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블루스 창비시선 149
신현림 지음 / 창비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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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나의 싸움, 부분) 

신현림의 세기말 블루스에선 최영미 조의 말투가 생경하게 튄다.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망치는 것과의 싸움인 삶.
산다는 일은 그래서 누구에게나 '전사되기'를 요구하는 것인데... 

그의 이런 싸움을 높이 사는 해설에서 그를 '여전사'라 부른 것은 형용모순이다.
삶이 모두 싸움이라면, 굳이 '여'를 붙이는 것은 잉여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시인을 욕되게 하는 한 글자 이기도 하리라.   

이런 신현림의 시를 읽으면서, 그런 해설을 덧붙이다니... 좋은 글이지만, 한 글자가 뉘앙스를 망친다.

나의 시는
오르는 물가를 잠재우지 못하고
병든 자의 위로도 못 되고
뜨거운 희망을 일깨우는 망치소리도 못 되고
네 상처의 주름살도 지우지 못하고
그래, 아무 힘도 못 되지
그래도 날 여류시인이라 부르진 마
여류가 뭐야? 이쑤시개야, 악세사리야?
여류는 화류란 말의 사촌 같으니
여자라는 울타리에 가두지 마 폄하하지 마
세상을 향해 품을 열어놓고
나는 돌아본다
뭣보다 진하게 느끼는 세기말을
도시의 우울과
슬픈 열정의 그림자를
사람의 욕망과 쓸쓸함을
솔직하게 비춰내고자
괴로움을 넘고자 내 노래는 출렁인다
거침없이 일렁이며 흘러가고자
사무치는 아리랑처럼 격정의 록처럼
푸른한 재즈, 블루스처럼 (나의 시, 전문)

서른이 넘어가고, 한 세기가 문을 닫을 즈음,
새로운 세기, 아니, 새로운 천년의 밀레니엄의 청사진은 아직 펼쳐지지도 않았는데,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세계 자본의 집중화로 WTO가 펼쳐지던 시대.
아직, WTC 건물에 비행기 세례가 퍼부어지기는 이전의 시대. 

세기말의 끈적거리는 블루스는
우울, 보다는
산만, 했다. 

멸종된 인간은 그리움이지만
멸종된 시간은 두통이다

사라진 어제를 향해
"그래, 네 맘대로 가라"
문을 열었다 닫는 순간
팔십년대의 그림자가 피걸레처럼 뒹굴고
투사의 외로운 운동화가 쓰러진 곳에
우르르 삐삐와 쇼핑백을 든 이들이 몰려갔다
가는 곳마다 종말의 쇠사슬인 차가 밀렸다
사람들은 제멋대로 흩어졌다
어떤 친구는 따분하다며 무덤으로 갔고
나의 할아버지는
밥 한끼 먹었을 뿐인데 백년이 지났단다
기계의 나사가 빠지면 재빨리 갈아끼우듯
세대교체는 간편했다
세월은 구름처럼 단조롭고 졸립지요
영화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을 보니
노을만큼 눈이 화악 떠집디다
비디오는 이 시대의 마약입니까?
저승 가는 길에도 비디오방에 들르시오
잠옷처럼 편한 바람이 불면
그날만큼은 TV를 끄고 시를 읽어주세요

제 청춘의 바통을 받으시고
흐지부지 끝나는 인연만큼이나 슬프지만
세월, 갈 테면 가라지요

그만 커튼을 내리시고 전기불은 꺼주세요
불빛이 꺼지면 나나 당신들
아예 지구에서 사라지면 어떡하죠
빨간 잉어가 왕겨 같은 눈물을 흘립니다
세월, 갈 테면 어서 가시지요 (세월, 갈테면 가라지요, 전문)  

뜨거운 젊음의 한복판을 지나 허무한 인간이 내뱉을 수 있는 정점을 찍은 시 같다.
세월, 갈 테면 어서 가라니... 
따분하다며 무덤으로 간 친구처럼 용기는 없고,
그저 어서 갈 테면 가라니...  

신현림의 이 시집에서 시인의 삶과 정서가 가장 질펀하게 무르녹은 시는 역시 아버지를 그린 시다.
아버지와의 애증에서 나온 시.
그만큼 삶이 담긴 시.
역시, 삶이 가득 담긴 시가 좋다. 

'삶'이라는 글자 안에,
'사람'이 감추어져 있어 그런 건지도...

나의 아버지는 민추협 사회국장 시절
불가사리처럼 들러붙던 형사를 피해서
원활한 투쟁을 위해서
민추협 사무실로 쓸려고 장의업을 하셨다
이년간 오십 구도 넘게 손수 시신을 염하셨다
늘 아버지에게선 투사의 피 냄새와
따뜻한 관짝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초여름 해당화 냄새보다 눈물겨웠다
산 사람 섬기는 머슴이 되고자 국회의원 출마했다가
두 번 낙방하시고
죽은 사람 곱게 삼베옷 입혀 저승 가는 길잡이하셨다

죽음은 죽는 것이 아니란다
남은 자를 위한 오전 열시의 햇살이 되는 것이야

그때의 아버지 모습이 파란 손수건처럼 펼쳐진다
잊고 있던 십년 전 냄새가 아지랭이같이 아른거린다 (투사 아버지, 장의사 아버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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