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중엔 사랑시도 많고 순간의 예리한 포착이 재미있는 시들도 많다.
그렇지만, 시험에는 되도록 학생들에게 교육적인 작품들을 제시하도록 구상하다 보니까,
자꾸 비판적 시각이 들어간 시들이나
문제 상황의 부정적 현실이 강조된 시들, 그리고 희망을 노래한 시들을 주로 설명하게 된다.
오늘은 기분 전환 겸, 사랑 노래 몇 편을 소개할까 한다. 

우선 김남주의 <사랑 1>을 읽어 보자.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안다

사랑만이
불모의 땅을 갈아엎고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릴 줄 안다

천 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안다

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김남주, 사랑 1>

어떤 면에서는 인간은 지구를 망치는 말종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사랑은 위대하기도 하다.
그래서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도 하고,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인간미>라는 말은 인간의 아름다운 측면이 진하게 드러났을 때 쓰는 말이다.  

  

단테가 쓴 <신곡>에 보면, 단테는 지옥과 연옥, 천국을 여행한다.
<인간미>라는 어휘는 '천국'에 속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아니면 '연옥'이 천국으로 가기 전의 공간이니 거기 있을 수도 있겠고... 

봄을 기다림... 희망이겠다. 희망은 오로지 사랑에서만 나오는 것이라고 했고,
희생... 오로지 사랑만이 희생할 수 있다고 했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했다.
이 말은 그만큼 '지금 - 여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겠구나.
now-here... 하이픈 하나만 옮기면, no-where가 된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인생과, '어디에도 없는' 삶.
오늘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고 성리학의 아버지 '주자(주희)'가 말했다. 

현실과 오늘이 중요하지만, 그것은 미래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미래를 위하여 사랑의 씨앗을 뿌릴 줄 아는 존재인 것이 인간의 긍정적 면이 되겠다.
마지막 연에서 '가실'은 수확이다.
인간은 공동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존재이므로, 수확의 결실을 '나눌 줄' 안다. 

이 시의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은 아니다. '사랑의 가치'에 대한 철학적 사고에 가깝겠다.
평이한 시어를 쓰고는 있지만, 인간이 지닌 사랑의 가치를 잘 형상화하고 있다.

다음은 엄청 유명한 시를 한 편 보자. 

내 마음은 호수(湖水)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 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라.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김동명, 내 마음은>


은유 설명할 때 잠시 등장했던 시 되시겠다.
은유는 '유사성'에 기초한다고 몇 번 이야기했지? 유사성을 찾는 것이 잘 읽는 비법이다.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을 어떤 사물에 비유한다.
그리고 2~4행에서 '그 이유는요~' 이러고 설명하는 것이다. 

1연. 내 마음은? 호수입니다.
그 이유는요~ : 그대가 노저어 오기만 하면 그대 배 앞에서 옥같이 부서지는 호수예요.
                     그러니깐, 내 마음은 당신의 접근을 전혀 꺼리지 않는 존재란 거죠.
2연. 내 마음은? 촛불입니다.
그 이유는요~ :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촛불이에요.
                     그러니깐, 당신을 위해 무엇이든 할 거예요. 
3연. 내 마음은? 나그네입니다. 
그 이유는요~ : 그대 피리소리를 들으며 밤새 귀를 기울이고 싶어서요.
                     그러니깐, 언제까지나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존재거든요.
4연. 내 마음은? 낙엽입니다.
그 이유는요~ : 잠시 당신 곁에 머물고 싶을 뿐이거든요. 
                     그러니깐,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지만요.
                     저를 싫어하신다면, 저는 나그네같이 고요히 사라질 거예요. 

이렇게 오로지 주기만하는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다.
좀 징그러울 정도로 사랑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지.
전에 이 시를 통해 '패러디'하는 시험을 냈더니, 어떤 넘이
'내 마음은 연필이요. 내 안에 흑심 있소.' 이렇게 적었더라.
참 멋진 유사성을 발견했지?
패러디에서는 이렇게 언어유희도 필요하니 말이야.

이렇게 말하는 투를 '하오체'라고 그래. 조금 높인 말투가 되겠지.
이 시의 주제는 <사랑의 기쁨>이기도 하지만 <사랑의 덧없음>도 들어 있단다.
사랑은 오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가기도 하는 것이거든.
인간의 마음은 자주 변하는 것이니 말이야.

다음엔 '그 여자네 집'의 시인 김용택의 '들국'을 읽어 보자.

산마다 단풍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뭐헌다요. 산 아래
물빛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산 너머, 저 산 너머로
산 그늘도 다 도망가불고
산 아래 집 뒤안
하얀 억새꽃 하얀 손짓도
당신 안 오는데 뭔 헛짓이다요
저런것들이 다 뭔 소용이다요
뭔 소용이다요. 어둔 산머리
초생달만 그대 얼굴같이 걸리면 뭐헌다요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내 마음에
허연 서리만 끼어 가고
저 달 금방 져불면
세상 길 다 막혀 막막한 어둠 천지일턴디
병신같이, 바보 천치같이
이 가을 다 가도록
서리밭에 하얀 들국으로 피어 있으면
뭐헌다여, 뭔 소용이다요. <김용택, 들국> 

'들국'은 들국화를 이르는 말이야.
이 시에서는 '뭐헌다요?'나 '뭔 소용이다요?' 같은 표현이 반복되고 있어.
헤아려 보니 9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그 뜻은 '소용없다'는 것이다.  

당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소용없다는 그런 것이다.
내 마음은 <마른 지푸라기> 같고, <허연 서리>만 끼어 가고, <어둠 천지>이다.
이 가을이 다 지나도록 서리밭에 하얗게 피어있는 <들국>이다. 

앞에서 김동명이 <내 마음은요~>하고 비유했던 것에 비하면, 훨씬 강렬하지 않니?
당신이 없어서 내 마음은 쓸모없는 지푸라기 같고,
덜덜 떨리는 서리 같고, 세상은 온통 어둠 천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서리가 내리는데도 아직 지지 않고 피어있는 <들국>처럼 당신을 기다린다.

병신 바보 천치같이 보이지만, 화자의 순정은 얼마나 열렬한 것이냐.
그리움과 푸념으로 가득한 이 시는 '임에 대한 그리움과 한없는 기다림'을 강렬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자연을 세세하게 관찰한 화자의 생활이 잘 담긴 좋은 시로 보인다. 

지난 1월 22일 박완서 선생님이 타계하셨다.
국어 교과서에서 '그 여자네 집'으로 친숙한 소설가였는데...
사람은 한 번 오면 한 번 가게 마련이지만, 아쉽다.
선생님 덕분에 익숙한 시, 그 여자네 집을 아련한 마음으로 한번 읽으며 마치자.
설명은 필요 없겠지?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 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언듯언듯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여하고 싶은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은 집
참새 떼가 지저귀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 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허리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목화송이 같은 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 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히,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 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 집
내 마음 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각,을,하,면…… <김용택, 그 여자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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