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5 - 4부 3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5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인피를 써서 사람이지 삼강오륜도 모리는 짐승만도 못한 놈들.
품속에 땡전 한푼 없어도 나는 왜놈의 짐만은 안 집니더." 

인실이 바닷가에서 만난 지게꾼 노인의 이야기다.
마음 밑바닥에서 진심으로 경멸을 보냈던 왜놈들 사정을 이런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힘으로야 눌리지만, 결코 너희같은 비문명인, 곧 야만인들에게 우린 질 수 없다는 오기가 가득하다.
오늘날의 현실을 보면... 암담하다.
백인들을 보면 헤헤거리다가도, 살집 좀 거무데데한 동남아 사람들 보면 경멸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그야말로 문명의 미아가 되어버린 불쌍한 사람들이 되어버린 거나 아닌지...   

   
 

 "조선 농민들은 선비 정신의 토양이에요.
도 선비 정신의 씨앗이 뿌려진 대지이구요.
양반 계급이 학문을 독점하고 있었지만,
하여 무학이지만 무식은 아닌 거예요.
그들은 가난하지만 예절이 스스로의 존엄을 지탱한다는 것을 알구요.
조선 백성들이 일본인을 향해 즐겨 쓰는 말 중에 상놈이란 말이 있어요.
그것은 신분을 말함이 아닙니다.
예절을 모른다. 사람의 도리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 아이 어른 할 것없이 일본인 멸시의 뿌리를 뽑을 수 없을 거예요.
결코 일본은, 끝내 조선을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실은 오가다에게 일장 훈시를 한다.
일견 옳기도 하고, 일견 잘못된 부분도 있다.
그들의 옳곧은 정신이야 승리를 거둘 만도 하지만,
현실을 살피지 않은 '정신적 승리법'은 허무하기 그지없다.
또, 조선이란 전제군주국가가 민중을 유교적 이념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세계에서 유일하게 문자까지 만들었고, 삼강행실도 등을 대거 배포한 국가임을 생각한다면, 유인실처럼 민중을 근대적 개념으로 상정하는 일도 하나의 오류를 배태할 수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 일본인이면서 사해동포주의자로 등장하는 오가다의 말도 심난하다.

   
  "암중모색이지 뭐, 인생이란 끝없이 쓸쓸해.
저승길을 가는 것처럼. 이승길 저승길 따지고 보면 다를 게 하나도 없는 거요."
"세상이란 늘 이랬었지... 지겨워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지식인의 혓바닥으로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그 혓바닥이 짤려서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또 갈아입고 나타나지만 기는 놈, 서는 놈, 나는 놈, 변함이 없이 따로 따로..."
"그렇지요, 사람사는 게... 지겨워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그렇지요, 뭐.
천지만물이 모두 다, 진화가 어디 있어요? 되풀이지 뭐." 
 
   

박경리 선생이 건너가고 있는 일제 강점기나 신식민주의가 포장된 신자유주의 현실이나,
되풀이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진실이 아닐까 싶다.
과거를 톺아보는 일에서 의미를 찾으려 아무리 발버둥쳐봤댔자,
인간을 배태한 <토지>는 인생을 먹여살리기도 하지만, 한없이 쓸쓸하게도 하는 그런 것임을 보고 진저리를 치는 듯 하다. 

일본의 지식인 중에서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는 <비 내리는 시나가와 역>에서 조선의 독립과 독립 운동에 대한 뜨거운 지지를 나타내기도 한다.
혼란스럽지만 지식인들의 암중모색은 무의미하지만은 않다. 

산골에 사는 휘에게 관수는 딸 영선을 데려가 혼인을 시킨다.
휘에게 마음을 두던 순이의 실종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나기도 하고...
이런 이야기들이 <토지>의 젖줄을 받아 자라는 이들의 힘인데, 4부로 넘어오면서 그들의 서사가 약해진 것은 못내 아쉽다.
그렇지만, 독립을 향한 꽃맹아리들이 움찔거리는 그 시대에,
그저 무지랭이들의 꿈틀거림만 기록하는 것도 또한 지식인의 할 노릇이 아니었으리라. 

친일파로 귀족 지위를 산 조씨 집안의 작은 아들 조찬하는 아내가 일본인이다.
일본 여자들은 이방인과 결혼한다는 갈등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조선 여자 유인실은 오가다를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그와 결혼하지 못한다.
"조선 여자는 아예 쇠대문을 내려 놓고...
모화 사상이 지배적이던 시절에도 여자가 이민족을 맞아들인다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보다 더한 일이었다.
그들은 삶의 모든 것을 잃었다 생각했고, 세상도 그들에게 가혹했다.
그들은 고국과 절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유인실은 사회주의자 아닌가.
사람은 누구나 관습적 의식과 사상에 다소는 간격이 있게 마련이지만,
인실 씨는 어느 측면에서도 그 도랑이 너무 깊고 넓다."  

시대는 흐르고, 대지는 멈추었다.
그러나 그 대지도 조금씩은 바뀌게 마련이고,
강물은 다시 순환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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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소설에서도 간혹 어긋난 내용을 찾게 되는데, 이제 고인이 되어버린 그에게 말해줄 수도 없고...  

하기는 내 나라의 닭 돼지가 되어 살지언정 왜놈의 종은 아니 되겠노라 한 독립의사도 있었지만요...
유인실이 오가다에게 한 말인데, 김구의 글에 보면 박제상이 했던 말로 보인다.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이, "내 차라리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이렇게 말한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김구, 나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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