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2 - 1부 2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2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토지... 땅을 파먹고 사는 인간들의 이야기지만,
과연 인간에게 자신이 제어하지 못할 운명이란 어떤 것일지... 그런 생각을 곱씹게 하는 책이다. 

구천이와 아씨의 관계가 그렇고,
월선이와 용이, 강청댁과 임이의 관계가 그렇다.
서희와 봉순이, 길상이의 관계 역시 운명이란 과연 인간이 넘볼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운명의 손길에 곱다시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인지... 

조준구처럼 참으로 면목없지만, 그것이 인간이라고 고개 빳빳이 들고 사는 것들도 있고,
귀녀처럼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든 뒤바꿔보려고 안간힘 쓰는 존재도 있고,
거기 빌붙어 빌어먹을 인생 어떻게든 바꿀 수 있을지 도박하는 평산이 같은 넘도 있는가 하면,
되나 마나 욕지거리로 살다 죽는 강청댁같은 인물도 있는 법이다. 

토지를 읽는 일은,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의 삶에  도대체 운명은 어떤 역할을 노는 것인지를 곱씹게 하는 일이고,
인간의 악에 가까운 시기와 질투가 얼마나 운명 앞에서 헛된 것인지를 느끼게 하는 일이다. 

윤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옳음'과 '순명'의 사이를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사건과 사고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과 사랑 이야기들. 

'의 義'와 '명 命' 사이에 놓인 인간의 선택은 확고하게 한 쪽으로 기울 수만은 없는 법이지만,
아무리 유치하고 치사해 보이고 더러워 보여도,
강청댁의 삶도 하나의 삶이요,
귀녀의 삶도 하나의 삶이요,
월선이의 삶도 하나의 삶이요,
조준구의 삶도 하나의 삶이다. 

다들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쳐있어 '의'와 '명' 사이의 어느 좌표쯤에 살고 있을지는 쉽게 그려내기 어렵지만,
이 많은 인물들의 삶을 엑스축의 <의>와 와이축의 <명>을 교차하게 그려 두고,
옳으면서 운명에 순응하며 사는 길상이나 봉순네의 삶쪽과,
옳지 않고 운명에도 거스르려는 귀녀같은 삶쪽의 그래프를 그리는 일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옳지 않지만 귀녀처럼 범죄까지는 아닌 환이의 사랑은 나름대로 페이소스를 강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고,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운명의 장난에 놀아나게 되는 용이와 월선, 강청댁, 임이네의 좌표는 참으로 지점을 난감하게 그릴 수밖에 없게 되기도 한다. 

대하소설이면서도 귀녀의 범죄가 처리되는 부분에서는 <람세스>의 후련함을 느끼게 하는 독서 체험을 남기기도 하고,
구한말이라는 시대적 배경은 농민과 지주, 양반과 상놈의 유명무실한 선을 굵게, 가늘게 설핏설핏 그려내는 속에서 사람위에 사람있고 사람밑에 사람있던 시대상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예전에 읽었던 소설이라는 생각을 거의 할 수 없는 소설이다.
워낙 많은 인물들이 얽혀있어 그렇기도 하고, 한 인물의 개성에 기댄 소설이 아니라 다양한 인간 군상이 관계맺는 속에서 스토리가 저절로 엮이게 되는 플롯을 가지고 있어 그렇기도 할 것이다. 

날씨는 차갑다.
누군가는 수능 준비하는 수험생을 위하여 초콜릿을 사기도 하고,
누군가는 세상이 자신을 배반하는 원망에 휩싸여 세상을 버리기도 한다.
꿈에 부풀어 미래를 설계하는 이에게는 밝기만 한 햇살이겠지만,
그 햇살조차도 아무런 의미없이 뿌연 안갯속이기만 한 사람도 있는 법이다. 

대하 소설을 읽는 일은, 그 모든 사람들과 그 모든 이들의 환경을 한꺼번에 품고 흐르는 큰 강물을 읽는 일이다.
그래서, 토지를 읽으면서 버스간에서 간혹 서고 간혹 앉은, 또는 창가에서 잉어빵을 굽기도 하고 곱은 손을 호호 불면서 채소를 팔기도 하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모두 대등하게 돌릴 수 있는 마음의 넓이를 던져주는 일이기도 하다. 

여러 사람들...
각기 다른 사람들...
그렇지만, 제각금 하나씩의 고민과 하나씩의 보람을 가슴에 품고 사는 그 사람들...
그들에게 큰 힘은 되지 않겠지만  톱밥 난로에 톱밥 한 줌 던져주는 기분으로
조금은 환한 마음을 갖게 하는 그런 일.
토지를 읽으면서,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와 임철우의 소설 <사평역>이 생각났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 사평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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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0-11-16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명이 지배한다'
그렇다면 속시원히 '니 운명은 이것이다'라고 누가 나에게 정답지를 살짝 보여줬으면 좋겠네요.^^;
10대 때는 운명따위 관심이 없었고, 20대 때는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는 거야'를 외쳤는데.
지금은, 어쩐지..'운명은 있어. 그게 몰라서 답답할 뿐이지'하고 중얼거리곤 합니다.
많이 약해졌을까요? (웃음)

글샘 2010-11-16 22:24   좋아요 0 | URL
운명은... 정답지가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운명이죠.
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이 충분하진 못했지만 이명박보다 훨씬 나았음에도...
이명박이 뽑힌 그런 거.
앞으로의 운명은... 충분히 바꿀 수 있는 것이구요. ㅎㅎㅎ

turk182s 2010-11-17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토지를 볼때마다 서희가 등장하면 아직도 최수지가 오버랩되요..이번에 리브로 구간도서 반값할인행사에 넘어가서 토지도 구입했는데 언제읽을련지..

글샘 2010-11-21 21:02   좋아요 0 | URL
저는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 ^^
토지는 읽을수록 멋진 맛을 느끼게 되는 작품이더군요.

순오기 2010-11-18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실하게 한 권 한 권 리뷰를 남기시네요~~~~~ ^^
토지의 인간 군상들이 엮어가는 삶이 참 드라마틱하죠.
누군가에겐 참 비루하고, 끔찍스런 모습이지만... 난 임이네를 보며 내 속을 보는 거 같았어요.ㅜㅜ

글샘 2010-11-21 21:02   좋아요 0 | URL
착실하게 책을 읽을 시간이 잘 나지 않는군요. ^^
임이네... 인간의 내면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더라구요. 박경리 선생의 훌륭한 점이 그런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해내는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