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마음이 바빴구나.
선생님들 대상으로 힘든 강의가 있어서 그거 마치고 나니깐 힘이 빠졌던 모양이다.
오늘은 송수권의 시를 몇 편 읽어 보자.
송수권의 시에서는 '설움', '울음' 이런 '한 恨'이 많이 묻어나는 시들이 제법 있다.
우선 그의 '산문에 기대어'부터...
'산문'은 산에 있는 문이니, 절의 입구를 뜻하는 문이 되겠다.
절문에 기대어 있으니 무슨 생각엔가 잠긴 화자가 등장하겠지.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茶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 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 물 속에 비쳐옴을 (산문(山門)에 기대어)

'서프라이즈 진실 혹은 거짓' 같은 데 보면 느닷없이 사람이 죽기도 하고,
남은 가족이 슬퍼하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지.
실상 우리 주변에서 죽음이란 사건을 잘 일어나지 않는데 말이야.
그러다가, 어느 날 자기 주변에서 당황스런 뜻밖의 죽음을 겪게 되면 큰 충격을 받곤 한단다.
엄마도 작은 이모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나서 한 5년을 정신적으로 방황했던 일이 있어. 

옛날에 어떤 어머니가 계셨는데,
무지무지 사랑하던 자기 아들을 그만 읽고 말았대.
마침 그 동네에 부처님이 지나가고 계셨어.
그래서 그 엄마가 부처님께 하소연을 했지.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자식을 앞세웠냐고...
도대체 왜 내 자식이 죽었어야 되냐고...
자식을 다시 살려 줄 수 없겠느냐고...
그랬더니 부처님이 이 마을을 다 다니면서, 누구도 죽지 않은 집이 있으면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했지.
그래서 어머니는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아무도 죽지 않은 집이 있는지 샅샅이 물으며 다녔대.
그리고 깨달았다. 죽음은 어느 집에나 있었다는 것을 말이야. 

송수권이 군대갔다 나왔을 때 남동생이 죽었다든가 그런 사연이 있었대.
단짝으로 붙어 지내던 피붙이가 어느 날 죽었다는 그런 사정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힘들 거야.
엄마가 그랬거든. 엄마가 대학을 이모랑 같이 안동에서 다녔잖아.
둘이 붙어 살면서 얼마나 친했겠어. 그랬는데 언니가 어느 날 없어졌다 생각해 봐.
정말 숨쉴 때마다 모든 생각에서 그 죽은 사람 생각밖에 더 나겠냐고.
잠을 자면 꿈에 나와서 괴롭고... 눈을 두면 그곳마다 추억이 떠올라 괴롭고...
밥을 먹자니, 너는 없는데 나는 여기서 밥을 먹는구나... 그래도 살겠다고... 이러고 가슴이 미어지고... 

그런 마음을 쓴 시야. 산문에 기대어. 
산문에서 바라본 죽음. 그러니까, 산문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 지점이 되는 것이지.
정지용의 '유리창'에서처럼, 단절의 기능. 그리고 연결 또는 소통의 기능.
산문 이쪽은 이승, 저쪽은 저승으로 나뉘지만, 거기서 만남의 장소가 되는 것.
'가을 산 그림자(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은
바로 산 그림자를 보고 동생의 눈썹을 떠올린 형상화일게다.
아니면, 기러기라도 날아가는 그림자가 두엇 비쳤는데, 그게 누이의 눈썹을 떠올렸을 수도 있고.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아~ 아까 내가 쓴 거 기억나?
나는 지금도 여기 살아서 보고 있구나. 이런 원망섞인 목소리. 나는 밥을 먹고 있구나... 이런 거. 

깨끗한(정정한) 눈물을 <절제>하는 모습을 '돌로 눌러 죽이'는 것으로 표현했다.
그 눈물 흘린 날들을 따라 가면, 즈믄 밤(천 날, 千日)이 지났구나. 누이가 죽은 지 3년이 되었단 이야기야.
<강이 일어선다는 말이나,
강물 깊이 가라앉은 말씀이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온다는 말이나,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이나
산다화(동백꽃) 한 가지 꺾어 건네이던 것>은 세상 모든 것에서 누이의 죽음을 떠올렸던 슬픈 날들에 대한 이야기겠다.
꿈에서나 현실에서나 그렇게 잊지 못하던 누이의 모습 말이다. 

2연에서 기러기가 보이는구나. 그걸 보고 누이의 눈썹이 떠올랐겠지.
이제 누이의 무덤에라도 왔나 보다.
내가 한 잔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니 네가 마시렴.
너와 나는 오랜 시간 지나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게 될 날이 있겠지?
죽은 사람과는 이렇게 추억을 통해서도 만나지만,
미래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기도 하지. 그런 사상을 <윤회>라고 한단다.

마지막 연에서는 '누이야 너는 아는가~'하고 자꾸 부르면서
애닯은 마음을 심화하고 있단다.

누이의 죽음을 <애상적>으로 <회한어린 독백체>로 추억하고 있지.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가 화자의 슬픔을 또렷이 그려내고 있구나. 

박재삼의 <밤바다에서>도 비슷한 모티프를 가진 시란다.
모티프는 <시를 쓰게된 동기>같은 말인데, 영어의 모티브와 같은 말이다.
여기서는 '누님'의 부재를 슬퍼하는 화자가 등장하지.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진정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천하에 많은 할 말이, 천상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 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박재삼, 밤바다에서)

1연에서 누님의 치맛살 곁에서 누님의 슬픔을 함께하지 못해 바닷가에 선 화자.
바닷가에 서면,
가슴 울렁거리고 눈에 눈물 어린 화자.
일렁이는 바다의 파도를 보며 <차라리 진정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고 싶다고 한다.
어떤 마음인지 알겠니?
절친하던 육친의 상실이 불러오는 가슴 울렁이는 육체적인 슬픔 말이야.
그 슬픔을 말로 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하늘의 별처럼 많겠지만,
아파할 수밖에 없는 화자.
3연에서 누님은 잠드는 섬처럼 형상화되고 있어. 섬은 저만치 멀리 있는 거잖아.
나는 섬에 도달하지 못하는, 그러나 끊임없이 섬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가늘지만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서러운 심사가 잘 드러나 있지. 

다음엔 3년 전에 수능에 출제되었던 송수권의 <지리산 뻐꾹새>를 한번 읽어 보자.

여러 산 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꾹새가
울음 울어
떼로 울음 울어
석 석 삼년도 봄을 더 넘겨서야
나는 길뜬 설움에 맛이 들고
그것이 실상은 한 마리의 뻐꾹새임을
알아냈다.

智異山下(지리산하)
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 내면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또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
알았다.

智異山中(지리산중)
저 連連(연연)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오래 남은 추스림 끝에
비로소 한 소리 없는 江(강)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줄기가
하동쪽 남해를 흘러들어
南海群島(남해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智異山下(지리산하)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이 細石(세석) 철쭉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 (지리산 뻐꾹새)

이 시는 <슬픔의 본질>을 탐구한 시다.
도대체 나의 이 '슬픔'은 어떻게 생겨서 어떻게 변화하여 오늘까지 이른 것인가에 대한 탐구.
앞에서 동생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이야기가 <산문에 기대어>에서 나왔잖아.
그런데 그 슬픔은 마치 뻐꾹새 울음이
<오랜 세월 지나> <많은 공간 거쳐> 지금 나에게는 어떤 하나의 경지.
시 속에서 진하게 우려나 있고, 삶의 모든 곳에서 진한 이미지로 각인되어버린 그런 마음을 그린 거야.  

1연에서 울음을, 많은 울음을,
석 석 삼년 = 3*3*3 = 27년이니깐 한 30년 울었던 거다.
그 세월을 더 지나고 나서야 나는 길뜬(게으른) 서러움에 적응이 되었다는구나.
서러움의 맛을 알게 되었다는 거지.
이 앎은 지적인 습득이 아니라, 그저 설음에 익숙해져버린 상태겠구나.
그리고 그 슬픔의 원인은 <한 마리의 뻐꾹새> 였음도 이제 알겠단다. 

그 뻐꾹새의 울음은
2연에서 智異山下(지리산하)
3연에서 智異山中(지리산중) 거기서 흐른 물이 강이 되어 다시
4연에서 남해로, 섬들을 밀어 올리고
5연에서 지리산 (꼭대기) 細石(세석)에까지 오랜 시간과 긴 거리를 거쳐 뭔가를 형성한다.
그렇게 형성된 것이 나의 슬픔의 실체였던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뻐꾸기는 '한과 설움을 지닌 원혼이 뻐꾸기로 환생'한다는 설화에서 차용한 것 같다.
또 이 시에서는 '알았다’, ‘보았다’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시의 주제라면 <한과 설움을 극복한 이후에 승화된 삶의 아름다움> 같이 쓸 수 있겠다.
아니면 <뻐국새 울음을 통해 깨달은 설움의 근원 탐구> 정도거나...

이 시어 덧붙인 해설을 한번 읽어 보자.

민족의 원형적 심상을 노래한 절창

우리민족의 한의 정서나 슬픈 비극적 체험의식을 가장 잘 나타내줄 수 있는 객관적 상관물의 새가
바로 접동새와 뻐꾹새다. 접동새의 한스런 슬픔의 정서가 김소월의 <접동새>에서 절창되었다면.
송수권의 <지리산 뻐꾹새>는 뻐꾹새에서 환기되는 그런 점을 절창하고 있다.

이 시의 문체적 특징은 서술체로 되어 있고 . 시적 화자인 "나"(주어)가 보고 느낀 점을
'알아냈다" "알았다" "보았다"(3연, 4연, 5연)라는 술어동사로 각 연을 마무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각동사와 시각동사로 통일 되어 있고 . 더 나아가 시 전체 분위기를 '운다'라는 청각어가 압도하고 있어
독자들의 이해가 쉬운 장점이 있다.

1연과 2연은 여러 산봉우리에서 울어대던 뻐꾹새 소리를 처음에는 여러 마리가 우는 울음인줄 알았으나
실상은 한마리의 뻐꾹새 울음인 것을 오랜 세월이 지나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그 소리 는 '뒷산 봉우리 받아넘기고/또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긴 한 마리의 울음이었다는 사실 확인이다.

이는 곧 미당 서정주가 국화꽃 개화의 비의(秘儀)를 ‘한’송이에다 압축시킨 숫자개념의 기법적 효과와 같다.
여러 송이가 아니라 오로지 ‘한’송이요, 여라 마리가 아니라 ‘한’마리로 압축․극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다음 3연, 4연, 5연으로 오면 이미지의 공간구조가 확대된다.
즉 산에서 울던 뻐꾹새의 울음이 3연과 4연에 와서는 드디어 눈물이 되어 섬진강을 이루어 남해로 흘러들고,
마지막 5연에서는 그 눈물이 피눈물이 되어 철쭉 꽃밭을 벌겋게 다 태우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뻐꾹새를 노래했다고 다 절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시가 절창일 수 있는 점은 민족의 원형적 심상을
이미지의 전이(轉移)와 변용이란 시적 장치를 원용해 비극감을 압축․극대화 시켜줌과 동시에 덤으로
민족사(6․25)의 비극적 공간이란 사회학적 상상력까지 자극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 이유식 

암튼 도대체 이 슬픔이란 것은 어떻게 형성된 것이냐? 그것을 탐구한 결과를 시로 형상화한 거라고 보면 되겠다. 

마지막으로 그의 <여승>이란 시를 한번 보자.
시에서 <여승>이란 소재가 많이 쓰이지?
교과서의 '백석의 여승', 또 '조지훈의 승무'에서 두 뺨이 고와서 서러울 정도로 이쁜 여승 ㅋ
이 시에서의 여승은 어린 아이가 바라본 아름다운 '여승'이란다.
어려도 사내는 사내다. ㅎㅎㅎ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女僧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릿대를 든 女僧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小僧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 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되돌라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뒤로 나는 女僧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女僧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事物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詩를 쓴다. (여승)

어린 시절의 '봄날'을 회상하고 있지.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낀 풍경은 <병자>의 모습과 오버랩되어 조금 서러운 풍경이다.
고뿔은 <코+불>에서 나온 말로, 감기다. 여기서는 심한 병을 앓는 아이를 뜻한다.
이 아이는 창호지에 <구멍>을 내서 세상과 통하고 있다.
그 <구멍> 밖에서는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고깔 쓴 여승>이 있지.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 

어린 시절의 추억은 꼭 어떤 상황이 그대로 기억에 담겨있는 건 아니란다.
어떤 감촉이나 향기만으로도 한 순간이 오롯이 살아날 수 있다.
마르셀 푸르스트라는 작가는 어린 시절 먹던 <마들렌>이란 빵 냄새를 떠올리면서 7권이나 되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썼단다.
김종길의 <성탄제>에서도 어린 시절의 <서늘한 아버지 옷깃>과 <새빨간 산수유 열매>로
아버지의 사랑을 떠올리고 있잖아.
여승의 음색(목소리의 아름다움), 설움에 진 눈동자,
그 당시의 낮달까지 아직도 아련하게 마음에 잔상으로 남아있구나.
(낮달에 포름한 향내가 풍기니 공감각적 심상이 있다.)
참 강인한 인상이었던 모양이다.  

어린 화자는 너무 마음이 안타깝고 아쉬워서
바리때(스님의 밥그릇, 4개가 한 벌이 된다)를 들고 시주를 얻으러 다니는 여승을 따라 나선다.
그걸 알지만 그저 나아가던 여승은 마을 입구 네 거리에 가서야

(도련님, 小僧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보셔얍지요.)

이렇게 합장을 한다. 아마도 괄호를 한 이유는 환청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마음 속 서늘한 기억이 화자에겐 오래오래 남아있던 것인데,
화자는 아직도 그 때의 순수함을 추억하고 있단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事物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詩를 쓴다. 

화자에게 그 마음.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그 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이 넘쳐 흐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고 한다.
그것이 이 시의 주제가 될 수 있다.
어린 시절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이 넘치는 시 세계 추구> 이런 것. 

민우도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마음을 다 간직하고 있던 어린 시절이 있었겠지.
그 세계가 조금씩 쪼개져 나가면서 어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만,
또 그 세계의 온기로 평생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시란 것은 이렇게
다른 사람의 인생 경험을 통해서
내가 해보지 않은 경험의 속내까지 읽어내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소재가 된단다.
사람들은 이렇게 다양하게 아프고 쓰라린 추억들을 담고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마음을...
그래서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일이 소중하다는 것을
시를 읽으며 배워가기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강의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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