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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합
한창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홍합 공장에서 일하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닷내음 가득 머금은 그 비릿한 싱싱함을 그대로 품고 있는 소설.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었는데, 이 소설이 읽히던 그 즈음, 나는 소설을 읽지 못하고 있었다.
통 책을 읽지 못하고 살던 적이 있었는데, 그게 사느라 바쁜 거였는지 모르겠다.
일부러 도서관의 ㅎ칸을 찾아 한창훈의 책을 찾은 것은 오늘처럼 쌀쌀한 날, 밤 열 시까지 온기없는 학년실을 지키고 있으려면, 따끈하고 짭쪼름한 홍합탕이 생각날 것 같아서였던가...
그런데, 참 잘 빌려왔다.
아이들은 이제 수능이 20일 앞으로 다가와 마음이 바쁘고,
한 바퀴 둘러보고 오면 한창훈의 입을 타고 해원굿이라도 할 숱한 여인네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문기사의 머릿속에 들어앉은 작가의 생각들도 가뿐하고,
승희네와의 탄탄한 로맨스도 달큰함은 없지만 충분히 싱그럽고 아름답다.
홍합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왠지 좀 외설스럽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양념삼아,
사람 사는 세상의 이야기들을,
작가의 목소리를 빌려 이야기하자면,
"부드러운 맨살"처럼 "교양으로 제 정신의 꽃을 피우는 부류의 언어" 말고,
"일에 혹독하게 달궈진 끝에 반들반들 닳은 굳은 살"처럼 "딱딱한 살로 차가운 바닥을 버텨내 주는 부류의 언어"로 이 소설은 떠받들려 있어 탄탄하다.(10)
문기사와 로맨틱한 상상으로 마음이 노골노골해진 서른 셋 과부이자 두 아이의 엄마이고, 시부모 모시고 사는 승희네가 샘가에 가서 읊조린 말은 그야말로 삶의 딱딱한 바닥을 송곳처럼 찌르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내일부터 공장에 못 가고 농약 친단다. 씨발것, 독사야 내 발 물어라."
알콜 중독자 아비를 둔 아이... 하굣길에 뱀을 한 마리 잡아 오는데,
조금 있다가 등에 가방 메고 한 손에 뱀을 들고 한손에 술 취한 아버지의 옷자락을 쥔 아이가 좌우로 흔들리며 걸어가는 풍경이 골목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124)
이런 글은 흡사 한 편의 서정시다.
서정시는 서정시되, 세상의 이야기가 담긴 서사가 독자를 사무치게 하는 서정시...
대학생이었던 때의 문기사가 캠퍼스에서 권태롭게 비스켓을 앞에 두고 담소하던 나이의 여학생들과,
한겨울 따뜻한 물에 손을 녹여 가며 쥐치 살 말리는 일을 하고 있는 젊은 처녀들의 모습을 오버랩하는 장면은,
아무래도 80년대의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그래서 눈초리 가장자리로는 최루탄이 원인일지, 누선을 자극하는 이야기 톤이 원인일지 모를 축축하고 뜨끈한 것을 배어 나오게 하는데,
"그러고 보면 사람들을 빨리 늙는 부류와 늦게 늙는 부류로 나눌 만했다."는 서술자의 목소리는
읽는 자를 괜히 서러움에 젖게 만든다.
공장 출신의 처녀들은 지금보다는 다음이 더 좋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에, 기회만 있으면 빨리 연애하고 결혼하고 집 사고 아이 낳고 하는, 세상을 빨리 살아버리려는 버릇이 생겼는지도 모를 거라는...(213)
많은 것들이 생생하게 스칩니다.
앞으로도 그 무엇들이 내 앞에 놓여있을 것입니다.
삶의 매순간들은 나를 어디에 이르게 하는 장치들일까요.(289)
이렇게 작가 후기를 남겼다.
척박한 곳에서 험하게 사는 여성들의 굴곡진 삶의 이야기를 푸지게 펼쳐 놓았으면서,
삶을 인간이 주관하여 사는 것이 아니고,
삶의 매순간들은 우리 앞을 스쳐가고, 다가서고, 지나가고, 놓여질 것들이며,
그런 장치들은 우리를 어딘가로 끌고 갈 그런 운명지어진 어떤 것일지... 독자를 곰곰 생각의 우물로 인도하기도 한다.
"애새끼들은 베짱이마냥 가수만 쳐다보고 살고
으른들은 테레비 앞에서 공차고 잡아 넴게뜨리고 달음박질하는 것만 쳐다보고 살믄 잘 되겄다 니미."
세상사를 이렇게 한 마디에 옹골차게 짚어낼 수 있는 소설을 쓰기도 참 쉽지 않은 노릇인데... 한창훈의 소설은 그런 힘을 가졌다.
힘겨우면서도 건강하고 소중한 여성들의 하루하루가 주는 안식과 힘을 읽으면서, 구자명씨 생각이 났다.
맞벌이부부 우리동네 구자명씨
일곱달된 아기엄마 구자명씨는
출근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씨,
그래 저 십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시중든 시간이고
그래그래 저 십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 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기는 지붕마다
여자가 받쳐든 한 식구의 안식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잠을 향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고정희, 우리동네 구자명씨,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