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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연꽃 ㅣ 창비시선 192
이동순 지음 / 창비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별'을 노래하는 시인 이동순.
그가 쉰을 살면서 부른 노래들을 모은 이 시집에선,
유난히 작은 것들이 눈에 밟히는 시인의 모습을 읽는다.
풍뎅이 한 마리 물에 빠진 것도 안타깝고,
청개구리 한 마리도 마음이 쓰이고,
심지어는 떨어진 깨꽃을 보면서도 깨가 되지 못한 데 애가 탄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는 그의 '누룩'인데,
이 기운없는 세상을 위해,
누룩이 되고 싶은 그의 마음에 감동이다.
어둑어둑한 저녁
파장 무렵의 풍각장에서 누룩을 샀다
골라서 열 개만 사려다가
아예 상자째 모두 사버렸다
누룩은 이제 내 방 윗목에서
그윽하고 흐뭇한 향내를 솔솔 피운다
언젠가는 자신이
쓸쓸한 사람에게 찾아가 진실로 하나의 위로가 될
그날을 기다리는 누룩
나도 이 기운 없는 세상을 위해
한 장의 누룩이 되고 싶다
세상의 앞가슴을 온통 술기운으로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하고 싶다
그 누룩과 더불어 한 방에 자면서
나는 누룩이 장차
보드라운 가루로 빻여서
맑은 물과 찹쌀을 따뜻하게 껴안고
항아리의 어둠속에서 이불을 둘러쓰고 숨죽이며
하루 이틀 깊은 사색과
인고의 시간을 보낸 뒤에
드디어 향기로운 정신으로 완성될 그 날의 감격을
아늑히 꿈꾼다 (누룩, 전문)
예전에 좋은 생각에서 읽고는 잊었던 시, 종일 본가가 아팠던 시.
아버님의 일기장을 다시 만나 가슴이 싸하다.
아버님 돌아가신 후
남기신 일기장 한 권을 들고 왔다
모년 모일 '終日本家'
'종일본가'가
하루 온종일 집에만 계셨다는 이야기다
이 '종일본가'가
전체의 팔 할이 훨씬 넘는 일기장을 뒤적이며
해 저문 저녁
침침한 눈으로 돋보기를 끼시고
그날도 어제처럼
'종일본가'를 쓰셨을
아버님의 고독한 노년을 생각한다
나는 오늘
일부러 '종일본가'를 해보며
일기장의 빈칸에 이런 글귀를 채워 넣던
아버님의 그 말할 수 없이 적적하시던 심정을
혼자 곰곰이 헤아려보는 것이다 (아버님의 일기장, 전문)
세월교, 같은 시를 만나면,
자신이 흐르고 있는 골짜기가 어디쯤인지를 짚을 줄 아는 혜안을 배운다.
쉰 쯤이면 나도 저런 눈을 가질 수 있을는지...
세월교라는 이름의 다리가 있습니다
전남 곡성을 지나는 섬진강에
이 다리는 있습니다
시인학교가 열리던 어느 해 여름 밤
나는 달빛 푸르스름한 세월교 난간에
혼자 기대어 나직이 중얼거리며
하염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보았습니다
밤 물결 속에서 물고기란 놈들이
물살에 꼬리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의 세월은 어디쯤 흘러가고 있는지요
그대의 세월은 지금 어느 물굽이를
휘돌아 흘러오고 있는지요
우리가 함께 만날 수 있는 날은
언제쯤이 될른지요
밤 벌레 소리가 찌륵찌륵 울어대는
세월교 난간에 기대어
나는 그대를 생각합니다 (세월교,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