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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6 - 4부 4권 ㅣ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6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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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묘한 거야. 참말 묘하고도 신비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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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하부층, 소위 그 대다수인 민중 말일세.
이건 보는 사람에 따라 관점이 달라진다는 것과는 달라.
솔직히 말해서 민중이라는 큰 무리 그 자체, 난 모르겠어. 모르겠거든.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대다수인 그들 민중 그 큰 무리를 통하여 나는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역시 그들을 알 수 없듯이 인간 역시 오리무중이야.
그건 크나큰 절망, 절망이지.
어쩌면 그 절망은 역사의 본질 같은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구.
완전한 지배, 완전한 복종, 한다면 역사란 존재할 수 없는 거 아니겠나?
그런 뜻에서 절망의 본질이란, 억지같은 얘긴지 모르지만, 명멸의 이 끝없는 되풀이 그 자체인 것 같은 생각도 들어.
복종의 존재인 저 거대한 무리는 그러나 결코 복종 아니하면서 목적에 이르지도 못한 채 사라져가며 또 사라져 가고.
결코 그들은 그 아무에게도 지배된 적이 없고,
어떤 힘도 그들을 완벽하게 지배한 적은 없었다.
.... 상층과 중간층은 중심에서 퉁겨나간 한탄 비말에 불과한 거 아닐까.
대다수 민중이야말로 거대한 여울이다. 여울.
그 거대한 집단, 꿈틀거리는 그 집단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내게 있어서 그 행방은 늘 불가사의하면서도 불길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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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와 제문식의 이야기를 빌려서 저자가 펼치는 '민중론'이다.
4부가 쓰여지던 1980년대는 그야말로 '민중'의 시대인데,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930년대의 제국주의와 민중의 전쟁과도 겹치는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소위 '민중론'이라는 운동의 방향은 민중에 대한 굳건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앞서 마지막에서 이야기했듯, 그 행방은 늘 불가사의하고 불길한 것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용어로 '다중'의 지능이란 것 역시 그렇게 꼬리를 내리기 쉬운 것 아니던가 말이다.
4권의 마지막 권에서는 홍이와 김두수의 만남,
윤국이와 숙이의 운명이 엇갈림,
그리고 홍이를 찾아가는 임이의 모습,
만주로 떠난 여성운동가 유인실.
또 남경학살 이후의 일본인 지식인들의 다양한 논의들... 이런 것들이 비교적 적실하게 드러난다.
다른 권들에서 '근대 여성론'이나 '민중 해방론' 따위가 지루하게 '교술'적 톤으로 진행되어온 것이 비하면, 그래서 속도감이 확 나면서 읽을 수 있었다.
면도를 하러 들어갔다가 신병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을 그은 친일 귀족 조용하의 죽음도 쇼킹하다.
쇼킹한 부분을 쿨하게 처리하는 것이야말로 박경리 선생의 장기다.
귀녀의 죽음에서 보여준 문체의 시크함은 조용하의 죽음에서도 도드라진다.
"이상하군. 그럼 어딜 갔지? 창 밖으로 날아갔나?" 하다가
제문식의 안색이 싹 변한다.
허둥지둥 화장실로 달려가 문을 열고 들여다 본다. 다음 순간 제문식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도하 신문에 조용하의 자살은 일제히 보도되었다. 남몰래 불치의 병을 비관해오다가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는 대개 그런 내용이었다. 어떤 신문에는 그 불치의 병은 폐암이었다고 씌어져 있었다.
김두수가 홍이를 찾아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생광스럽다'는 말이 등장한다.
'날 生'에 '빛 光', 광이 나게 된다는 의미로, '영광스러워 체면이 서는 듯 하다, 아쉬운 때에 요긴하게 쓰게 되어 보람이 있다'는 뜻이다.
윤봉길의 의거가 삐걱거리던 중국과 조선의 관계를 일거에 희망을 지니는 쪽으로 돌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재미있고,
만주 사변을 거쳐 난징 학살까지 자행한 일본의 셈속이 '일본 군부의 작전'이라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중국 땅이 일본 땅의 몇 배인가. 중국의 인구는 일본 인구의 몇 배인가?
대저, 잔인성이란 용기있는 자보다 용기 없는 자의 속성인데, 일본 민족은 매우 소심하고 겁이 많은 민족인 게야.
자고로 칼로써 다스려지는 백성이 그런 것은 당연지사.
대륙에다 개미처럼 풀어놓은 군대, 그들을 짐승으로 만들지 않으면, 악귀로 만들지 않으면 어쩌겠나?"
"그러니까 병사들의 양심이나 공포심을 마비시키기 위한 작전의 하나였다는 그 말씀이군요."
송장환, 권필응, 정석 등의 사나이들이 만주에서 벌였던 <무장 투쟁>의 역사를 이렇게 소설 속에서나마 읽는 일은 '불행중 다행'이다.
이제 5부로 넘어가게 된다.
제대로 쓰라린 역사는 이제 본격적으로 살갗을 파헤칠 텐데... 읽기가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