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창비시선 172
신경림 지음 / 창비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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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시인 신경림 앞에서,
1998년, 사람들은 모두들 어디로 가고들 있었나 보다.
현실사회주의 붕괴와
이름만 민주주의였던 세계화 앞에서...
잔치는 끝났고, 문학도 욕설투성이였던 시기...
그의 시를 '立象盡意 입상진의'
설명이나 진술이 아니라 형상을 통해 뜻을 보여준다고 도종환 시인이 해설을 붙였다.
'선경 후정'의 한시의 단아함과도 맥이 닿아 있다.
그걸 최원식은 '두보'로 읽고,
'당시의 꽃피는 아침 화단보다
송시의 노을진 저녁 나루터 길'이라고 표현했겠다.

 

노파가 술을 거르고 있다
굵은 삼베옷에 노을이 묻어 있다
나뭇잎 깔린 마당에 어른대는 긴 그림자
기침 소리, 밭은기침 소리들
두런두런 자욱한 설레임

모두들 어데로 가려는 걸까 (노을 앞에서, 전문)

모두들 서둘러 내렸다
빈 찻잔에 찌그러진 신발과 먹다버린 깡통들
털컹대며 차는 는개 속을 가고
멀리서 아주 멀리서 닭 우는 소리

그믐달은 숨어서 나오지 않는다
간이역에는 신호등이 없다
갯마을에서는 철적은 상여소리에 막혀
차도 머뭇머뭇 서서 같이 요령을 흔드는
물 빠져나간 스산한 갯벌
자욱한 는개 속에
그대들 버려진 꿈속에 (막차, 전문)

길을 노래하던 신경림이 지나온 길을 불빛이 비추인다.
램프불(남포불), 칸델라불, 전등불, 온세계로 나가보는 화자의 눈 앞에
과거의 아련한 기억은 새로운 꿈이 된다.
꿈을 꾸던 사람들이 꿈을 잃어버린 세상에...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전문)


입상진의. 
그리는 것에서 풍기는 짙은 페이소스를 드러내는 신경림의 마음은
사뭇 애린다.

새파랗게 빛나는 잎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찢기고 할퀴어 흠집투성이인 가지가 보인다
벌레와 비바람에 썩고 잘려나간 밑둥이 보인다
돌과 흙에 짓눌린 뿌리가 보인다

얼어붙은 비탈길을 미끄러지는 쓰레기차가 보인다
이른 새벽 셔터를 올리는 시퍼렇게 터진 손이 보인다
새벽길 삼백리를 달려온 찌그러진 작업화가 보인다
농익어 단 열매만을 뽐내는 저 큰 나무에 (찌그러진 작업화, 전문)


삶이란 건,
제각기 무슨 흔적을 남기려고
안간힘을 다하면서
아름다운 꽃을 많이 피우기도 하고,
가지가 휠만큼 열매를 맺기도 하고,
몸단장만 한 나무도 있고,
서슬 푸른 가시 나무도 있지만,
모두들 산비알에 똑같이 서서 하얗게 바래가는 나무들...
어차피 지나간 날들은 장밋빛 노을로 덧칠해도 스러져버릴 노을인 것을...

생전에 아름다운 꽃을 많이도 피운 나무가 있다
해마다 가지가 휠만큼 탐스런 열매를 맺은 나무도 있고
평생 번들거리는 잎새들로 몸단장만 한 나무도 있다
가시로 서슬을 세워 끝내 아무한테도 곁을 주지 않은
나무도 있지만 모두들 산비알에 똑같이 서서
햇살과 바람에 하얗게 바래가고 있다

지나간 모든 날들을 스스로 장밋빛 노을로 덧칠하면서
제각기 무슨 흔적을 남기려고 안간힘을 다하면서 (흔적, 전문)

살아보면,
돌로 사나, 꽃으로 사나
한 평생 뒹굴 버석 궁구는 일인데,
길을 떠나 만나는
비구 두엇과 바라보는 매화,
농민들의 농성터에서 보는 개망초,
기성화 장수 봉고의 노래 흥취와,
폐광산 중늙은 주모와 한 잔 한들 어떠랴만,
그럴 때면,
맘 속에 어슷비슷 저며오는 불안감과,
뭐, 때론 그래도 다 꽃이지 하는 안도감이 어울린, 신경림식 인생론.

꽃을 좋아해 비구 두엇과 눈 속에 핀 매화에 취해도 보고
개망초 하얀 간척지 농투성이 농성에 덩달아도 보고
노래가 좋아 기성화 장수 봉고에 실려 반도 횡단도 하고
버려진 광산촌에서 중로의 주모와 동무로 뒹굴기도 하고

이래서 이 세상에 돌로 버려지면 어쩌나 두려워하면서
이래서 이 세상에 꽃으로 피었으면 꿈도 꾸면서  (돌 하나, 꽃 한송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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