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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항해술 - SF 환상 문학의 거장이 들려주는 스토리텔링과 글쓰기 지침서
어슐러 K. 르 귄 지음, 김지현 옮김 / 황금가지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steering the craft가 원제목이다. craft를 기술 정도로 알아서 사전을 찾아보니, 배를 일컫는다.
배를 조정하려면... 이런 정도이니 제목을 잘 뽑았다.
이 책을 영어로 읽는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어 판으로 이 책을 읽는 일은, 하품나는 일이었다.
물론, 글쓰기 훈련을 하는 이를 돕기 위해서 그가 강의한 것을 책으로 정리한 실제적 내용인 만큼,
도움이 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예를 들자면, 시점의 설명 같은 부분은 차근차근 여느 소설 이론서보다도 설명이 잘 되어 있다.
창작을 해본 사람이 자기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하는 걸 들으니 도움이 된다.
그렇지만, 창작의 제 1원칙은 창작하는 언어를 가지고 노는 것이다.
말장난이기도 하고, 언어의 부려쓰기이기도 한데 영어를 설명하는 구절을 그대로 옮긴다손 치더라도 도움이 안 될 수밖에 없다.
'고은' 선생이 노벨상 수상 후보로 올라가는 것은, 그이의 시 세계와 한국 현대사의 상관관계에 대한 글을 통하여 가능할 수 있었겠지만, 결코 노벨상 수상자가 될 수 없는 것은, '시'의 특성상 번역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시를 쓰는 일은 '자기네 말의 정수'에 생각을 담는 형식인데, 그걸 번역해서 감상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1장. 글의 소리...도 그래서 패스 해야 하고, 2장. 구두법, 의 부분도 한국어와 영어는 천지 차이다.
한국어는 마침표나 쉼표가 없어도 문장이 ~~다. ~~했지. 이런 부분에서 끝나는 거 누구나 안다.
영어처럼 주어+동사는 맨 앞에 나오고, 툭하면 관계 대명사나 관계 부사로 뒤에서 관계절 가지고 수식하는 일이 대여섯 번 일어나는 문장이 아니란 거다. 영어에서 쉼표나 세미 콜론 없으면, 산소 부족으로 여럿 죽을 것이다.
3~5장은 재미있게 읽었다. 문장의 길이에 따른 설명과 반복법, 형용사와 부사를 간소하게 쓰기.
시인들은 죽음과 쉼표에 가장 관심이 많아요.(캐롤린 카이저, 시인)란 말에,
산문 작가들은 삶과 쉼표에 가장 관심이 많다고 저자 어슐러 르귄은 말한다.(41) 어디까지나 영어권 이야기다.
그만큼 쉼표에 숨쉬는 일이 그들 언어에선 중요한 것이다.
서술어가 뒷부분에 놓이는 우리말에선 하나의 절이 자연스럽게 쉼표 역할을 하게 된다.
서술어 뒤에서 그냥 끊어 읽음 되는 일이니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문체론'은 신선하다.
문체란 무척 단순한 문제예요. 모두 리듬이거든요. 일단 리듬을 얻기만 하면 잘못된 말은 쓰지 않게 되죠...(62)
나도 상당 부분 동감한다. 글을 쓸 때, 리듬을 타게 되면 타이핑도 쉬워지고, 문장이 매끄럽게 읽을 수 있게 된다.
이런 말을 읽을 수 있어서 독서는 즐겁다.
이 책이 별로 한국 문예 창작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지만, 또 이렇게 재미있는 말도 얻을 수 있기도 하다.
훌륭한 소설 작품의 대다수는 첫 챕터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소재를 도입하며 이 소재들은 여러 방식으로 변화하면서 내내 반복된다.
산문에서 고조되는 단어, 어구, 이미지, 사건의 반복은 음악 구조에서의 재현부와 전개부와 실제로 매우 많이 닮았다.(75)
좋은 글을 쓸 때는 앞뒤가 조응되는 것이 좋다는 말을 이렇게 해 놓으니 참 멋지다.
소나타에서 재현부, 전개부가 반복되어 주제를 변주하듯이, 글을 쓸 때도 그렇게 장치들을 놓으라는 이야기.
나는 모든 이야기 작가들에게 형용사와 부사를 주의 깊게 다루고 사려깊고 신중하게 선택하기를 권한다.
영어의 제과점이란 믿기 어려울 정도로 풍족한데,
서사적 산문은 특히 장거리를 갈 때라면 더더욱 지방보다는 근육이 더 많이 필요하니까 말이다.(82)
이야, 장거리를 갈 때라면 근육이 필요하니깐, 형용사와 부사를 잘 선택하란 말은 얼마나 그럴싸한지...
풍족한 제과점에서 쉽게 쌓이는 지방이나 쉽게 흡수되는 포도당을 얻기보다는, 오래 버틸 힘으로 근육이 필요하듯,
장기적 관점의 어휘 선택이 '서사적 산문'을 성공적으로 이끈다는 이야기겠다.
마지막 장의 '메우기와 건너뛰기'에서 '긴 발언이나 대화를 역시 무자비하게 모두 반으로 줄여라.' 이런 요구가 나온다.
안톤 체홉은 단편 퇴고법에서 '우선 처음 세 페이지를 버려라'하고 충고했다고도 한다.
글의 전체를 모르고 시작하는 단계에서 쓴 것들은 글이 전개되고 나면 버려야 할 것들로 퇴화할 수도 있는 일이다.
모두 반으로 줄여라, 내지는, 첫 세 페이지를 버려라, 하는 주문은 가혹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말을 아껴도 충분히 전달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요구일 것이고,
그런 믿음을 가진 작가라야 충분히 독자를 지루하지 않게 매혹할 수 있을 거란 이야기일 거다.
간혹가다,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써보고 싶은 때가 있다.
물론 손을 대기도 전에 욕망의 거품은 꺼지고 말지만.
이런 책을 읽노라면, 이런 잡문 말고, 진지한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쓰는 일도 멋지지 않나? 이런 망상에 또 빠지고 만다.
그렇지만, 역시, 한국인이 한국어를 부려 쓰도록 도와주는 글쓰기 도움책으로는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慢步>가 좋을 거란 생각이다. 안정효의 책은 작가가 아껴야 할 말들, 깎아내야 할 말들을 우리말로 잘 설명하고 있으니, 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