터져서 확산되고 엉기고 맴돌고 메아리치고,
삼십삼천(온 세상)으로 날아오른다. 아득하게. 

꽃방석을 깔고 앉아 웃음짓는 화자는,
종소리를 들으며 정신적으로 고양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는 시다.  

박남수의 시 중에서 더욱 관념적인 시로 여겨지는 시가 바로 '새'다.
송창식이란 가수가 노래로도 불렀던 유명한 시인데, 우선 읽어 보고 이야기하자.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새> 

마치 설명문을 쓰듯, (1)(2)(3) 이런 표현을 썼다.
그 문단 사이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도 있겠다.
우선 (1)문단을 보자. 
바람의 여울터, 나무 그늘에서, 곧 자연 속에서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그것이 '자연'이다. 

동양에서 쓰던 자연은 지금처럼 '명사(원래 있는 존재)'적 의미로 쓰이지 않았단다.
노자의 사상에도 나오는 '무위자연'의 '무위'는 '유위'의 반대야.
'유위'는 인간이 억지로 지어내서 만드는 <인공, 문명>이고,
'무위'는 인간이 건드리지 않아도 이뤄지는 <자연>의 경지지.
곧, '무위'와 '자연'은 비슷한 말을 반복한 거란다.
'자연'은 '인간이 지어내지 않아도 그렇게 돌아가는' 상황을 표현하던 말이야. 

2연에서 새는 또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서로 사랑을 나눈다.
사랑해~ 이런 말은 얼마나 표현의 스펙트럼이 다양하겠니?
새는 그렇게 말로 지어내는 '유위'를 꾸미지 않고도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야. 

곧,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던 건방진 철학자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인간이 새와 비슷한 '미물'이자 '온전한 소우주'임을 가르치고 있는 시란다. 

(2)문단에서는 '새는 뜻을 만들지 않고, 억지로 사랑을 꾸미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1문단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는 근대 정신에 일침을 가하는 것 같아.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니 '호모 루덴스'니 해서 지혜가 있다는 둥, 도구를 쓴다는 둥,
자기 종족이 자연 일반에 대하여 우월함을 내세우고 있잖아.
그렇지만, 새는 인간처럼 굳이 뜻을 만들어 말하지 않는대.
'무위 자연'의 실천이겠지. 

인간이 '유위'로써 지어낸 것이 뭘까?
지식을 쌓으려고 책을 만들고, 상대를 정복하려 전쟁을 만들었어.
전쟁에 유리하도록 화약을 만들고 총포를 만들어서 상대를 굴복시키려 하지.
그래서 '노자'라는 책에서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참상을 겪고 나서 딱, 이렇게 이야기했어.
'자연'은 만물의 어머니다. 지혜로운 존재다. 자연은 인간처럼 <다투지 않는다>.
인간들아, 제발, <다투지 말라 不爭>, please~~~. 

(3)문단은 조금 까다롭지만,
유사한 시들을 이미 다뤘으니 간단하게 살펴 보자꾸나.
김춘수의 '꽃을 위한 서시'나 신동집의 '오렌지'를 공부한 적 있잖아.
존재의 본질을 아는 것은 어렵다.
알려고 마음먹으면 그 순간 존재의 본질은 더 파악하기 어렵게 된다. 이런 것.  

포수는 '인간'이고, '유위'를 뜻해.
뭔가를 하려고 하는, 업적을 쌓으려고 하는 존재. 자연을 이기려는 존재.
그래서 포수는 '자연-새-순수'를 잡으려고 총(한덩이 납 탄환)을 쏜단다.
그렇지만, 포수가 매번 쏘아 맞히는 것은 '자연-새-순수'가 아니야.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는 포수가 이루려던 '유위'의 목적이 아니지.
결국 포수의 의도는 보기좋게 빗나가고 만단다. 

지금 대통령하는 이가 돈을 좀 긁어 모으려고 4대강 사업을 벌이고 있어.
온 강에 포크레인과 트럭을 동원해서 무슨 공사를 하는데,
결국 강물은 더 질이 나빠지고 그 피해는 후손들이 입게 될 거야.
목적이 돈이 아니라 정말 강물이 걱정되는 거라면, 그렇게 부랴부랴 공사할 이유가 없거든.
척 하면 삼천리요, 툭 하면 호박 떨어지는 소리라고,
정치가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지. 

그처럼, 인간이 하는 일은
아무리 의도가 좋다고 하더라도,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단다.
해운대나 광안리 백사장은 원래 모래밭이 꽤나 넓었단다.
그런데 사람들이 신발에 모래들어가는 걸 싫어해서 둑을 쌓고 시멘트로 포장을 해서 길을 냈어.
그리고 나서부터는 파도에 모래가 쓸려내려가고 말았단다.
해마다 모래밭의 폭은 좁아지게 되어서,
결국 매년 해수욕장 개장 전에는 비싼 모래를 사다가 퍼부어야 하지.
그럼 뭐해. 바다는 다시 모래를 쓸어내리는 걸. 

이 시는 '성북동 비둘기'처럼 '문명 비판적' 시선을 느끼게 하는 시란다.
'인간 문명'은 '자연의 순수성을 파괴'하는 것임을 '피묻은 새'로 섬뜩하게 그리고 있지.
자연은 그대로 두면 (1)과 (2)부분에서처럼,
아름답게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것이거든. 

인간이 자연을 개발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시선은 언제나 단기적 이익을 위한 거야.
장기적으로는 개발이 손해가 되기 십상인 거지.
그런 것을 에둘러 표현하는 시가 이런 것들이다. 

공부나 인생도 그런 것 같아.
단기적인 목적으로 공부하면,
예를 들어 중간고사 범위만 죽으라고 외우고 공부하면 자기한테 오히려 손해가 되는 그런 것.
민우가 살아갈 미래 사회는
기계화, 자동화, 게다가 세계화된 시대란다.
한국인들은 노동할 자리를 기계에 내주고,
임금이 낮은 곳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내주게 되겠지.
결국 한국인은 관리자가 되든지,
아니면 끊임없이 새로운 직업을 구하러 흘러다니는 존재가 될 것임은 불보듯 뻔한 일이란다.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거야.
세상이 어떻게 흐르는지 아는 것.
그래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자신을 준비시키는 것.
어차피 삶은 우물쭈물 하다가는 큰일납니다~ 이런 거니깐.
한 가지 직업이나 한 가지 목표만 바라보고 달리다가
경쟁률이 너무 높아 포기하면 삶 자체를 포기할 수도 있게 된단다. 

부디 스스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넓게 보고 많이 읽고 여러 가지 직업에 관심을 두기 바란다.
그리고, 늘 미리미리 준비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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