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많이 풀렸구나.
나는 추운 걸 싫어하다보니 따뜻한 날이 좋다.
지구 온난화니 뭐니 해도 사람은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야. 

아빠가 자랄 때만 해도, 집안은 겨울이면 추운 곳이었단다.
아궁이의 연탄 한 장의 힘으로 방은 1/10만큼 아랫목이고, 남은 곳은 윗목이었단다.
기형도 시에 나오잖아. '내 유년의 윗목'
아파트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성정에도 시린 유년의 기억이 담겼을지 몰라.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한반도의 특성상,
아래위가 집들로 둘러싸인 아파트가 난방과 통풍에 유리했단 생각이 든다. 

오늘은 '슬픔이 기쁨에게'로 유명한 시인 정호승에 대해 시 몇 가지를 찾아 본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슬픔이 기쁨에게)

이 시에서는 '나'와 '너'가 상정되어 있다.
'내'가 화자가 되고 '네'가 청자가 되어서...
그리고 제목은 슬픔이 기쁨에게...니까,
<슬픔, 남의 아픔을 함께 슬퍼하는 존재>로서의 <내>가,
<기쁨, 남의 아픔을 진정으로 아파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존재>로서의 <너>에게 보내는 메시지라 볼 수 있지.
어쩌면 조금 계몽적인 내용으로 볼 수 있어. 

지난 시간 1970년대 노동자들의 삶을 이야기했지?
이 시에서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은 역설적 표현으로서
남의 아픔을 진정으로 같이 아파해주는 마음이 소중함을 나타낸 구절이야. 

사랑의 반대말이 뭐라고 하든?
미움, 싫어함이 아니야.
'너를 정말 사랑해~'의 마음이 변하면 '네가 싫어'가 되겠지만,
그 마음이 정말 식으면, '나는 너한테 관심 없거든~'이 되는 거지. 무관심이란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잖아.
"여자들의 no는 maybe라고"
여자들이 '싫어~'하고 말하면 정말 싫은 게 아니란다.
진짜 싫어할 때는 '너랑 좋은 친구로 지내고 싶어~~' 이렇게 말하는 거지. 무관심 ㅋ 

무관심한 너,
부자이면서 할머니의 귤값을 깎는 이기적인 너, 
그렇지만 세상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어. 시대적 배경이 혹독하고 가혹하지.
가난한 사람들은 "추워 떨고" 있고, "슬픔"에 싸여 있어.
그래서 화자는 '함박눈'을 멈추고 싶대.
그리고 '봄눈', 아무래도 따스해 보이지?
봄눈을 데리고 오겠대.

그리고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고 하고 있어.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걸으며, 슬픔에 대한 이야길 하>고 싶대.
그래서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고 하는구나.
그건, 곧 사랑을 모르는 너에게 <세상의 그늘진 곳, 어두운 곳>에 대한 관심, 사랑을 가르치겠다는
좀 오만한 발상이기도 한 것 같아.
그렇지만, 1970년대는 전태일이 온 몸을 불살라서 밝히려 했던,
무지의 시대, 어두움의 시대였단다.
시대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교훈적>이며 <계몽적>인 시지. 

주제라면, 소외된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심 촉구... 정도가 될 거야.

비슷한 시대의 노래로, 소외된 이웃에 대한 시 '맹인 부부 가수'를 소개할게.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 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맹인 부부 가수) 

제목을 봐도, 세상에서 가장 가엾어 보이는 맹인이 부부가 되어 주인공으로 등장해.
시대적 배경을 <눈 내려 어두워서>라고 표현하고 있단다.
암울한 현실 상황,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상황을 나타낸 말이지. 

어두운데,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이렇게 앞날이 어두움을 표현했어.
사람이 아니라 <눈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눈사람도 없다고 했으니 참 희망이 없고 외롭겠지.
맹인 부부는 아마 거지였을지도 몰라.
그래서 작은 바구니 하나 들고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관심'을 보여주는...
그런데, 자기 옆을 지나가는 사람은 없고... 
<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이야. 참 부정적 세상이지.

그렇지만, 이 부부는 절망에 빠지지만은 않는구나.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두 사람은 노래를 부른다.
눈사람을... 사람을 기다리면서 말이야.
<기다림>의 노래를 말이다.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서 간절한 기다림을 이야기했듯이,
이 기다림은 <밝은 시대의 도래>에 대한 기다림, <희망>에 대한 기다림이란다. 

어두워만 보이는 세상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 간다고 했어.
시인은 자신의 노래에 담긴 희망과 염원이 미래의 길을 열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나봐.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부분은 '슬픔이 기쁨에게'를 다시 읽는 기분이지?
음악으로 치자면 variation, 즉 변주 부분이 되겠지.
주제에 대한 변화된 연주.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란 주제에 대한 변주곡. 

그렇게 어둡던 시대,
서울 하늘엔 힘든 사람들을 위하여 네온빛 십자가들이 가득했단다.
힘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주여, 내 기도 들으소서...>했겠지.
그렇지만, 서울은 다시 <예수>님에게 시련을 주는 공간이었을지도 몰라.
전쟁 이후, 독재 개발 시대의 무법 천지는 <가난한 자의 친구, 예수>를 유린했단다.
그래서 나온 시가 <서울의 예수> 연작이야.

1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꽃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속에
그리운 자유는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람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낙엽들은 떠나기 위하여 서울에 잠시
머물고, 예수는 절망의 끝으로 걸어간다. 

3
목이 마르다. 서울이 잠들기 전에 인간의 꿈이 먼저
잠들어 목이 마르다. 등불을 들고 걷는 자는 어디 있느냐.
서울의 들길은 보이지 않고, 밤마다 잿더미에 주저앉아서
겉옷만 찢으며 우는 자여. 총소리가 들리고 눈이 내리더니,
사랑과 믿음의 깊이 사이로 첫눈이 내리더니,
서울에서 잡힌 돌 하나, 그 어디 던질 데가 없도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운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눈 내리는 서울의 밤하늘 어디에도 내 잠시 머리 둘 곳이 없나니,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술잔을 들고 어둠 속으로 이 세상 칼끝을 피해 가다가,
가슴으로 칼끝에 쓰러진 그대들은 눈 그친 서울밤의 눈길을 걸어가라.
아직 악인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서울의 새벽에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인간의 귀는 풀잎에 젖어,
목이 마르다. 인간이 잠들기 전에 서울의 꿈이 먼저 잠이
들어 아, 목이 마르다.

4
사람의 잔을 마시고 싶다. 추억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소주잔을 나누며 눈물의 빈대떡을 나눠 먹고 싶다.
꽃잎 하나 칼처럼 떨어지는 봄날에 풀잎을 스치는
사람의 옷자락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나라보다 사람의 나라에 살고 싶다.
새벽마다 사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서울의 등잔에 홀로 불을 켜고 가난한 사람의 창에 기대어
서울의 그리움을 그리워하고 싶다. 

5
나를 섬기는 자는 슬프고, 나를 슬퍼하는 자는 슬프다.
나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는 슬프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는 더욱 슬프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서울의 예수) 

1부에서는 서울, 한강에 예수님이 나타나고 있어.
젖은 옷을 말리다,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민주화 투쟁하다 가는 감옥)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대.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함>이야. 

2부에서는 해가 지고 있어. 초승달이 떠오르고...
찬밥 한 그릇, 서울의 빵과 눈물, 담배...를 통하여 가난이 형상화되고 있구나.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
예수가 간절히 바라던 평화와 자유는 없고, 고통과 눈물로 가득한 <서울>
곧 <한국인>의 삶을 바라보는 슬픈 예수의 눈...

3부에서는 목마른 예수님이 등장해. 
잿더미, 찢는 겉옷과 울음, 총소리, 그리고 또 <눈>... 시련과 고행의 도시 서울
함께 술잔을 들자고 하셔.
예수도 머리 둘 곳이 없어,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 <눈길>을 <걸어가라>고 하셔. 힘들어도 살아야 겠지.

4부에서는 <사람>을 그리워하시는 예수님이야.
<눈길>의 시련과 <사람>을 <그리워>하는 예수...
'슬픔이 기쁨에게'의 주제와 변주... 보이니?

5부에서는 <나를 섬기지 말고, 슬퍼하지 말고, 나를 위하여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말라>고 하셔.
예수는 세상의 모든 원죄를 대신 속죄(대속)하고 희생하셨는데,
아직도 서울에서는 예수를 부르는 목소리가 높고 높았으니,
서울은 참 슬픈 도시구나~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불행한 시대를 노래했던 정호승의 노래는 이만큼 듣고, 그의 사랑 노래를 두 편 보자.
그의 노래 중, <이별 노래>는 가수 이동원이 불러 대중 가요로 널리 알려졌을 만큼 유명한단다.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이별 노래)

제목을 보니 <이별의 상황>이구나.
그대는 <떠나는 그대>니까, 떠나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그대가 떠나긴 떠나야 하는데,
조금만 더 늦게 떠나주길 바란대.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지지?
그대가 떠난 뒤에도, 그러니깐 사랑이 끝난 후에도,
화자는 그대를 사랑한대. 그래서 사랑은 끝났지만, 끝난 게 아니란 역설이지. 

그대가 떠나갈 곳.
그곳에 화자가 먼저 달려가서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배경)이 될 거래.
또 어둠이 오면, 나는 그대를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될 거란다.
희생적인 사랑, 순정적인 사랑의 모습이야. 

마지막 연은 <수미상관>으로 주제를 더 강조하면서,
<이별의 상황에도 변치 않는 사랑의 마음>을 깊게 하고 있어.

정호승의 시 중에 <눈부처>란 시도 읽어보자.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도 곤고히
마음의 길을 걸어며 슬퍼하노니
저무는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녁별 뜰 때
내 그대 인생의 눈부처 되리
내 죽을때 망초꽃 되어
그대 맑은 눈동자 눈부처 되리. (눈부처)



눈부처는 "사람의 눈동자에 생긴 사람의 형상"을 일컫는 말이야.
눈동자는 세상을 대뇌로 시각적 영상으로 전달하는 기관인데,
세상이 비취이고 있어서 마주앉은 사람의 형상을 보여준단다.

근데, <그리운 눈부처>라고 했으니 마주앉을 수 없는 상황인가보다.
<일평생> 눈부처 되겠다 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스토커 비슷하기도 하네. ㅋㅋ

<그대는 이 세상 /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 오늘도 곤고히 /마음의 길을 걸어며 슬퍼하는 사람>이래.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고 싶고,
<노래하는 별>이 되고 싶은 사랑하는 마음의 주제와 변주! 

이렇게 한 시인의 비슷한 시들은 같은 주제를 조금 다르게 연주하는 변주의 맛을 보게 된단다.
그런 것이 같은 시인의 시를 또 읽게 만드는 힘이기도 해.

정호승의 노래 중에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시가 있단다.
사람의 그늘...
사람은 밝은 곳만 가고 싶어하고, 높은 곳을 즐기는 존재긴 하지만,
조금 어두운 곳, 눈사람을 기다리는 마음의 시인이니... 이런 시가 나왔을 법도 해.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 기쁨도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 다른 사람의 눈물을 /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눈물묻은 빵을 먹지 않은 사람과 대화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세상의 그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그도 참 불쌍한 사람이고, 비인간적인 사람이지.
그늘이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슬픔>의 사람이고, <눈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고,
따뜻한 눈으로 <맹인 부부 가수>를 바라보는 <서울의 예수>같은 사람일 거야.

나무 그늘에 앉아 /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 햇살을 바라보면 /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데... 눈물에 젖은 사람 이야기와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느낌도 난다.
그가 이적지 바라보던 세상은,
너무 추워서 눈물조차 제대로 나지 않던 혹한을 견디는 사람들의 세상이었는데
갑자기 <아름다운 세상>이 나오니깐 좀 어색한 느낌이 들기도 해.
세상도 변했지만, 시인도 변한 것 같은... 

일본어에 <고모레 비>란 단어가 있어.
나뭇잎 사이로 비친 햇살이란 뜻인데, 이렇게 단어가 있을 정도로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은
사람에게 인상적으로 남는 건가 싶기도 해.

이렇게 슬픔과 기쁨, 무관심에 대한 계몽에 대한 시를 쓰던 <사랑의 시인, 정호승>이
지난 봄에 있었던 천안함 사건 때, 이상한 말을 해서 욕을 먹기도 했단다.

북한이 기습 공격한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북한의 소행일지도 모른다고 짐작만 하기에는
오늘 조국을 위해 전사한 천안함 장병의 슬픔은 너무 크다
햇볕정책의 결과가 바로 이것인가.
그동안 남한이 북한에 보낸 '화해의 햇빛'은
지금 '기습공격의 그늘'이 되어 우리 아들들을 수장시키고 말았다. …(중략)…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천안함 사건만이라도 북한 소행이 아니라는 주장은 하지 말아야 한다  
                                                                         출처 : "천안함 침몰=북한짓", 정호승 시인 왜 이러나 - 오마이뉴스

천안함 사건은 참 슬픈 사건이었다.
한국이 전쟁중임을 일깨워주는 슬픈 사건.
멀쩡한 아들들이 멀쩡하게 배타고 쉴 시간에, 배가 두동강 나서 46명이 죽은 사건.
그런데, 진실은 조사되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한 사건. 

최근에 연평도에서 일어난 폭격 사건도 그렇지만, 진실이 뭔지 알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누가 거짓을 이야기하는지는 알 수 있어야 지식인이란다.
그런데, 글을 써서 사회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사람이,
이런 망언을 마구 내뱉으면,
어찌 보면 개인적 의견일 수 있지만,
쉽게 자기 주장을 내세울 수 없는 입장이기도 한 것이다. 아쉽지.

햇볕은 북풍보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우화지 논리적인 것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란다.
북측과 남측이 갈라져 싸운 원인은, 외부에 있는 거야.
2차 대전의 책임을 지워 독일을 분단시켰다면, 당연히 일본을 분단시켰어야 할 상황에서,
섬나라 일본은 지정학적으로 별로 도움이 안 되니 한반도를 쪼갠 거지.
통일을 가로막는 외부 조건을 생각하면, 참 불쌍한 민족이야.
정말, 서울에 예수가 재림하셔야 할 나라인지도 모르겠다. 

글이 조금 길어졌다.
이제 기말고사까지는 하루 한두 편의 시만 소개하는 정도로 가볍게 갈게.
피곤해도 힘내고 열심히 해봐~  
사랑해,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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