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고은 시인의 '문의 마을에 가서'를 통해 죽음에 대한 관조를 읽어 봤다.
산다는 일은 죽음의 뒷면과도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는 날까지 열심히, 잘 살아 보자. ^^ 

오늘은 고은 시인의 <눈길>이란 특이한 시를 살펴 볼 거야.
왜 특이한 시냐면, 고은 시인은 '스님'이 되었다 환속한 경력을 가진 분이었는데,
이 시에서는 인생에 대한 관조와 함께, <어둠>이란 단어를 독창적 상징으로 쓰고 있는 시라서 그렇게 말한 거다.
우선 읽어 보자.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고은, 눈길)

첫 행의 <이제 바라보노라>는 마치 영화에서 인트로의 역할을 하는 구절 같구나.
영화에서 과거를 회상하겠다는 부분과도 같은 구절.
말투는 조금 거창하고 경건한 느낌이야.
무얼 바라보냐면,
<지난 것이 다 덮인 눈길>을 바라본대.
화자가 살아온 인생길이겠지.
그리고 겨울처럼 냉혹한 그 길을 떠돌고 와
지금은 <낯선 지역>에 서 있는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시 같다.  

화자가 어떻게 살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온 겨울을 떠돌고> 왔다는 것으로 보아 많은 고난을 겪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이제 화자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이 오버랩된다.
이제까지 마음 속에서 폭풍이 휘몰아치고 성난 파도가 용솟음쳤다면,
이제 마음 속에 눈이 고요하게 내리고 있다.
세상은 지금 묵념을 드리는 것처럼 고요하다.
내가 살아온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가 가득 덮인다.
눈이 소복소복 덮이는 그 위로... 
시각적 효과를 위하여 '눈'이나 '겨울'이 동원되었지만, 사실은 화자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지. 

10행에 다시 <바라보노라>가 등장한다.
다시 시각적 효과를 통해 화자의 심리가 펼쳐지겠지.
그런데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바라본다고 했어. 
<소리 없는 아우성>과 같은 표현 기법이 쓰인 걸 알 수 있겠니?
<보이지 않는 움직임>에서 말이야.
움직임은 뭔가의 변화가 보이는 상태잖아. 역설적 표현이지.
그럼 도대체 이 사람은 뭘 본걸까?
보이지 않는 속에서도 움직이는 것.
그런 것은 <자연의 이치, 섭리>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늘은 무엇인가'
그리고 '대지는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화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보인다.
바로 '하늘과 대지'의 섭리지.
대지가 고백하고 하늘이 울리는 함성을 '귀 기울여 듣는' 것으로 화자는 수도자가 되는구나.

여태까지는 귀를 달고도 듣지 못했던 그 소리.
이제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고 외치고 있어.
화자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에 소복하게 쌓인 풍경을 보며 아까 얻는 <평화>로 가득하고,
                    안에서는 <어둠>만이 가득하단다. 

화자의 마음 안에 가득한 <어둠>은 보통 '어둠'이 상징하는 '악, 잘못, 죄스런 마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란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구별, 분별'을 버린 마음. '선악과 좋음이나 나쁨'을 버린 마음을 얻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밝은 곳에서는 기쁨과 슬픔이 나뉘잖아.
그런데 마음 속에 어둠이 가득하다는 것은 <판단>할 필요가 없는 참된 <평화>의 경지를 말한다고 봐야겠지.  

여기서 <어둠>이 평소와는 달리 <평화로운 마음의 표현>이란 상징으로 쓰였는데,
이런 것을 <독창적 상징>, <창의적 상징>이라고도 부른단다.
뭐, 별로 어려운 말도 아니지?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그 어둠을 얻게 된 기쁨을,
마지막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반복하고 있지.
좀 이해가 되니? 

겨울같이 흔들리고 시달리던 삶을 살아온 화자에게
이제 눈길같은 평화와 어둠같은 고요함이 찾아온 것이란다.
얼마나 마음 속 깊은 기쁨이 샘속겠니?
얼마나 소리쳐 기쁨을 표현하고 싶겠니?
그런 것을 고요하게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로 표현하고 있는 거야.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살아온 고은 시인은 최근 몇 년째 노벨 문학상 후보자로 거론되곤 했지.
한국에서 그것도 <시>처럼 번역이 불가능한 장르가 수상하긴 쉽지 않은 노릇이다.
아마 통일이라도 되면 시든 소설이든 수상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
그만큼 노벨상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상이란다.
고 김대중 대통령도 이북의 김정일과 평화회담을 진행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거든.
고은 시인의 <머슴 대길이>는 전에 읽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만인보>에서 10,000명의 개인사를 시로 적음으로써
이 민족의 삶을 형상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시인이 고은 시인이다.
이제 고은 시인의 <화살>을 한번 읽어 보자.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시위를 떠나자.
몇 십 년 동안 가진 것,
몇 십 년 동안 누린 것,
몇 십 년 동안 쌓은 것,
행복이라던가
뭣이라던가
그런 것 다 넝마로 버리고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이 소리친다.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저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
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
단 한 번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돌아오지 말자!

오 화살 정의의 병사여 영령이여! (고은, 화살)

어때? 짜릿하지 않니?
독재 시대. 저항의 기운이 열기처럼 솟구쳤던 그런 시란다.
물론 노래로 불리우기도 했지. 

'우리'라는 말을 처음에 쓰고 있구나.
동지 의식의 강조로 보인다.
<화살>은 <목표물>을 향해 조준하는 무기다.
군사 독재 정권이란 목표를 향해 <화살>이란 무기가 되어 날아가자는 선동으로 이뤄진 참여시지.  

화살이 가는 길은 정해진 길이 없단다.
허공을 뚫고 가야 한다.
앞서 누가 갔던 길도 아니다.
홀로, 외로이 허공을 뚫고 온몸으로 가야 한다.
마음만 조금 도와주는 그런 희생이 아니라, 온몸을 바치는 희생. 

저항하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감옥에 가서 썩을 수도 있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서는 돌아오지 말> 각오로 투쟁해야 함을 드러냈던 시란다.
과녁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자. 그리고 돌아오지 말자. 

참으로 비감했던 시대였다.
장엄했던 시대였다.
가진 것. 명예와 부 같은 것들.
누린 것.
쌓은 것.
이런 것들을, 행복했던 다사로운 나날을 넝마처럼 버려야 하는 희생정신.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시위를 떠나자.
몇 십 년 동안 가진 것, / 몇 십 년 동안 누린 것, / 몇 십 년 동안 쌓은 것,
행복이라던가 / 뭣이라던가 / 그런 것 다 넝마로 버리고 /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이 소리친다. / 허공 뚫고 / 온몸으로 가자.

저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 / 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 /
단 한 번 /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돌아오지 말자!

오 화살 정의의 병사여 영령이여!

이런 말들은 이제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구나.
일제 강점기에만 <속죄양> 의식이 있었던 건 아니다.
어떤 시기건 어두운 시기에는 누군가의 피가 여럿의 행복의 제단에 바쳐지곤 했던 것이 역사란다.
그런 역사를 쉽사리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

<캄캄한 대낮>은 절망적 현실 상황을 역설적으로 나타낸 표현이다.
대낮조차 절망으로 캄캄하게 여겨진다는 말이지.
고은 시인처럼 스님이기도 했던 만해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도 함께 읽어 보자.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어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어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 (한용운, 나룻배와 행인)

나는 나룻배고 당신은 행인이란 비유가 시종일관하고있다.
나룻배는 강물을 건너 주는 도구다.
당신은 지나가는 사람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중요한 것은 <행인의 강 건넘>일 것이다. 

당신은 이 강을 건너야만 하는 행인이다.
그런데 나는 나룻배로서 당신을 건너게 해 줄 준비가 다 되어 있다.  

2연에서 흙발로 나를 짓밟는 당신이 등장한다.
당신은 나를 고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기에, 당신을 싣고 강 건너로 갈 것이다.
아무리 깊은 물 빠른 여울이라도 나는 기꺼이 당신을 안고 간다. 

이 <나룻배>는 참으로 희생정신이 강한 존재이기도 하다.
참을성이 많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이 강을 건넘>이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이자 수단>에 불과할 따름이다. 

불교에서 뗏목의 비유를 많이 쓴다.
강을 건널 때 뗏목을 필요로 한다.
강을 건너고 나면 행인은 뗏목을 어떻게 해야 할까?
결코 행인은 뗏목을 머리에 이고 가지는 않는다.
강을 건너면 뗏목은 버리고 계속 가야할 뿐이다. 

일제 강점기에 제국주의 일본 세력과 투쟁하기 위하여 <공산주의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학교>를 세운 사람도 있고, 중국으로 가 <임시정부>를 세운 자도 있다.
이들의 <공산주의>, <학교>, <임시정부>는 모두 뗏목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뗏목이 아니다.
뗏목은 강을 건너면 버리는 것이다. 

민우야.
세상을 사는 일은 강을 건넘과 유사한 점이 많단다.
행인인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도구>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학교>도 다니고 <졸업장>도 딴다.
그렇지만 <학교>나 <졸업장>은 뗏목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행인의 걸음걸이인 것이다. 비유가 너무 어렵니? 

3연에서 이 나룻배는 <당신을 기다린>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버린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러나 당신은 언제든지 오실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간다고 했다.

낡아 가는 것은 <고난>이겠다.
일제의 고난, 삶의 고뇌.
그것은 날마다 날마다 되풀이된다.
그렇지만 당신이 언제든 오면, 나룻배가 필요하기에 당신을 기다린다고 했다.

나룻배는 바로 <불법><불도>와도 같은 진리를 추구하는 길일 수도 있다.
독립운동가에게는 <독립군>과도 같은 단체가 될 수도 있고.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나룻배>가 아니라 <행인>이라는 인식이다.
<나룻배>는 행인의 강 건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고귀한 떠받듦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용운 스님에게 있어 <불교>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민족이 이민족에게 짓밟히는 모멸을 당하는 것을 보고,
불교란 나룻배로 강을 건너가기를 강렬하게 소망하는 시로 읽을 수도 있겠구나.
나룻배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널 수 있는 도구다.
물론 당신은 강만 건너면 나룻배는 거들떠 보지도 않지만 말이야.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어요  

이렇게 독립을 간절하게 기다렸던 시인일 수도 있겠다.
어떤 치욕도 헌신적으로 인내하는 <나룻배>의 비유는
<행인>의 물 건넘을 간절히 소망하는 시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는 나름대로 험난한 파도를 넘어야 했고,
독재 정권 하에서는 또 다른 폭풍우를 견뎌야 했던 민족.
지금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나라로 남은 민족.
동족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을 일상으로 여기고 대립이 평상이 된 현실.
그렇지만,
아직도 우리는 <나룻배>가 필요하다.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라는 팝송이 있었듯,
민우가 건너야 할 세상의 바다에 어떤 <나룻배>가 소용이 될지...
글쎄다.
혼자서 헤엄쳐야 하는 정도로 외톨이가 아님을 고맙게 생각하렴.
그리고 부모가 <나룻배> 역할을 해줄 수 있을 때 유용하게 쓰는 것도 지혜가 아닐까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