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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2 - 3부 4권 ㅣ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2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지리산의 남쪽 자락... 하동 북촌에 가면 논밭을 파헤친 자리에 코스모스를 뿌려 가을이면 코스모스 축제란 것을 벌인다.
들판을 가로지른 색색의 꽃들과 메밀꽃밭 그 소금을 흩뿌린듯한 풍경이 자못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입으로 들어와야 할 곡식을 심어야 할 자리에 비료주고 꽃을 심는 일은 참 슬픈 일이다.
북촌에서 2번 국도따라 하동을 지나 평사리에 이르면, 악양 벌판에 하얗고 노란 허수아비들이 가득하다.
토지의 배경이 된 평사리 최참판댁 아래쪽 부부송이 아늑한 널따란 벌판은 온통 허수아비들 천지다. 별꼴이다.
보통의 허수아비들이 작대기 위에 밀짚모자 하나 얹고 티를 하나 입으면 그만인데, 악양벌의 허수아비들은 온통 도깨비 꼴이다.

토지란 소설이 되어가는 꼴도 역시 그러하다.
처음부터 시대착오적 인물의 하나인 최서희가 뇌까리는 말.
과거는 무의미한 것이며, 없는 것이며, 죽은 것이다.
현재만이 살아있는 것, 미래만이 희망이다.
아이들은 현재요 미래다.
과거에서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의 미래는 과연 허재비들의 탈놀음에 불과해지지 않았는가 말이다.
나는 진정 박경리가 이 말을 시대착오적 인물 최서희의 착오라고 비판적 서술을 위해 기록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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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같은 강물이요 다 같은 뗏목인데 혜관은 섬진강과 해란강이 왜 다를까 생각한다.
아름답기론 섬진강 편이다.
조촐한 여자같이, 청아한 소복의 과부같이, 백사는 또 얼마나 청결하였는가.
산간의 강물과 대륙의 강물, 모두 숱한 사연을 흘려보낸 강물.
혜관은 기화를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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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화를 둘러싼 서의돈, 이상현, 혜관, 그리고 정석...
흘러가는 강물같은 남자들은 누구도 기화의 딸을 맡지 못한다.
거기 대지의 모신처럼 버티고 앉은 앙다문 입술만이 도드라진 창백한 얼굴의 최서희만이 그대로 토지에 남아서 양현을 맡아준다.
사나이들은 만주 벌판으로 일본으로 뛰면서 역사의 강물을 되돌려 보려 날뛰지만,
아낙네들은 그저 아침저녁 때거리를 걱정할 뿐, 흐름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것 같다.
그래서, 지나가버린 과거에 대하여 그닥 집착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제 자식 배 불리기에 흐뭇할 뿐.
토지란 그런 것이다. 그 땅에서 어떤 놈이 농사를 짓느냐에 따라 성을 내거나 만족할 필요 없는 것이 토지다.
그저 벼가 쑥쑥 자라고, 그 벼를 먹고 당차게 자랄 아이놈들만 있다면... 토지는 만족이다.
"어떻게 보면 주서방 그 사람은 모든 인간적인 요소를 다 갖추었다고나 할까요?
욕심만 빼고,
그런데 조금도 위대하진 않다 말입니다.
비극적인 요소를 낙천적으로 발산하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지만,
어린애같이 무심한가 하면 수천 년 묵은 구랭이 같고..."
"좋으면 화를 내고 싸움할 때 존대 쓰고."
"네 맞아요. 하하하. 염치 바르고 마음이 여리고 소심하면서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지요."
"뭐라할까, 여자들한텐 좀처럼 없는 성질인데 여성적인 걸 느끼거든."
송장환가 이상현의 대화에 드러난 주갑이의 성품인데...
작가가 대지의 어미 <토지>와 가장 그럴싸하게 어울려 맞는 품성을 가진 인물로 싸안는 자가 바로 주갑이 아닌가 싶다.
위대하다고 하지 않고 늘 남의 밑바닥에서 더럽게 뒹굴지만,
그래서 무심하게 태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을 가진 존재.
올바른 염치로 콩 심으면 콩을 내고 팥 심으면 팥을 내는 그런 존재. 토지와 주갑이.
"불운할 때는 불운만 찾아 온다."
갈증과 공포,
공포는 갈증을 잊게 하지 않는다.
갈증은 공포를 감소시켜 주지 않는다.
서로가 보강하듯,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몰고 간다.
방대한 최참판 댁 땅과 막대한 재산이 마치 허섭쓰레기같이...
서희가 부산에서 맹장염에 걸려 아픈 것을 걱정하는 환국이.
최서희이 아이들이라면,
바로 그 자존심 깊은 토지의 어머니의 두 자식인 환국이와 윤국일 터인데,
나라를 찾아 돌아가라는, 환국.
그 나라를 윤택하게 하라는, 윤국.
이름을 지은이의 소망이 담뿍 배어있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삶이란,
지적인 인간의 성찰하는 삶이란,
윤택한 토지 위에서 벌어지는 풍족한 남과 스러짐의 과정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힘. 그것이리라.
소심하면서 염치 바르고 자존심 하늘 찌르는 주갑이 성질처럼 넉넉하게... 토지와 하나가 되어...
허수아비들의 굿잔치에 눈물도 보이고, 간혹 웃음도 지으면서 사는 힘. 그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