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나더니 날씨가 풀려 완연한 봄 같다.
1월 내내 춥더니 봄의 문턱에 다 온 기분이 든다.
한 해의 시작은 정초에 세운다고 하지만,
새 학기가 곧 시작될 테니 한 해의 시작을 잘 해보기 바란다. 

요즘 뉴스를 장식하는 이야기 중 하나로 '소말리아 해적 소탕 작전'이 있었다.
강대국의 상선은 원래 건드리지 않는 것이 해적들의 철칙이다.
그래서 한국처럼 어정쩡한 나라의 배가 건드리기 딱 좋은 것이다.
돈도 좀 있고, 군사를 파견하기엔 너무 멀고...
그래서 이번에 납치된 배를 구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기는 한데,
지나치게 자화자찬의 잔칫상을 벌이는 언론을 보니 좀 안쓰럽기도 하다. 

저렇게 정부가 잘한 것을 내세우고 싶을까 싶어서 말이야.
평소에 잘한 사람은 발렌타인 데이라고 꼭 초콜릿으로 점수를 얻으려고 안간힘 쓸 필요는 없을 텐데 말이다.
세상 일은 서로 통하는 면들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서도,
우리의 일상 생활과 시 속의 생각들이 어떻게 연관될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풍장>과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즐거운 편지>를 통해 만났던 황동규의 시
<삼남에 내리는 눈>을 한번 읽어 보자.
3남은 임금이 살던 서울 인근('경기'라고 부른다.)의 남쪽 세 도를 가리킨다.
충청, 전라, 경상도가 되겠지.
예부터 이 3남 지방은 곡창 지대로 많은 세금이 걷히던 곳이고,
그만큼 탐관오리의 수탈도 심하던 곳이다.
우선 시를 한번 읽어 보자.

봉준(琫準)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
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
왕 뒤에 큰 왕이 있고
큰 왕의 채찍!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보마(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포(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들
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
목매었으련만, 대국낫도 왜낫도 잘 들었으련만,
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
귀 기울여 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
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무식하게 무식하게. (황동규,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봉준이는 동학 농민 운동으로 <조선 왕조>에 저항의 깃발을 높이 든 전봉준을 말한다.
수탈이 심하여 부정적 시대에 저항한 울분의 시대.
'한문을 모르고 부드럽게 우는 법을 몰랐던' 민중은 거세게 봉기하였다.
관군까지도 농민군에 합세하여 <왕조>는 위기에 부딪히게 되고,
<왕조>는 왜병을 끌어들여 서양식 총으로 농민군을 몰살시킨다.
<조선 왕조>를 <국가>의 개념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왕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도 버릴 수 있는 것이 <왕조>라고 봐야할 게다.

왕의 뒤에는 '큰 왕' 일본이 있었고, 그들의 채찍은 매웠다.
결국 동학 농민군은 몰살의 길을 걷게 된다.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보마(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포(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들
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
목매었으련만, 대국낫도 왜낫도 잘 들었으련만, 

이 부분은 '겨울 안개' 자욱한데, '보병과 기마병이 국경을 넘어 들어왔다는 이야기다.
총알이 튀는 모습이 부챗살처럼 땅을 파헤치고,
일본식 소총들은 대포소리를 울리며 당황스런 농민군을 울리고 만다.
제 나라 임금이 돈주고 불러온 일본놈 총알에 맞아 눈밭에 쓰러지던 농민군을 떠올린다.
찬 눈에 홀로 쓰러져 볼 비비고 있었던 칠복이, 만수, 순이 아배, 만득이 할아범...
차라리 계룡산에 들어가 밭갈이에나 목을 매고 농사를 짓고 살았으련만...
이렇게 왜놈 총알에 나자빠져 죽을 줄 알았더라면...
밭갈이에나 목을 매었을 것을...
대국(중국, 중국인을 때가 많다고 땟놈, 뗏놈으로 불렀음)낫이나 일본낫(왜낫)이나
외국에서 들어온 물건이라도 농사짓는 데는 유용하게 쓰였을 것이지,
우리 농민을 죽이지는 않았으련만... 

이렇게 조선 왕조에 의하여 죽어간 농민군들의 슬픈 과거가 화자에겐 떠오른다.
이 이미지가 떠오르는 이유는, 바로 '눈'이 내리기 때문이다. 
갑갑한 하늘 아래 눈이 내리는데,
눈 맞으며 잡혀갔을 전봉준이 떠오르고,
눈 내린 벌판에서 찬 눈에 볼 비비며 죽어갔을 동학군을 떠올리면 속이 터진다. 

화자는 뜬금없이 왜 눈이 내리는 데 이렇게 불행한 삶을 살았던 동학군을 떠올렸을까?
왜 그렇게 슬픈 현실이 오버랩 되었을까?
아마도 화자가 살았던, 이 시를 지었던 1968년 박정희 독재정권의 통치와 그에 대한 저항이,
마치 조선 왕조가 짓밟은 제 나라 국민들처럼 짓밟히던 시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시를 다시 낮게 읊조려 보기 바란다.
부정적 현실의 어두운 시대.
조선 농민들의 울분이나 20세기 농민들의 울분이나
<유사함>에 기초하여 오버랩되는 장면들이 슬프고 처연하구나.
우리는 동학 농민군 하면 <전봉준>이 대장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김개주>같은 장수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장수들은 워낙 강성이라서 잡자마자 바로 참수(목을 벰)했다고 하더구나. 

어두운 시대, 그래도 희망을 가져봐야 하지 않았겠니?
의지적으로 희망을 가져보려는 노래 중에 오늘은 '황지우'의 시를 한 편 읽어 보자.
시들은 한번 읽으면서 느낌을 살펴 보고,
설명을 듣고 나서 다시 한번 읽어 보기 바란다. 아마 정리가 더 잘 될 거야.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裸木(나목)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황지우, 겨울 - 나무로부터 봄 - 나무에로)

시의 제목은 '겨울 - 나무로부터 봄 - 나무에로'이다.
'겨울-나무'가 '봄-나무'로 변화하는 과정을 통하여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시란다. 
그냥 '겨울 나무'나 '봄 나무'라고 해도 될 것을 가운데 하이픈을 넣은 것은 강하게 눈에 띄도록 장치를 한 거지.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이 처음 부분만 살펴 보자.
'나무는 나무이다.'라는 발언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런 만큼 독자는 화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호기심을 가지게 되어 있지.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마지막에 이런 부분이 반복된다. 수미상관.
그 사이에서 화자가 주장하는 바는 수미상관의 구성을 통하여 <강조>되고 있는 것이겠다. 
수미상관의 시는 그 사이에 어떤 주제가 담겨있는지 살펴보면 된다. 

나무는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서 피하지도 않고,
<뿌리박고 무방비의 裸木(나목)으로 서>있다.
<벌 받는 자세로 서>있지만,
나무는 <온 혼>으로 <애타고 불타고 버티고 거부하>는 존재다.
그러면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온몸이 터지면서 싹을 내밀고 잎이 되고 나무가 된다.
힘겨운 겨울을 <온몸>으로 이겨내고 봄을 불러오는 것이 나무인 것이다. 

이 시에서는 가만히 있어 보이는 <겨울-나무>가 사실은
간절히 봄을 부르는 역동적인 <봄-나무>이기도 하다는 것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래서 '나무는 나무이다'라고 할 때,
앞의 나무는 '겨울-나무'고 뒤의 나무는 '봄-나무'이다.
겉보기에는 보잘것 없어보이지만, 그 가능성을 보면 무한정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었구나. 

이 나무는 <전봉준>이 되기도 할 것 같다.
시련을 당하는 사람의 상징이다.
벌 받는 나무는 <죄도 없이 죄 지어서>의 '벼'와 같은 존재들이다.(이성부, 벼)

그렇지만 그 나무는 무기력하지만은 않다.
버티고, 이겨낸다.
막 밀고 올라가서 싹을 틔우고 기어이 봄을 부른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이 영탄은 간절히 바라던 것이 경이롭게 펼쳐지는 새 세상을 보는 감탄인 것이다.

1980년대 민주화 시대를 살아온 지식인으로서 시인은
시를 통해 시대를 풍자하고 유토피아를 꿈꾸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의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30회)>와 <너를 기다리는 동안(14회)>에서도 마찬가지 주제가 드러난다.

주제는 <시련을 이기는 민중의 힘과 의지> 정도면 될까?
다음엔 '하종오'의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를 읽어 보자.
마찬가지로 고난의 민중사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우리끼리 하는 말로
태어나면서도 넓디넓은
평야 이루기 위해 태어났제.
아무데서나 푸릇푸릇 하늘로 잎 돋아내고
아무데서나 버려져도 흙에 뿌리박았는기라.
먼 곳으로 흐르던 물줄기도 찾아보고
날뛰던 송장메뚜기 잠재우기도 하고
농부들이 흘린 땀을 거름 삼기도 하면서
우리야 살기는 함께 살았제.
오뉴월 하루볕이 무섭게 익어서
처음으로 서로 안고 부끄러워 고개 숙였는기라.
우리야 우리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총알받이 땅 지뢰밭에 알알이 씨앗으로 묻혔다가
터지면 흩어져 이쪽 저쪽 움돋아
우리나라 평야 이루며 살고 싶었제
우리야 참말로 참말로 참말로
갈라설 수 없어 이 땅에서 흔들리고 있는기라. (하종오,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이 시의 주제 의식은 <우리>라는 말에 잘 드러나 있다.
'벼'는 우리가 먹으려 기르는 것이지만, '피'는 먹을 수 없는 풀이다.
그렇지만 벼가 자라는 곳이면 어디선가 피가 섞여서 자라곤 한다.
벼와 피는 이 땅을 지키는 민중의 상징인 것이다. 
이 시에서 '벼와 피'는 이질성보다는 <동질성>이 강조되고 있단다.

5행 <뿌리박았는기라>까지 읽어 보렴.

우리야 우리끼리 하는 말로
태어나면서도 넓디넓은
평야 이루기 위해 태어났제.
아무데서나 푸릇푸릇 하늘로 잎 돋아내고
아무데서나 버려져도 흙에 뿌리박았는기라.   

벼와 피는 민중이랬지? 민중들은 이렇게 평야 가득하게 생명력을 펼치며 살고 있단다.

먼 곳으로 흐르던 물줄기도 찾아보고
날뛰던 송장메뚜기 잠재우기도 하고
농부들이 흘린 땀을 거름 삼기도 하면서
우리야 살기는 함께 살았제.

벼와 피는 가까이 물줄기가 흐르지 않아도, 메뚜기떼가 마구 파먹으려 해도,
끈질기게 살아 남았지. <함께> 살아 남았단다.

오뉴월 하루볕이 무섭게 익어서
처음으로 서로 안고 부끄러워 고개 숙였는기라.  

오뉴월의 강렬한 햇볕은 벼를 잘 익게 한다.
<무섭게> 같은 말은 사투리지.
이 시는 마치 시골 농부의 말처럼 사투리가 구수하게 들리는 시다.
잘 익어서 서로 '안고' '고개 숙이'며 살고 있었다.
순수하고 겸손한 민중의 마음씨가 곱게 드러나는 것 같은 부분이다.

우리야 우리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총알받이 땅 지뢰밭에 알알이 씨앗으로 묻혔다가
터지면 흩어져 이쪽 저쪽 움돋아
우리나라 평야 이루며 살고 싶었제
우리야 참말로 참말로 참말로
갈라설 수 없어 이 땅에서 흔들리고 있는기라.

이 부분에서 분단된 현실이 드러난다.
<총알밭이 땅 지뢰밭>이 그것이다. 
분단된 현실이지만, 우리 민중들의 뜻은 분단에 있지 않다.
민중들이 우리 맘대로 할 것 같으면,
씨앗이 터져 흩어지면 여기 저기서 움을 돋게 하고,
우리나라를 하나의 평야로 이루며 살고 싶은 것이다. 

얼마나 간절하냐면...
참말로 참말로 참말로
이렇게 간절하다.
우리는 갈라설 수 없어 이 땅에서 흔들리는데,
어디서 외세가 우리를 갈라놓고 <총알과 지뢰>로 흩어버린 것이다.
민중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지배세력에 의해 분단이 되었음을 상징하는 표현이
<우리>의 의지와 상반되어 대립되고 있단다. 

이 시의 주제는 <분단 현실 극복을 향한 민중의 염원>이 되겠지.
그 염원을 '벼'과 '피'를 통해서 형상화하고 있다.
벼와 피는 <우리>가 된다. <동질적 존재감>을 강조하는 것이지.
<하나의 땅>에 함께 뿌리내리고 있어 <분단을 극복>하려는 태도를 강조한 거란다.  

아빠가 읽어주는 시 중엔 유난히 '부정적 현실'과 '의지'를 드러낸 시가 많을 거다.
세상엔 아름다운 사랑 노래도 많이 있을 것이고,
화자 자신의 주변을 돌아본 시도 많이 있을 것이지만,
조선이 망하고 식민지 시대, 분단과 한국 전쟁, 군사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 등으로 점철된 
한국의 현대사와 '시'읽기는 떨어진 것이 아니어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이제 독재 정권이 아니어도 저절로 더욱 험악한 곳이 되어가고 있다.
세계화의 울타리로 한 식구가 된 <글로벌 지구>는 강대국의 자본이 약소국의 민중을
직접 착취하는 구조로 변화되고 있단다.
조선 후기처럼 탐관오리가 그 지방의 농민만 수탈하던 시대나
독재 시대처럼 독재자가 그 나라 국민만 수탈하던 시대가 가고 만 거지. 

공부란 것은 꼭 문제집을 푸는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시대의 흐름도 읽을 줄 알아야 공부고,
세상의 모습이 드러난 문학 작품들을 읽는 것도 공부가 되겠지.
이제 내일이면 개학이구나.
며칠 학교에 나가야 하니 일찍 일어나도록 일찍 자자꾸나.
아무래도 학교는 독서실보다 추우니 옷도 잘 챙겨 입고 다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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