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설법 창비시선 133
이동순 지음 / 창비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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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마당에 오줌 누러 나갔더니
개가 흙바닥에 엎드려 꼬리만 흔듭니다
비라도 한줄기 지나갔는지
개밥그릇엔 물이 조금 고여 있습니다
그 고인 물 위에
초롱초롱한 별 하나가 비칩니다
하늘을 보니
나처럼 새벽잠에 깬 별 하나가
빈 개밥그릇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별, 전문) 

경산에 있는 대학으로 출근하는 시인은 인근 마을로 가서 살기로 했다.
낯선 곳,
외로운 곳에서 만난 별 하나.
새벽에도 시인을 내려다보고,
빈 개밥그릇에도 비친다. 
별의 시인답게, 별로 시작한다.
그의 별 노래는 참 서정적이기도 하고, 삶의 그늘에 살포시 빛을 뿌려주기도 한다. 

시집의 제목은 '봄의 설법'
봄은 '보는 계절'이다.
겨울에는 볼 것이 없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봄이면 꽃을 피운다. 나 좀 보라고...

이 시집에 실리진 않은, 그의 별 노래 몇 편, 옮겨 둔다.

바람속에 태어난
저 어린 별은
제 어미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오늘도 캄캄한 우주 벌판에서 외롭게 반짝인다

어린 별이 땅 위의
가난한 나라 아이들과 밤새도록
서로 눈 맞추고 용기와 희망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신의 한 생을 살아온
늙은 별은
흐뭇한 얼굴로 그 광경 지켜보다

우주의 한쪽 구석에서
혼자 조용한 임종 맞이한다

자욱한 눈보라 속으로 터벅터벅 걸어가서
영영 되돌아오지 않는
저 북극 에스키모 노인처럼 (별의 생애, 전문)

그대가 별이라면
저는 그대 옆에 뜨는 작은 별이고 싶습니다
그대가 노을이라면
저는 그대 뒷모습을 비추어주는
저녁 하늘이 되고 싶습니다
그대가 나무라면
저는 그대의 발들에 덮인
흙이고자 합니다
오, 그대가
이른 봄 숲에서 우는 은빛 새라면
저는 그대가 앉아 쉬는
한창 물오르는 싱싱한 가지이고 싶습니다 (그대가 별이라면)

개가 짖고
추수 끝난 들판에서
밤바람은 말을 달립니다.
달이 밝습니다.
나는 뜨락에 서서 달빛에 젖습니다.
초롱초롱한 별 하나가
나를 봅니다.
나는 방으로 들어옵니다.
들어와서 다시 생각하니
그 별이 그대인 것을 알았습니다.
황급히 나가 하늘을 보니
이미 그 별은 사라지고
보이질 않았습니다. (별 하나, 전문)



1995년, 마흔 다섯의 나이.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다들 복잡할 때,
모두들 제 마음 속 들여다보기 바쁘던 그 때,
그는 자연 속에서 자신을 비춰보며,
이치를 찾는다. 자연의 이치가 곧 사람 사는 이치임을...
'묵언' 같은 시에서도 삶의 느낌이 짙게 풍긴다.

대추나무를
전지하면서 살펴보니
나무의 가지와 가지들은
결코 서로 다툼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 가지가 위로
혹은 옆으로 내벋어가다가
다른 가지와 마주칠 때
반드시 제 몸을 휘어서 감돌아 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다른 나무들을 보니
나무란 나무는 모두 그러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나무의 이치를 알고서 세상을 둘러보니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고
차고 꺾고 심지어는
제 살기 위해서 남까지 죽이려고
칼을 갈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 중에서도
풀과 나무를 만지고 살거나
마음속에 풀과 나무를 가꾸고 사는 사람들은
그래도 나무의 겸양과
조화로움을 조금은 닮아 있는 것이었다 (나무에 대하여, 전문)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쇠똥 거름을
퍼담아 마당 곳곳에 부었다.
부어놓은 쇠똥 거름을
또 다음날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골고루 흩어서 깔았다.
이러기를 여러 날 했다.
끼때 되면 부엌에 들어가 홀로 밥 챙겨 먹고
밥 먹고 나면 다시 뜨락에 잠시 앉아
물끄러미 앞산 자락을 보았다.
오는 이 가는 이 없고
나는 혼자였다.
말하기 위해 입을 열 필요가 없었다.
그대로 묵언 수행이었다. (묵언, 전문)


이웃과 함께 밥 한 그릇 할 줄 아는 시골 인심과,
경북의 사투리 '장카 밥카 뿐'이라는 가난 속의 넉넉함이 살아있는 시다.
경행 씨와 봉도 씨는 어머니와 함께 시의 모티프로 강렬하다.

아침 일찍 전화벨이 울려
받고보니 허경행씨다
간밤이 선친의 입젯날이라 아침이나 같이 하잔다
늘 하던 경행씨의 말투처럼
차린 것 별 것 없고 '장카 밥카' 뿐이란다
된장하고 밥 뿐이라는 그의 이 말엔
천 년이 넘도록 내려오는
우리 조상님들의 인정과 겸양이 묻어 있다
각색 나물에 탕국에
돔배기와 고등어찜에 떡과 과일
마을 이장이 맨먼저 와 있고
뒤이어 초동영감님과 남진씨가 들어온다
집집마다 모두 기별했건만
온 사람은 모두 다섯
주인과 객이 서로 술을 권하며 둘러 앉아 아침을 먹는다
어제 과음했다는 남진씨는
배가 아파 들락날락
이장은 아침 초대에 오지 않은
몇 몇 사람을 나무란다
조촐한 동네 음복일망정
벽에 걸린 경행씨 부모님의 흑백사진이
흐뭇한 얼굴로 내려다 보고 있다( 함께먹는 밥, 전문)

(퇴근 길 자기집을 지나 안마을까지 할머니를 태워드리고 돌아오는 시인)
고죽 안동네에서 그는 내리며
‘이렇게 생광스러울 수가...’라고 말했다
나는 돌아오면서 이젠 거의 잊혀진
‘생광스럽다’라는 우리말의 은근한 여운을
한참 생각해 보았다 (퇴근길, 부분) 

'아쉬운 때에 요긴하게 쓰여 보람있다'는 뜻이라는 '생광스럽다'는 말.
이런 말 하나 주워듣는 것이 곧 시가 된다.
나중에 이런 시가 없다면, 사라져버릴 말들이니... 

시인의 삶은 그대로 기록문학이자 구비문학의 문화 유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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