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랜 사랑 창비시선 134
고재종 지음 / 창비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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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씨구, 긍께 지금 봄바람 나부렀구만잉!"
일곱 자식 죄다 서울 보내고 홀로 사는 홍도나무집 남원할매 그 반백머리에 청명햇살 뒤집어쓴 채 나물캐는 저편을 향해, 봇도랑 치러 나오던 마흔 두살 노총각 석현이 흰 이빨 드러내며 이죽거립니다. 
"저런 오사럴 놈, 늙은이 놀리면 그 가운뎃다리가 실버들 되야불 줄은 왜 몰러?"
검게 삭은 대바구니에 벌써 냉이, 달래, 쑥, 곰방부리 등속을 수북이 캐담은 남원 할매도 아나 해보자는 듯 바구니를 쑤욱 내밀며 만만찮게 나옵니다.
"아따 동네 새암은 말라 붙어도 여자들 마음 하나는 언제나 스무살 처녀 맘으로 산다는 것인디 뭘 그려, 아 저그 보리밭은 무단히 차오르간디?"
"오매 오매 저 떡을 칠 놈 말뽄새 보소. 그려그려, 저그 남원장 노류장화라도 좋응께 요 꽃 피고 새 우는 날, 꽃나부춤 훨훨 춤서 몸 한번 후끈 풀었으면 나도 원이 없겄다. 헌디 요런 호시절 다 까묵고 니 놈은 언제 상투 틀 테여?"
"아이고, 얘기가 고로코롬 나가분가? 허지만 사방 천지에 살구꽃 펑펑 터진들 저 저 봄날은 저 혼자만 깊어가는디 낸들 워쩔 것이요, 흐흐흐."
괜스레 이죽거렸다가는 본전도 못 건졌다 싶은 석현이 이내 말꼬리 사리며 멈추었던 발 슬금슬금 떼어가는 그 쓸쓸한 뒷모습에 남원할매 그만 가슴이 애려와선 청명햇살 출렁하도록 후렴구 외칩니다.
"이따 저녁에 냉이국 끓여놓으께 오그라이, 우리집 마당에 홍도꽃도 벌겋게 펴부렀어야!" (저 홀로 가는 봄날의 이야기, 전문) 

아 글쎄 새뜸 홍도나무집 김생원은요 엊저녁부터 울어댄 누렁년이 새벽녘엔 아예 바락바락 악을 써대는 통에 잠을 설치곤 일찌감치 아래뜸 박영감에게 전화를 걸었더랍니다.
"어이, 지금 자네 부사리 좀 빌려야 쓰겄어."
"새퉁빠지게 그건 워따 쓰게?"
"아 그곳까장 안 들리던가, 우리집 누렁년 불 앓는 소리?"
"워매, 글면 과학적으로다 해결헐 일이제 이 문명 대낮에 웬 재변이라냐?"
"쎅군이 폴쎄 세 파수나 댕겨갔어도 그 모냥여."
"그려어? 글면 어디 모처럼 회춘이나 해보까!"
그 전화 뒤 곧바로 마을 대밭 돌아 공터에선 집채만 한 부사리가 배에 시뻘건 장칼을 차고 콧김을 씩씩 뿜으며 후닥닥 달려가, 꽃빛으로 단 엉덩이를 한껏 뒤로 버티고 선 누렁년 등에 번개처럼 오르고 있었드랬는데요.
아 글쎄 때마침 저 남산에서 쑤욱 올라오던 아침해가 그걸 내려다보고는, 그 해맑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은 채 숨도 제대로 못쉬고 한참 동안이나 딱! 멈추어 있더랍니다. (홍도화 필 때, 전문) 

고재종 시인은 대나무의 고장 담양에 산단다.
그의 시에서는 농투산이의 말 속에 담겼을 법한 농삿일들이 속속들이 갈무리되어 튀어나온다.
작위적으로 시를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창작 블로그 이름 마냥, <정자나무 그늘 아래> 둘러 앉아 두런두런 수다떨듯 시가 풀려 나온다.
'저 홀로 가는 봄날의 이야기'와 '홍도화 필 때'는 그렇게 흘러가는 봄날의 [정자나무 그늘 아래]가 오롯이 담겼다.   

http://cafe.daum.net/kojaejong21go 

내가 가장 아끼는 고재종의 시는 <감나무 그늘 아래>이다.

어찌 바람뿐이랴.
감나무 잎새를 반짝이는 게
어찌 햇살뿐이랴.
아까는 오색딱다구리가
따다다닥 찍고 가더니
봐 봐, 시방은 청설모가
쪼르르 타고 내려오네.
사랑이 끝났기로소니
그리움마저 사라지랴.
그 그리움이 날로 자라면
주먹송이처럼 커갈 땡감들.
때론 머리 위로 흰 구름 이고
때론 온종일 장대비 맞아보게.
이별까지 나눈 마당에
기다림은 웬 것이랴먄,
감나무 그늘에 평상을 놓고
그래 그래, 밤이면 잠 뒤척여
산이 우는 소리도 들어보고
새벽이면 퍼뜩 깨어나
계곡 물소리도 들어보게.
그 기다림 날로 익으니
서러움까지 익어선
저 짙푸른 감들, 마침내
형형 등불을 밝힐 것이라면
세상은 어찌 환하지 않으랴.
하늘은 어찌 부시지 않으랴. <감나무 그늘 아래, 전문> 

고향집 마당의 감나무에 '형형 등불'을 밝힌 것 같은 환하고 눈부신 시가 아닐까?
시골 경험이 머릿속에 자라나지 않은 아이들의 상상력 속에선 땡감이 서럽게 익어 형형 등불이 되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이런 시도 더이상 유효하지 않을는지도... 그리 생각하면 서글프다. 

그의 <가난을 위하여>에서는 작은 데서 등허리를 꿰뚫는 청신한 깨달음을 얻는 선승의 혜안을 읽는다.
백석의 '갈매나무'를 떠올리게 하는 짜릿한 시.

꼭두새벽,넉점도 못됐는데
눈빛 비쳐든 창호문 새하얘서
맑게 깨어나는 정신, 서재에 들어
한기 뚝뚝 듣는 寒山詩한산시 펼친다
봄에 논밭 갈아 가을에 씨 거두고
엄동삼동에 책 읽는 버릇
그 무슨 천금을 줘도 못 바꿀레라
내 비록 가문 들판, 몇 줌 곡식 거둬
세안 양식에 못 미칠지라도
아내 몰래 쌀과 바꿔온 몇 권의 시집들
그 서책 닳는 만큼 깨이는 넋인 양
헛간 장태에선 수탉울음 청청하고
창호에 비쳐든 눈빛은 하도 좋아
시 일 편에 담고자 펜끝 세우니
늙은 아버진 벌써 고샅길 샘길 내느라
쓱쓱 눈 쓰는 소리 바쁘시다
옳거니, 세상의 진실과 아름다움은
숫눈 쌓인 날 제때 기침하여
사람 내왕할 길부터 내는 데 또 있는 것
책 덮고 급히 앞문을 차니
눈부셔라, 울 너머 큰눈 얹힌 청대숲
그 휘적휘적 휘어진 대줄기에서
포르릉 눈 털며 일군의 새 떼 치솟나니
마침내 나 사랑하리, 이 가난한 날들의
천지 사계 공으로 누리는 사치며
거기에 죄 한 점 더하지 않는 꿈이랑. <가난을 위하여, 전문>

농촌에 산다는 일은 그저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그렇지만, 힘겹고 팍팍한 삶 속에서 '바람 부는 날' 보리물결 넘실거리는 청보리밭 바라보며 가슴 막히는 시인은
천상 시인이다. 

나 혼자다
나 혼자서만 바라보는
순초록 보리물결
그 앞에서
가슴이 꽉 막혀선
먼 데로 눈 들고 마는
형벌이다 

시방 저만치에선
사과꽃도 펄펄 날리는 <바람 부는 날, 전문> 

들녘 가득 피어난 흰 들국화를 보고는 이야기 하나가 휘리릭 머리에 사로잡힌다. 

기차는 마침내 빼액 소리를 지르며
저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져가고
사내는 그녀가 마지막 건네주고 간
구리반지 하나를 일그러뜨리며
털썩 철로변에 주저앉는 그 순간
사내의 가슴속에 가득 출렁이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라도 한 듯
그 앞에 흰 들국화 서리서리 피어났습니다 (그 순간, 전문) 

이런 풍경에서 우러난 서사란... 

팍팍하고 한켠 시들한 농촌 생활을
형형하게 눈뜨고 지켜보게 하는 그의 올곧은 정신은 <겨울나기>에서 번뜩이는 빛으로 서기를 발한다. 

또또 마음 하나 잘못 잡으면
송두리째 넘어갈 삭풍 속에서
되레 그 여린 우듬지 끝에
형형 별을 이고 서있을 미루나무여 

겨울을 겨울답게 나는 것들은 
뒷산 봉우리처럼 조금은 높고
그 끝에 둔 꿈처럼 조금은 외롭고
그걸 보는 정신처럼 조금은 성성하리 (겨울나기, 부분)

김용택 시와 달리, 고재종의 시를 읽는 일은 가슴을 쩌릿쩌릿하게 하며 반성하게 하는 맛이 있다.
한겨울 얼음이 둥둥뜬 막걸리 한 사발을 쫙 들이켜는 맛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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