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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리운 사람은 ㅣ 창비시선 57
이동순 지음 / 창비 / 1986년 12월
평점 :
품절
우물물만 긷들 않소
가문 날 웅덩이의 물을 퍼 날라
언덕진 비탈밭 천둥지기로도 대지요
쾅쾅 박은 말뚝 틈에 대나무를 세우고
장대 끝을 한껏 휘어
놋줄 매달아 드리우면
당겼다 놓을 적에 손바닥에 오는 팽팽한 힘
이 힘으로 가문 여름을 버팅기오
한 번 두레질에 서너 되를 길어 올리지만
자주 곱돌도 한 움큼 끌려 오고
깜짝 놀란 송사리의 은빛 배때기도
두레박 속에서 반짝이지요
누구 말마따나 죄 없이 목맨 놈이 바로 나요
왜냐 내려갈 땐 벽장구 치며 내려가서
올라올 땐 눈물 뚝뚝 떨구니까
그래도 옛 고담책에나 나올
선녀 기다리는 나무꾼 따위를 태우긴 싫소
한참 가물 때면 온 마슬 두레꾼들이
횃불 바꾸어가며 긴 밤을 밝히는데
지치면 노래 한마디 내지르지요
낮은 데 가서 깊은 데 고르고
두 발 버티어 손끝 서로 모도아 잡고
기운차게 기운차게 당겨보세
별빛 또랑또랑 여름밤이 깊어갈수록
당기고 놓고 당기고 놓을 적에
손바닥에 와 닿는 팽팽한 그 힘으로
더욱 우리는 신명나오 (두레 - 농구노래 14, 전문)
1980년대, 홍일선, 김용택 등의 시들이 이른바 '농민 문학'의 한 축을 형성하던 시기의 시다.
1980년대면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농촌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시기였는데,
그때는 아직도 '부자되세요~' 같은 덕담이나,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같은 4가지 없는 말들이 유행하진 않던 시기다.
아직도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였고, 독재 정권에 맞서기 위하여 노동자, 농민과 학생, 인텔리가 대동단결해야 한다던 시기였다.
이런 시대의 농구 노래는 사라져가는 것들의 건강한 문화를 남기려는 노력이기도 했을 것이다.
따비
종다래끼
오줌장군
개똥삼태기
무자위
도리깨
돌확
뒤웅박
소죽바가지
물풀매
발
거적
연자매
두레
똥바가지
멍석
쇠스랑
낫
책력
또아리(똬리가 표준어로 바뀜)
작두
지게
길마
도래방석
곰방메
호미
이런 농구들의 역할을 의인화하기도 하고, 쓸모를 그려내기도 하여 기록으로 남기려 한 데는,
농촌에서 사라져가는 소중한 문화를 말로 남기려한 그의 마음 쓰임이 작용한 탓일 게다.
나야 어려서 시골에 자주 가서 대부분 보던 것이지만, 요즘 사람들이 과연 몇 가지나 알 것인지...
맨 뒷부분에 저 농구들의 삽화를 첨부하여 이해를 돕고 있다.
아이들 양민네 사랑으로 놀러 가고
내가 조용히 뒷방문 열어놓고 시를 쓸 때 그는 온다
곧장 산으로 연해 있는 집 뒤란
우씨네 집 황소가 자주 와서 등 부벼대는
우뚝한 아름드리 추자나무 위
나는 붓을 든 채 녀석과 눈겨룸을 한다
어느 틈에 놈은 호도 한 알 따서 물고
와삭와삭 껍질을 벗기다가 나를 빠안히 내려다본다
지금은 홀로 된 청풍댁 할머니가
첫살림나던 당년에 심었다는 추자나무
털벌레가 파먹고
마슬 아이들이 거쳐가고
태풍 끝에 몇 알 안 남은 것을
그나마 줄창 훔쳐간 녀석이 바로 너였구나
나는 슬그머니 돌멩이를 집어
잽싸게 홱 던진다
그러나 놈은 돌멩이보다 한 걸음 앞서
콩밭으로 몸을 던지며 달아났다
양민네 할아버지가 저놈 털로 붓 만드는 게 소원이신
날다람쥐라고도 불리는 청설모 (청설모, 전문)
추자나무 하면 모르는 사람도 많으리라.
추자나무 열매의 속씨가 호두라고 불리는 것 역시도...
추자의 '추'자가 楸 '호두나무 추'인데, 가래나무(산추자나무) 열매와 조금 닮았다. 가래 속씨는 길쭘하다.

<호두나무와 호두>
<가래나무와 가래>
아침에 어디서 호두 열매 깨진 사진을 주워다 올렸는데, 이래저래 호두를 많이 만나는 날이다.
민중언어를 살려 쓰려던 이동순의 시들을 읽으면,
옛날 충주댐 아래 수몰되어버린 큰집의 비탈길이 오롯이 떠오른다.
뒤란의 감나무와 자그만 텃밭, 계명산 오르던 길에 있던 붉은 산딸기, 시원하던 절터의 계곡물까지...
자꾸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향수를 가진 나도 여지없이 늙어가는 모양.
그래선지, 이동순의 이런 옛날 글도 만나면 반갑다.
시골 장터에서 오랜만에 만난 사돈 마냥...
그립다...는 말은,
눈 앞에 없어서 '그리다'는 뜻과 통하는 말이 아닐까...
보고 싶어 그리고 그리다 보니, 그립다는 마음과 하나가 되어버린...
눈에 선한 사라져버린 풍경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