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들은 따뜻하다 창비시선 88
정호승 지음 / 창비 / 199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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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자던 윤동주의 후신인지,
정호승의 시엔 별이 유독 많다. 

정호승의 시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이별 노래'가 아닐까?
이동원이 구수한 목소리로 부르던 그 노래.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나 그대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이별 노래, 전문)

이 시집의 해설을 별의 시인 이동순 님이 붙였는데, 그 내용에 멋진 구절이 있다. 

   
 

중세 포르투갈의 시인 까모에스(1524-1580)라는 사람은
매우 불우한 생애 속에 이 세상을 떠나 아무도 그의 무덤을 모르게 되었다.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훗날
시인 까모에스가 돌아다닌 곳의 먼지를 모아
훌륭한 무덤을 만들어 기념했다.
먼지 속에는 시인의 몸에서 떨어진 머리카락이나 비듬이 섞여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무덤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육신 따위가 무덤에 무슨 소용이 있으랴.
무덤 속의 백골 청태는 하나도 소중하지 않다.
그 무덤 속에 묻힌 이의
'죽어도 죽지 않는' 정신이 소중한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무덤으로 갔고,
또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무덤으로 갈 것이다.
이때 우리는 보들레르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 이승은 짧다! 무덤은 기다린다. 무덤은 배고프나니!" 

우리가 진실로 이승에서 노력해야 할 것은 '무덤 속에서도 썩지 않는 정신'을 만드는 일이 아닐까.
이런 최소한의 노력 없이는 즉시 배고픈 무덤에 먹혀버리고 말 것이다.

 
   

해설을 읽으면서 이런 서늘한 죽비 소리를 듣기도 어렵다.
반가운 서늘함이다.

별들은 죽고 눈발은 흩날린다
날은 흐리고 우리들 인생은 음산하다
북풍은 어둠속에서만 불어오고
새벽이 오기전에 낙엽은 떨어진다
언제나 죽음 앞에서도 사랑하기 위하여
검은 낮 하얀 밤마다 먼 길을 가는자여
다시 날은 흐르고
낙엽은 떨어지고
사람마다 가슴은 무덤이 되어
희망에는 혁명이
절망에는 눈물이 필요한 것인가
오늘도 이땅에 엎드려 거리낌이 없기를
다시 날은 흐리고 약속도 없이
별들은 죽고 눈발은 흩날린다 (눈발, 전문)

이 시집이 나온 것이 1990년.
페레스트로이카에 이은 독일의 통일과 사회주의 붕괴로 별이 사라져가던 시기였다.
별들은 죽고 눈발은 흩날리는데,
시인은 지구별에 서서 다시 희망과 절망, 혁명과 눈물을 이야기한다.
죽음 앞에서도 사랑하기 위하여... 

내 그대의 나그네 되어
그대 하늘로 돌아가리라

마지막 시대의
마지막 노래를 부르며

내 다시 창을 열고
별을 헤어보리라

함박눈이 까맣게 하늘을 뒤엎어도
그대 하늘의 가슴 속으로

나는 아직 고통과
죽음의 신비를 알지 못하나

내 그대 별 하나의 나그네 되어
그대 하늘로 돌아가리라 (별 하나의 나그네 되어, 전문) 

이 시는 마치 천상병의 '귀천'을 읽는 느낌이다.
천상병이 '소풍'나온 이라면,
정호승은 '나그네'다.
소풍나온 이는 금세 집으로 돌아가서,
소풍이 재미있었다고 재재거릴 수 있지만,
나그네는 별을 바라보면서 타박타박 걸음을 옮길 뿐,
그 길의 끝이 쉽사리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시대의 마지막 노래를 부르는 나그네...
그대 하늘로 돌아갈 길이 아직 멀다.

빈 손을 들고 무덤으로 간다
국화 몇 송이 문득 강가에 내던지고
오직 빈 손으로 저녁날 무덤가에 가서
마른 풀들의 가슴에 내 가슴을 묻는다
분노가 있어야 사랑은 있고
희망이 있어야 노래는 있는가
검정딱새 한 마리 내 뒤를 따라와
눈물의 붉은 비 거두어 가고
어느덧 무덤가에 스치는 저녁별 (저녁별, 전문) 

누군가의 무덤가에 가는 일은 쓸쓸하다.
모든 무덤에는 주인이 있지만, 또한 임자가 없다.
임자가 죽었으므로 임자가 아니지만, 또한 주인이 거기 묻혔으므로 주인은 있다.
임자 없는 무덤에 국화 몇 송이 들고 가봤댔자, 필요도 없지만,
거기 묻혔을 주인장과 생시에 몇 마디 말 섞은 추억으로,
빈 손이지만 빈 가슴일 순 없다.
가슴엔 분노도 사랑도 희망도 휩쓸려 다니지만,
딱히 말로 덩어리져 나오지 않는 허허로운 마음일 때,
초저녁 별 하나 반짝이며 화자를 위무한다.
쓸쓸하고 외롭지만, 화자는 혼자가 아니다.
검정딱새 한 마리도,
눈물의 붉은 비 흘리지 말라 토닥거리는 저녁별도 다 위로가 된다.  

언젠가 한 개 무덤의 주인이 될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덤도 아니고, 비석도 아니다.
육신이 죽어도 스러지지 않을 정신,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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