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날마다 시를 읽어주는 이유를 알까?
글쎄.
나중에 나중에 좋은 아빠라고 스스로 위로하려는 걸 수도 있고,
정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도 하고...
뭐, 이런 저런 생각의 짬뽕이야.
요즘 추세가 워낙 퓨전이잖아. 

오늘은 인간의 언어에 대한 시를 한 편 소개할게.
문덕수의 '꽃과 언어'란다.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문덕수, 꽃과 언어)

전에 한번 이야기한 김춘수의 '꽃을 위한 서시'나 신동집의 '오렌지'와 유사하지.
이 시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다.  

'언어'의 트라이앵글이 있어.
<라캉>이란 프랑스의 언어학자의 이론인데...
사물에는 원래 이름이 붙어있는 것 같이 우리는 착각하며 살지만,
사실 그 '이름'이란 것, '존재'의 본래 모습이란 것을 생각해 보면,
'이름'은 가리키는 진짜 대상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 '컴'이 하나 있다고 해 보자.
너는 어떤 컵을 상상했니?
보통 머그컵이나 유리컵을 생각했겠지?
손잡이가 달린, 우리 부엌에서 물마시는 컵.
아니라고? 손잡이 없는 컵을 생각했다고?
그럼 재질은?
종이, 플라스틱, 알미늄, 쇠, 질그릇(도기), 그걸 구운 자기, 유리, 크리스탈... 끝도 없지.
그렇게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재질도 다른 것들을 우리는 통틀어서 <컵>이라고 이름붙인단다. 

실제 컵과
우리가 이름붙이는 컵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
그것을 마치 '거울'에 비추인 듯이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뇌>가 하는 일이다.
인간의 관념 속에서는 '작은 종이 컵'과 '큰 강철 컵'을 하나의 밭두둑 안에 둔단다.
그 밭두둑을 한자로 '범주'라고 부르고, 영어로 '카테고리'라는 말로 쓴다. 

인간의 관념 속에 갈래지어진 밭두둑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고,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국가나 문명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단다.
그렇지만 하나의 단어에는 하나의 물건이 대응되는 것처럼 우리는 착각하며 살고 있지. 

꽃을 제대로 이름불러 보려고 언어를 갖다 붙였대.
그러자, 제대로 들러붙지 못하고,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는 <나비>가 되어 <쓰러진다>고 했어.
뭐, 나비가 어떻다는 게 아니라,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는 일이 그만큼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겠지. 

언어는 원래 본질을 적확하게 콕 찍어서 표현하기 어려운 거란다.
그래서 3연에서 <꽃의 둘레에서 /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진다고 했지. 

예를 들면, 젊은 남녀가 호기심을 가졌을 때 '사랑해'라는 말을 나눴다고 해 보자.
그 말은 무얼 의미할까?
나 너한테 관심있어~ 정도?
아니면, 우리 좀 사귀어 볼래~ 까지?
더 나아가, 결혼을 전제로 만나면 좋겠는데~ 만큼?
결정적으로, 평생 당신만을 위해서 내 모든 걸 바치겠다는 지경?
그 사랑은 어머니가 자식에게 품는 사랑과도 또 다르고,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신 인류에 대한 사랑과도 다르단다.
모든 관념은 다 다르지만 같은 언어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는 거지. 

마치 인간이 그 존재유무를 인식하지도 못하는 <무의식>이
인간의 <의식> 저 너머에서 검은 어둠 속에 잠겨 있듯이 말이야. 

그렇지만, 늘 그렇게 언어가 빗나가기만 하는 것은 아니야.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이렇게, 어떤 언어는, 어떤 시인은, 어떤 학자는 제대로 언어를 구사하기도 했단다.
그렇게 언어를 잘 구사한 사람은, 어쩌면 깊은 사색의 본질에 다가간 사람일 수도 있어. 

부처님께서 '부처라 하는 것은 이름이 부처일 따름이지 진짜 부처가 아니다'고 했던 것이나,
노자가 '진리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진짜 진리가 아니다'고 했던 것이나,
예수님께서 '가장 낮고 가난하고 아픈 자를 나를 대하듯 하라'고 했던 것이나,
공자가 '자기에 대한 이기심을 버리고 예의로 돌아가라'고 한 것이나,
아인슈타인이 '절대적인 시공간은 없다'고 한 것이나,
달마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한 것이나,
소크라테스가 '앎은 불완전하다. 너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부터 깨달아라.'고 하는 것들... 

한결같이 진리는 '이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잖아.
모두 똑같이 약속이나 한 듯이, 진리는 '이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형식을 띠고 있단다. 

그렇지만, 이런 언어들이 오래 남아 <고전>의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 경지에 다다랐기 때문이겠지. 

존재 파악이 어렵긴 하지만, <꿀벌>처럼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도 하니,
우리가 읽어야 할 책들은 바로 저런 <고전>이 아닐까 싶구나.
오늘은 조금 뻣뻣한 이야기였지만,
살면서 읽어야 할 것이 정말 많아 보이지만,
진리에 가까운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는 껍데기일 뿐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로 맺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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