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 시인선 82
김정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금이간 영혼을 사랑하는,

예쁜 나를 발견하는

나비.

김정란의 나비는 역설적이게도 넝마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나풀나풀 예쁜 모습과 너덜너덜 닳은 모습을 동시에 지닌 모순체인 그의 나비는, 어쩌면 그의 화려한 이력에 뒤채인 '표현되지 않았고 표현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시니피앙'인 모양이다.

그는 프랑스어를 하니깐, 이런 걸 시니피앙이란 말 속에 절묘하게 넣을 수 있었던 게다. 역시 인생은 생활을 뛰어넘지 못하는 법이니깐. 자아를 자신의 재산의 전부라던 어떤 이에게 시에서 각주라는 생경한 모습을 보여주면서까지 '내게 자아는 넝마'라고 역설한다.

그의 시에는 일관되게 결핍과 부재, 어두움, 그리고 고아, 그러나 무언가를 느끼는 감기의 코기토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고 하던 김수영의 눈이 그에게도 살아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나비로 보고 있을 때, 그의 눈은 형형하게도 살아서 넝마같은 자기의 실존을 쳐다보고 있었던 거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딱딱함.

존재의 어두움 속에서 느끼는 현기증.

"부모님께, 내 핏줄의 두 끝, 내가 눈물 외의 아무 것도 드릴 수 없는 내 존재의 까칠한 겉옷에게" 란 슬픈 서시를 쓴 그의 시니피앙의 눈물을 나는 읽었다.

십오년 전, 내가 한창 군대 훈련소에서 비지땀 흘리던 시절에, 그 폭압적 시절에 저항하는 시들도 있지만, 역시 그의 시의 정점은 시니피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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