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잠 삶의 시선 17
송경동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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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의 시를 읽는 일은,
찔리는 일이다.
내게 아직도 양심이란 것이 남아있다면, 양심이 찔리는 일이고,
내게도 일말의 양식이란 것이 있다면, 양식에 찔리는 일이다.
모두들 제 눈 앞의 밥그릇 하나 움켜쥐고 딴데 한눈 팔지 않으려 굳이 잊고 살려하는 세상에서,
아직도 노동 현장의 그는 '삶의 현장'을 살아 간다.
살고 있고 살아 있다.
그래서 나는 몹시 부끄러워하며 그를 읽는 일을 미뤄두고 있었던 것이다. 

한때는 운동권이었다고 그 무용담을 늘어놓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맞아 죽고, 떨어져 죽고, 목매 죽고, 배갈라 죽고, 불타 죽어갔다.
'혁명'이란 유령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시대에...
이제 '람보'란 정신병자에 빙의해 좀 불쌍하게 보이려했던 미국이,
슈퍼맨처럼 세계를 구한다고 오버하다가 그것도 안 먹혀 들자,
드디어 "슈퍼 배드"가 되어 나타났다.

그래 난 나쁜 넘이다. 그래서, 너는 뭐 좀 다르냐? 피식~
징그러운 세상이다. 

양철지붕 두드리며 
밤새 내리는 비 

나도 누군가의 영혼을 밤새 두드리는
겨울 찬비가 될 수 있다면
하지만 난 아직도
세상의 음계에 맞춰
내 노래 조율하는 법을 몰라  

내 노래는 내가 죽어도
내 목 밖에서 객처럼 서성일 것인가
밤새 내 영혼을 두드리는
하얀 비 (하얀 비, 전문)

 

양철지붕, 함석지붕 아래서 웅크려본 사람은 안다.
양철지붕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얼마나 크게 울리는지... 

모두들 맛집찾아 드라이브 떠나는 걸로 소일거릴 삼고,
비정규직 투쟁 따위, 용산참사 따위는 기억 속에서 굳이 지우려는 노력까지 할 것도 없이 눈감고 사는 세상. 

그는 양철지붕 아래서
오롯이 빗소리를 들으며 잠들지 못하고,
투쟁의 현장에서 삶을 사는 사람이다. 

태백산 자락 인적 끊긴 국유림도
터벅터벅 또 한 산굽이 돌자
세 명의 산림청 하급직원들이
순한 포클레인과 트럭 한 대를
천길 낭떠러지 위에 묵화처럼 걸어두고
식은 찬합밥을 먹고 있다. 

사람이 아니고서는 만들지 못할 풍경! 

지지난날 태풍으로
깎이고 패인 길을 손질하던 참이라는데
그들이 간지럼 태우면
산도 계곡도 그만 모공 서늘해져
있는 손 없는 손 모두 손사래질치며
킬킬킬거리며 온 산 한번 더 싱그러워질 것만 같아
태풍에 씻긴 나뭇잎마냥
푸릇푸릇 좋았다 (깨끗한 풍경, 전문)

노동의 싱그러움을 동양화 한폭에 담았다.
전통적 동양화에는 자연을 크게, 사람을 작게 그렸는데,
송경동의 동양화 화폭엔 인부들과 포클레인이 굵직한 선으로 들어앉았다. 풍부한 먹빛으로...  

뉴스에 가끔씩 공사장에서 인부들이 추락사한 소식을 듣기는 어렵지 않다.
얼마 전엔 용광로에 인부가 빠져 흔적도 없이 죽기도 했다.  

의지가지 없는 철골 공사장
수십 미터 허공 외빔 위에서 만나면
번갈아 길 터주며 목숨을 나누던 우리...잘 가시라
가서라도 이 추운 겨울 새벽 7시 같은 날
다시 수십 미터 허공 위 얼어붙은 빔을 타라 한다면
그가 옥황상제라도 면상을 걷어차 버리시길
잘 가시라 (저 하늘 위에 눈물샘자리, 부분) 

 

안전장치라곤 '안전제일' 표지뿐인 공사장. 슬픈 일은 드물지 않다.
의지가지 없는 철골 공사장의 수십 미터 허공 외빔 위를 번갈아가며 목숨걸고 번 돈.
이제 그 돈도 벌 길 없어진 이들의 한숨이 그대로 하늘 위에 눈물샘자리가 되어 별빛으로 반짝댄다.  

어둠에 깔린 가리봉 오거리
버스 정류장 앞 꽉 막힌 도로에
12인승 봉고차 한대가 와 선다
날일 마친 용역잡부들이 빼곡히 앉아
닭장차 안 죄수들처럼
무표정하게 창밖을 보고 있다

셋 앉는 좌석에 다섯씩 앉고
엔진룸 위에 한 줄이 더 앉았다
육십이 훨 넘은 노인네부터
서른 초반의 사내
이국의 푸른 눈동자까지
한결같이 머리칼이 누렇게 새었다

어떤 빼어난 은유와 상징으로도
그들을 그릴 수가 없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문) 

송경동의 시는 보통 '삶'을 그대로 옮기거나,
생각을 적는 일기 같다.
그렇지만, 이렇게 묘사가 치밀한 시는 드문 경우인데, 
송경동의 묘사 속에서 <어떤 빼어난 은유와 상징>도 먹히지 않는 경지를 만난다. 

말 그대로 기가 막히는 상황이랄까.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담긴
케테  콜비츠의 굵은 선이거나 고흐의 거친 터치로 그려낸 슬픔의 결정체를 보는 듯 하다. 

정말 어떤 말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시다. 

 

<고흐, 감자먹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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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7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7 0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0-09-28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의 시 감상은 참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 시집 참 오래도록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경동선배가 '창비'에서 낸 두번째 시집보다 이 첫번째 시집이 훨씬 더 좋더라구요. ^^

글샘 2010-09-28 08:41   좋아요 0 | URL
두 번째 시집은 긁어모은 시들이 좀 많죠. ^^
아무래도 첫~ 시집이 더 짠한 거 같습니다.
시 감상의 제 몫이 아니라, 읽는 사람 몫이죠. ㅎㅎ